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05
01004 Omnibus – Queen Of Silhouette. =========================================================================
북 대륙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 코란.
코란을 관리하는 대표 클랜, 남부 자유 연합.
두 개 이상의 클랜이 서로 합동해서 만든 조직을 연합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남부 자유 연합은 무려 여덟 개의 클랜이 손을 잡아 출범한 거대 연맹이다.
전투를 전담하는 수(秀), 남벌(南伐), 세렝게티(Serengeti), 아르테미스(Artemis).
상단을 관리하는 상인 조합(Association Of Merchants), 백화(百花).
첩보를 담당하는 가리사니, 이끼.
무력, 돈, 정보.
이 삼박자가 고루 조화돼 탄생한 연합의 영향력은 실로 무소불위 권력이라 해도 부족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세력도 날로 성장해 소도시로 감당하기 어렵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터.
한데 오늘 어쩐 일인지 연합 본부 건물은 웅장한 외관과 다르게 때아닌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실패라.”
후우우우-.
큼직한 원형 탁자가 놓인 회의실 내, 상석에 앉은 사내가 연기를 길게 뱉었다.
동등을 상징하는 원탁에서 상석을 따지는 건 웃기지만, 어쨌든 여덟 클랜의 집합인 만큼 엄연히 서열은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 연합 서열 일 위가 북쪽 자리에 앉은 수 로드이자 시크릿 클래스 소유자, 박태진이었다.
“우리 쪽에서 준비한 애들이 삼십 명. 밤의 거리에서 고르고 골라 고용한 놈들이 여든 명. …그런데 실패했다?”
까딱까딱.
검지와 중지 틈에 꽂은 연초를 흔들며 말하던 박태진이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그것도 목표였던 뇌제는 습격도 못 하고 전멸했다. 연합 최고 정예는 깡그리 살해당하고, 밤의 거리에서 살아남은 놈은 겨우 한 놈. 그 결과가 이거라고? 흐흐.”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이게 뭐야! 전력만 잔뜩 잃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북쪽을 기준으로 왼쪽 두 번째에 앉은 여성이 강하게 불만을 터뜨렸다.
레어 클래스 사용자이며 아르테미스 클랜 로드 우설희.
누구 말마따나 이번 습격 사건에 가장 많은 인원을 투입한 만큼, 또 무엇보다 처참히 실패했으니 불평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태진은 킬킬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글쎄, 망신당할 건 없지 않나? 들켜도 꼬리 자를 준비는 다 해놨을 거 아니냐?”
“뭐라고?”
“화내지 마. 난 단지….”
“넌 이 상황이 그렇게 웃기나?”
흉흉한 음성이 박태진과 우설희 사이를 갈라놨다.
손을 내젓던 박태진이 흘끗 눈을 들었다.
맞은편으로 한 사내가 연초를 꼬나물며 마주 보고 있다.
웃음은 단숨에 가라앉았다.
“왜? 신혁.”
신혁.
코란의 맹주를 자처하는 수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남벌 클랜 로드이자, 연합 서열 이 위의 사용자.
단도직입으로 말해서 박태진의 경쟁자다.
한동안 마주 보던 두 사내 중, 신혁이 입꼬리를 살그머니 말아 올렸다.
“아니, 나도 웃겨서.”
입에 문 연초를 빼더니 아까 박태진이 한 것처럼 경망하게 흔들기 시작한다.
“누구더라…. 임한나랬나? 아무튼, 네가 모니카의 꽃한테 고백했다 차였던 사건만큼 웃겨.”
빈정거림이 다분한, 아니 대놓고 비웃는 말이었다.
박태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자, 자. 또 왜 이래. 문제는 따로 있지 않나. 삼천포로 적당히 빠지자고.”
긴장이 천장을 뚫을 듯 치솟는 찰나, 중년의 남성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상인 조합 로드 서지환.
코란에 흐르는 자금을 한 손에 쥔 거물이며 연합을 창설한 공신이었다.
박태진과 신혁이 조용해지자, 긴 한숨을 내쉬며 거뭇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상황이 묘해…. 우리가 비밀리에 보낸 척살 부대가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전멸했어.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 놈의 말을 들어보니 해밀 클랜은 자기네가 습격당할 뻔했다는 사실도 모를 거라 하더라고.”
“저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우리 계획을 알고, 미리 망쳤다는 거잖아요?”
우설희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아직 분이 안 가시는지 박태진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혹시 모르죠. 내부에 실패를 기도한 배신자가 있을지.”
“이년이? 계집이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쾅!
강한 충격에 원탁이 흔들거렸다.
건너편에 앉은 거한, 세렝게티 로드 백두산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뭐? 년? 계집? 너 말 다했냐?”
우설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리춤의 단검을 뽑으며 자세를 잡는다.
서지환은 이마를 꾹 누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범인은 그림자를 사용했다고 하던데.”
그림자.
그 말이 나오자마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박태진은 백두산을 향해, 신혁은 우설희를 향해 각자 손짓한다.
두 남녀는 서로 눈치 보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 중, 먼저 말문을 연 건 박태진이었다.
“그림자라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 그녀밖에 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림자 여왕이 왜? 그녀는 머셔너리 클랜이 아닙니까? 굳이 우리와 적대할 이유는….”
“나도 몰랐는데 목표, 즉 해밀 로드가 머셔너리 로드의 친형이라고 하더군.”
박태진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설마 둘이 혈육 관계일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동시 입장이라면 모를까, 한 형제가 각각 시기가 다르게 홀 플레인에 소환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쨌든 머셔너리에서 멋대로 끼어든 건 맞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우설희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보기도 모호해. 확인 결과, 현재 두 클랜은 동맹 관계야.”
서지환이 담담히 말하니 우설희는 할 말이 없는 듯 찌그러졌다.
기실 애초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으니 명분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한참 입맛만 다시던 서지환은 결심한 듯 주변을 돌아봤다.
“사실 난 이번 일은 이쯤에서 접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접자…. 고요?”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미 실패는 했고.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또, 난 그림자 여왕이 경고했다는 생각이 들거든.”
“경고?”
박태진의 반문에 서지환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봐봐. 그 많던 놈 중 딱 한 놈만 돌아왔잖나. 그리고 그림자 사용을 숨긴 것도 아니고. 왜 그랬을까?”
박태진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 못 알아들을 정도로 녹록한 사용자는 이곳에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네요. 말씀대로 이쯤에서 접고, 헤일로 관련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태진이 담담히 수긍했다.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백지로 돌리자는 말이었다.
한편으로 왜 습격을 계획했는지 본심이 깃든 말이기도 했다.
왜냐면 해밀은 동부가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차기 헤일로 대표 선발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 클랜이 될 테니까.
서지환은 큰 시름 놓은 얼굴로 두둑한 뱃살을 두드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림자 여왕이 전면에 나선 이상….”
그때였다.
“잠깐. 이대로 쫑내자고? 정말로?”
일곱 쌍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쏠렸다.
“…뭐 의견이라도?”
박태진이 묻자, 신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장난해? 머셔너리를 이대로 놔두자고? 당연히 복수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더니 다시 연초를 입에 물며 의자에 몸을 묻는다.
“이야…. 왜들 이래. 뭘 두려워하는 거야? 머셔너리 클랜이 창설된 지 얼마나 됐다고? 끽해야 일 년 좀 넘었냐?”
“…….”
“우리, 올해로 구 년 째야. 코란에 둥지 튼 지 십 년이 다 돼 간다고. 그런데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진 연합이 고작 신생 클랜 하나 무서워서 발 뺀다는 게 말이 돼?”
“…….”
연합의 자부심이 서려 있는 자못 거만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박태진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네가 말해봐.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그림자 여왕이 움직였다는 건, 그 동생 새끼라는 머셔너리 로드가 지시했다는 거잖아?”
“알아. 그래서?”
“더 말할 필요 있나. 몸소 선빵을 날리셨는데, 우리도 갚아줘야 인지상정이지.”
신혁은 안 그래? 라고 덧붙이며 동의를 구하는 듯 원탁을 둘러봤다.
“으음…. 글쎄올시다. 혁이 형님. 굳이 머셔너리 클랜을 작업 칠 필요는….”
“아니지. 두산아. 따지고 보면 머셔너리도 만만치 않은 경쟁 클랜이야. 전쟁에서 활약 좀 했다고 대표 클랜 주자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중이라니까?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소수인 지금 건드는 게 낫지 않겠어? 오히려 해밀보다 쉬울 수 있다.”
말인즉 목표를 선회해서 머셔너리 클랜을 먼저 젖힌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터라, 난색을 보이던 백두산은 입을 다물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림자 여왕이 버티고 있다니까. 거기다 이번 일 실패로 우리 전력도….”
“거 참. 그놈의 그림자 여왕, 그림자 여왕!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여하튼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지환이 살살 달랬으나 신혁은 코웃음 치며 품에서 뭔가 꺼냈다.
손에 쥔 건 작달막한 수정 구슬이었다.
“이게 뭘~까?”
장난스레 흔들더니 모두 볼 수 있도록 탁상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말했다.
“통신 구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살문과 직통으로 연결돼 있지.”
살문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살문의 주 활동 무대가 코란 내 밤의 거리인 만큼 서로 관계가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통신이 가능한 구슬을 갖고 있다는 건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오죽하면 심드렁하던 박태진도 매우 놀란 빛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던 신혁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전력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뭐, 돈은 좀 들겠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왜냐면 신혁의 주장이 정말로 그럴듯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살문(殺門).
북 대륙 최고, 최강, 최악의 살수 클랜.
그 잔인함과 포악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다.
신혁의 말마따나 외부 세력에 청부하면 전력 저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력도 말하면 입 아프다.
지금이야 서로 갈라섰으나 그 명성 높은 그림자 여왕을 키워낸 단체가 아닌가?
또 일 회차 시절(김수현만 아는 사실이지만), 오죽하면 부랑자 최고 정예라는 살인 여단(Murder Brigade)도 살문만큼은 피했을까?
“글쎄…. 과연 살문이 움직여줄까? 나도 서너 번 접촉해봤지만 살문은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아.”
서지환이 어째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신혁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움직일 겁니다. 놈들은 고연주와 원한이 있으니까요.”
“둘이 갈라선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벌써 몇 년이나 지나지 않았나.”
“또 있습니다.”
“응? 뭔데?”
“아…. 이건 저도 우연히 알게 된 거라 밝히기 어렵네요. 당사자가 싫어할 것 같아서. 아무튼, 어때요?”
“흠.”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애꿎은 원탁만 톡톡 두드리던 서지환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했다.
“좋아. 살문이 움직여만 준다면 한 번 해볼 만해.”
마침내 원로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넌?”
신혁의 뻐기는 듯한 두 눈이 정면을 향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박태진이 힐끗 눈을 들었다.
이윽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안 될 것 없지.”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해보자고.”
============================ 작품 후기 ============================
이후 살문과 코란 연합이 어떻게 됐더라…. ^^;
PS. 메모라이즈 비주얼 노벨 히든 스토리 개방에 관련해서 간간이 코멘트가 보이는데, 후기를 빌려 알려드릴게요. 그럼 공략 갑니다!
세라프 선택지 中 – 2번 : 글쎄….
안솔 선택지 中 – 2번 : 초코바를 주지 않는다.
우정민, 선유운 선택지 中 – 1번 : 선유운에게 건네준다.
이렇게 선택하시면, 조건을 충족했다면서 히든 스토리가 개방됩니다.
히든 스토리도 재밌으니 부디 마음껏 즐겨주세요!
seta1ef / ㅋㅋㅋㅋ 보고 한참 웃었어요. 안현이 또… ㅋㅋㅋㅋ
creacture /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공대 전공이지만요.(?)
샤티엔 / 용이 잠든 산맥보다는 훨씬 덜한 사건입니다!
Velos / 왜냐면 고연주 또한 김수현처럼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되찾았으니까요. 🙂
kurosx13 / 사실 걱정입니다. 이번 스토리는 너무 잔인하고, 불쾌한 내용이 있어서요. ㅜ.ㅠ
카눌라스 / 정답입니다!
샤티엔, 소공동백작 / 쿠폰 감사합니다. 2월부터 좀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darktree / 음, 사실 저는 그분들의 코멘트가 이해가 가요. 외전이 가볍고 우스운 이야기로 진행된 건 사실이고, 그동안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해주셨던 독자님들은 아마 실망을 금하지 못하셨겠죠. 기대에 부응해드리지 못해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