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14
01013 Omnibus – Queen Of Silhouette. =========================================================================
한 번 터진 울음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멍하니 보던 황금 표국 로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년이 성폭력에 굴복해 질질 짜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오죽하면 묘한 정복감마저 은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정말 너무하다고…!”
목놓아 울면서도 늘설영은 끊임없이 말을 반복한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독기로 가득 찼던 얼굴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적셔질 정도였다.
살짝 눈을 뜬 김수현이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웃는다.
“너무해? 너무하다고?”
“넌…!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놈들한테 어떤 짓을 당했는지! 너는…!”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늘설영이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김수현이 귀찮다는 듯 손을 설레설레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됐어. 여기서 네 과거 궁금한 사람 아무도 없다.”
“이…!”
“중요한 건 오직 하나다.”
“끅…. 흑….”
서럽게 울어 젖히는 늘설영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별꼴을 다 본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넌 나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이놈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뭐….”
“아니잖아. 너도 똑같잖아?”
“……!”
그 말에 늘설영의 울음이 뚝 멎는다.
히끅, 딸꾹질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닌가?”
한 번 지껄여보라는 말투에 늘설영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살문은 분명히 최강의 암살자 클랜이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따로 붙는 수식어가 있다.
최악.
북 대륙 모든 클랜이 두려워해 눈감고 못 본 척하는 곳이다.
부랑자 최고 정예라는 살인 여단조차 꼬리 내리고 피했었던 곳이다.
이 이상 어떤 말이 필요할까?
중요한 건 살문은 절대로 의적, 즉 의로운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살인, 강도, 강간, 폭력….
이런 것과 궤를 달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가 숨 쉬듯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늘설영은 이러한 살문의 위법 행위에 누구보다 깊숙이 참여했던 사용자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설영은 인정 못 하겠다는 듯 멍하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자 가만히 응시하던 김수현의 낯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니면, 그건가? 네가 당한 일은 천하에 억울한 일이고, 네가 한 짓거리는 티끌만 한 일이었나?”
빈정거리는 말은 비수처럼 가슴 깊숙이 꽂혔다.
“난 말이지, 항상 생각하거든.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했던 짓을 언젠가 고스란히 돌려받는다…. 즉 일종의 각오라 해야 하나.”
후우, 희뿌연 한 연기가 담담한 말소리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런데 그런 각오도 없이. 자기가 유리할 때는 이런 세상이니 당연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하면서. 불리할 때만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돌아가? 그것참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지 않나?”
문득 김수현의 뇌리로 한 여인이 스쳤다.
상냥한 얼굴에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한 그녀.
미래에 성후(聖后)라 불리는 거물이자,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다면 지금쯤 커다란 아군이 됐을지도 모르는 사용자.
“정말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한 마디 덧붙인 김수현이 탁상에 꽂아둔 무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너처럼 위선적인 년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어진다고….”
까맣게 죽었던 눈동자에 다시금 요요한 붉은빛이 물든다.
그 눈빛과 마주한 늘설영이 휘청거리더니 느닷없이 털썩 쓰러진다.
갑자기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진 탓이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던 황금 표국 로드가 때는 이때다 하고 나섰다.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저년 저거,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헤헤!”
손을 싹싹 비비며 은근히 기대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김수현은 보지도 않고 느긋이 머리를 끄덕였다.
설마 설마 하던 황금 표국 로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이십니까?”
김수현은 아무 말도 않고 손을 뻗어 고연주를 끌어당겼다.
이내 어깨를 감싸던 손이 살그머니 쇄골을 타고 내려가 가슴골 속으로 파고든다.
풍만하다 못해 터질 듯한 젖을 꽉 움켜쥐자, 고연주는 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난 여기서 놀 테니 알아서 하라는 듯한 태도.
김수현이 억세게 주물럭거리는 고연주의 젖가슴을 황금 표국 로드는 음심이 동한 눈으로 바라봤다.
반듯한 이마와 오뚝한 콧날.
살짝 찢겨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와 왼쪽 눈 아래 찍힌 관능적인 눈물점.
버들가지 같은 허리와 대조되는 불룩하게 솟은 젖가슴.
그리고 약간 화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꽉 다문 도톰한 붉은 입술까지.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저 늘설영도 빛이 바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다.
누군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과연 자신의 아래 깔렸을 때, 저 위명 자자한 그림자 여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또 어떤 교성을 지를까?
황금 표국 로드의 머릿속이 온갖 난잡하고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다음 순간.
“!”
꼭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상한 시선을 느꼈는지 김수현의 눈동자가 힐끗 올라왔기 때문이다.
황금 표국 로드는 곧바로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지금 이 장소에서 절대자는 눈앞의 사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절대자의 개.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주인이 주는 밥만 먹으면 된다.
또, 방금 주어진 음식은 밥 수준이 아니다.
늘설영 정도면 개가 먹기에 과분한 별미, 아니 진미 중의 진미가 아닌가?
굳이 천하일미까지 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 정말로…. 먼저 안 하셔도…?”
세 번째 질문에 김수현의 낯에 짜증이 서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가장 확실한 보증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장내에 환호가 떠르르 울렸다.
곳곳에서 바지가 벗어 던져지고, 옷을 벗은 황금 표국 클랜원들이 엎어진 여인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둘러싸인 늘설영은 망연히 올려다볼 뿐.
“거기 잡어, 거기!”
“처, 처음은 나야!”
“야 인마! 이 자식이 어디서 감히…! 처음은 당연히 나잖아!”
“아이 씨, 로드! 그럼 저는 똥구멍이라도…!”
“오오오오! 이년 젖 좀 봐! 엄청나게 부드럽잖아!”
“비켜! 입은 내가 먼저야!”
늘씬한 나신이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올려졌다.
꽉 붙잡힌 사지가 좌우로 한껏 벌려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늘설영이 힘없이 저항한다.
“그, 그만둬….”
그러나 들은 척도 않는다.
몸에는 이미 수십의 손길이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중 한 우악스러운 손이 돌출된 젖꼭지를 쥐더니 위로 쭉 잡아당겼다.
“아으으윽!”
풍만한 유방이 원뿔처럼 늘어진 탓에 늘설영의 몸이 펄떡거렸다.
“어이쿠! 고년 비명 한 번 감미롭네?”
“완전 활어야, 활어.”
낄낄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성질 급한 사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자신의 양물에 돌돌 감기까지 한다.
“그만…!”
찰싹!
한 번 더 외치려는 찰나,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그러나 불쾌한 것이 입술을 때렸다.
어느새 다가온 걸까.
황금 표국 로드가 큼직한 흉물을 손으로 쥔 채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헤헤, 헤헤!”
실없이 웃으며 음욕에 젖은 눈길을 보낸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 여인인가.
얼마나 먹고 싶었던가?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이 개자식!”
거친 욕설을 뱉는 입에 또 한 번 귀두가 명중한다.
“더러운 거 치우지 못해!”
침을 퉤 뱉는 늘설영을 보며 황금 표국 로드는 비열하게 웃었다.
“말버릇이 험하네~. 네 어미도 날 주인님, 나중에는 여보~라고 불렀는데 말이야~.”
“입 닥쳐어어어어! 이 벌레 같은 새끼아아아아!”
“그 벌레의 애를 낳게 해주마. 사실 좀 아쉬웠다고. 네 여동생 말이야. 속살도 야들야들하니 맛 좋았는데 하도 언니~ 언니~ 하며 울어 젖혀서….”
“죽여…! 우욱? 우우우욱!”
늘설영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이내 뭐라 외치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사내가 양물을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은 통에 헛구역질만 하고 말았다.
씩 웃은 황금 표국 로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둔부 사이로 다가섰다.
꿀꺽.
침을 삼키며 조준한 귀두를 음부를 잇댄다.
반듯하게 그어진 선을 따라 위아래로 비비기 시작하자, 앞으로 벌어질 일을 깨달은 걸까.
자신의 소중한 곳을 농락하는 흉흉한 감촉에 늘설영의 온몸이 푸들푸들 떨린다.
“난 참 운도 좋다니까…. 어이쿠! 가만히 있으라고? 만약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잖아?”
귓전을 울리는 속닥거림.
이어서 귓불을 날름 핥는 감촉에 늘설영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문득 아직 괴어 있던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지금껏 소중히 지켜온 처녀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철천지원수에게 빼앗기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굴욕적이었다.
“로드! 빨리빨리!”
주변의 재촉에 희디흰 엉덩이를 토닥거리던 황금 표국 로드는 헛기침하며 양물을 내리눌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자 그럼 슬슬 해볼까?”
귀두를 음부에 맞추고 후 숨을 내쉰다.
한껏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을 음미하며 뜸을 들이더니 서서히 허리를 밀어 넣는다.
꾹 짓눌린 음부가 둥그스름하게 벌어지며 구멍 속 연한 분홍빛 속살이 조금씩 드러난다.
안으로 살금살금 침입해오는 이물감을 느낀 걸까?
“으으…!”
불현듯 늘설영의 두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파르르 떨리던 검은 동공이 위로 넘어가고, 눈알에는 흰자위만이 가득하다.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텼던 정신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기절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대망의 세 모녀 개통식이다!”
그때 황금 표국 로드가 우렁차게 외치며 하체에 잔뜩 힘을 줬다.
늘설영의 귀에도 세 모녀라는 말이 스쳤다.
그 찰나의 순간.
황금 표국 로드가 막 허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과 늘설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으라차차!”
푹!
무언가 깊숙하게 꽂히는 소리.
필요 이상의 자극으로 덜덜거리던 다리의 떨림이 뚝 멎는다.
단번에 관통한 지점에서 접합부에서 새어 나온 핏물이 허벅지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흐으으으…!”
이상한 신음을 흘린 황금 표국 로드는 천장으로 치켰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이윽고 두 눈으로 당혹감이 차올랐다.
왼쪽 허벅지를 꿰뚫은 가느다란 실선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갑자기 힘이 빠져 성기는 제대로 밀어 넣지도 못했다.
“뭐…?”
의아해 하는 찰나, 양물을 쥐고 있던 늘설영의 양손 끝에서 아홉 개의 실이 추가로 뻗어졌다.
푹푹, 푹푹푹, 푹푹푹푹!
실은 다른 아홉 명의 신체에 각각 고루고루 틀어박혔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던 황금 표국 로드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잠…!”
그리고 다음 순간, 늘설영의 열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피피피핏!
“크아아악!”
“아아아악!”
핏물이 분수처럼 천장으로 치솟았다.
마력 실의 이동은 사람의 신체를 안쪽에서부터 너무나 쉽게 잘라냈다.
목이, 팔이, 어깨가, 다리가, 절단된 신체가 사방을 날아다녔다.
그 속에서 열 명이 선혈이 난무하는 춤을 춘다.
쿵쿵쿵쿵, 끽소리도 못하고 죽은 시신이 차례대로 허물어졌다.
끝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다.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늘설영이 좌우로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구석에서 벌벌 떨며 동료가 당하는 걸 보고 있던 사내가 외쳤다.
“머, 머셔너리 로드!”
그러나 곧 말을 멈췄다.
왜냐면 김수현은 여전히 탁상에 걸터앉아 있었으니까.
입꼬리를 씩 끌어올린 채로.
빙고, 라고 생각하는 듯이.
“응?”
옆을 돌아본 김수현의 어라, 의외라는 듯이 감탄한다.
“저기에 끼지 않은 건 꽤 칭찬할 만한데…. 뭐야.”
기특하다는 듯이 말하더니 김샜다는 기색을 비쳤다.
사내의 아래에 깔린 여성 살문 클랜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쪽이었나.”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무검을 던졌다.
칼끝은 미간에 정확히 명중해 사내는 창졸간 시체로 변해 쓰러졌다.
“수현!”
놀란 얼굴로 보던 고연주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예?”
“예, 예?”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상대를 보고 말을 더듬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늘설영은 성난 파도처럼 황금 표국 클랜을 휩쓰는 중이었다.
그 폭풍과도 같은 살인에 김수현이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역시 시크릿 클래스라 이건가. 집단 전투에서는 상당히 쓸 만하겠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 황금 표국요?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내 것을 탐내는 게 좀 거슬리더라고요.”
“…뭐라고요?”
고연주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아까 황금 표국 로드의 시선은 당연히 느꼈었다.
하지만 그것은 김수현이 일부러 의도했다고 봐도 무방한 행동이었다.
“진심, 이에요?”
어깨를 으쓱한 김수현이 탁상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수십 명에 달하던 황금 표국 클랜원이 한 명도 남김없이 시체로 화했다.
그리고 늘설영은 비틀비틀하면서도 김수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독기와 원한이 물씬 풍기는 눈초리.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이미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니, 입속말로 무어라 끊임없이 중얼중얼하는 것이 악귀의 형상과도 같다.
정신이 극한으로 몰아붙여 진 결과, 이지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죽여…. 버리….”
“꽤 좋은 광대였어. 잘했다.”
칭찬하자마자, 늘설영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빅토리아의 영광이 빛을 발했다.
채채채챙!
화려하게 발현한 검 빛이 전신에 휩싸였으나.
“키아아악!”
놀랍게도 늘설영은 온몸을 웅크린 채로 뚫고 나왔다.
“호오.”
탄성을 지른 김수현이 빅토리아의 영광을 교차하듯 휘둘렀다.
쏜살같이 날아간 X자 검기는 늘설영의 양 허벅지를 비스듬히 가르며 지나쳤다.
우당탕탕!
두 다리가 잘렸으니 넘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설영은 멈추지 않았다.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도 김수현을 겨냥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팔이 우뚝 붙잡히더니 어깨로부터 쭉 찢어졌다.
“끼아아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괴성이 장내가 떠나가라 뒤흔들었다.
김수현은 손에 든 팔을 버리고 시끄럽다는 듯이 귀를 막는다.
이형환위로 늘설영의 뒤를 점거해 순식간에 양팔을 뜯어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머리칼을 틀어쥔 김수현이 팔다리가 잘려 몸통만 남은 늘설영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비명은 멎었다.
대신 힉힉 숨넘어가는 소리와 보글보글 거품 이는 소리만이 날 뿐.
“개한테 먹이로 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너도 인형으로 살래? 어떻게 생각해?”
칼등으로 뺨을 툭툭 치며 김수현은 웃었다.
늘설영의 고개가 점차 젖혀져 사슴 같은 목덜미가 부각된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났는지 김수현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때였다.
“아.”
찰나의 순간, 거무스름한 늘설영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 아래 몸통이 툭 떨어지자, 김수현이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어.”
스리슬쩍 옆으로 돌아간 눈동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고연주를 확인했다.
그녀의 왼손에는 피 묻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똑같아요.”
“예?”
“저도, 똑같다고요. 로드가 걔한테 관심을 갖는 게 짜증 나서, 죽였어요.”
숨을 몰아쉬는지 말소리는 중간중간 간헐적으로 끊겼다.
하, 헛웃음을 지은 김수현은 목만 남은 늘설영을 흘겼다.
“이 정도 독종을 찾는 것도 드문데…. 흠.”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도 잠시.
더 관심 없다는 양 휙 던지고 남은 인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수현!”
그러나 이번에도 고연주가 저지했다.
서둘러 달려와 김수현의 한쪽 팔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
“이쯤 했으면 충분하잖아요.”
“사용자 고연주.”
“아까 그러셨잖아요. 제 얼굴을 봐서 봐줄 수도 있다고.”
그러자 약간 실망했다는 눈초리를 보내던 김수현이 돌연 킬킬거렸다.
“왜요. 이제 와서 불쌍해지기라도 했습니까?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으니까? 막 동정심이 솟구치기라도 합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고연주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살문은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요. 또 쓸 만하기도 하고요. 살려주면 분명히 은혜를 잊지 않을 거예요.”
“은혜? 은혜라고요. 하하.”
“네. 제가 책임질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제 그만….”
“…….”
그 말에 웃음이 뚝 멎었다.
한참 동안 고연주를 이모저모 살피던 김수현은 김이 빠진 듯 쯧 혀를 찼다.
“책임이라…. 고연주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그나저나 황금 표국은 어떡하실 거예요? 분명히 문제가 제기될 텐데.”
놀라운 일이었다.
폭군이 한 발짝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자, 고연주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를 물리친 김수현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던졌다.
“이건?”
“아까 늘설영과 살문 로드의 자백이 담긴 기록입니다. 그리고….”
약간은 정상으로 돌아온 음성.
잠시 후, 김수현은 품속에서 꺼낸 수 개의 구슬을 추가로 던졌다.
“많기도 하네…. 아무튼, 살문이 제공한 황금 표국 클랜 증거 자료입니다. 방금 준 기록 영상과 같이 공개하세요.”
그 순간 기록 구슬을 주우려던 손길이 멈칫했다.
김수현이 말을 잇는다.
“살문이 습격했다. 머셔너리와 황금 표국은 연합해 살문의 은신처를 공격했다. 살문은 굴복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황금 표국이 전멸했다.”
고연주는 번쩍 고개 들어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금 표국도 이런 곳이더라. 각색은 좀 해야겠지만, 스토리 좋잖아요?”
“당신…. 설마…?”
그러나 고연주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김수현의 입꼬리였다.
“그럼 뒤처리는 부탁하겠습니다.”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김수현은 몸을 돌려 모습을 감췄다.
그가 떠나간 후 방은 갑작스레 적막해졌다.
남은 거라고는 일곱 남짓한 생존자와 흐드러진 시체뿐.
쏴아아아-.
문득 바깥의 빗소리가 희미하게 귓전을 두드렸다.
번개도 치는지 이따금 번쩍하는 이명이 들리기도 했다.
“…….”
…고연주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사실 어떻게 하면 독자님들의 정신을 부술 수 있을까! 만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코멘트를 보니 달아올랐던 정신이 식는 듯하더군요.
하하.
아, 옴니버스 고연주는 이제 거의 끝났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다음 회부터는 다시 가볍고 우스운 이야기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일단은 출산(?)이 되겠네요.
Optolove / 간단합니다.
김수현의 살문을 몰아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용자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음지전의 경험도 김수현이 더 뛰어나며, 홈그라운드의 기관 장치는 도리어 역으로 이용당했습니다.(화정도 있지만, 이 스토리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니 제외하겠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격차는, 바로 어빌리티의 유무입니다.
김수현은 이 시절 무수한 어빌리티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이형환위, 사량발천근, 이화접목, 허공섭물 등등.
심지어 검기 활용도조차도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죠.
특히 이번 살문의 패배에는 이형환위가 일등 공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스토리에서 살문 로드는 김수현의 도발에 응했습니다.
탁자를 둘러싸 포위하는 것도 실패했고, 설령 그 자리에서 전투했다손 쳐도 고연주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요.
아무리 클랜 로드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더라도요.
그리고 살문의 장기인 늘설영을 중심으로 한 그물망을 펼쳤지만, 그 진은 이형환위가 가장 크게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물망의 특징은 효율적인 수색 및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는 점인데, 만약 위치를 잡고 포위했다고 해도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면 그만이니까요.
결과적으로 그물망은 최악의 패였습니다.
제 3의 눈이 있었다면 모를까,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만 했을 뿐,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살문 로드의 실수라도 보셔도 좋습니다.
부디 충분한 답변이 됐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