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0
01019 Omnibus – AhnSol. =========================================================================
“안솔! 너 갑자기 또 왜 이래!”
소리 지른 안현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나지막이 투덜거리던 진수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떨떠름한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김한별도 마찬가지였다.
안현이 방금 한 소리 중 문득 ‘또’ 라는 말이 걸렸지만, 일단은 안의 상황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김한별은 약한 신음을 흘렸다.
내부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탁자와 의자는 부서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뒤엎어졌고, 평소 안솔이 입는 사제복이나 사용하던 지팡이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지는 곳곳이 갈고리로 긁은 것처럼 손톱자국투성이였으며 침대 시트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그리고 안솔은 정작 구석에서 몸을 웅크려 만 채 끙끙 앓는 중이었다.
엄청나게 끔찍한 광경은 아니지만, 그 수더분한 안솔이 이랬다는 것은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솔아! 솔아!”
“히이이익!”
그 와중에 안현이 계속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안솔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울상을 지으며 몸을 더욱 구석으로 붙이더니 양손을 내밀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싹싹 빌기 시작한다.
쓰러져 있었으나 의식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하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그러나 안현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는지 자못 침착한 태도로 친동생을 달랬다.
“괜찮아.” 나 “오빠야.” 라는 말을 귓가에 속삭이기를 수 분.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리던 안솔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든다.
이내 살그머니 얼굴을 들자, 퉁퉁 부은 눈과 눈물 자국이 낭자한 얼굴이 드러났다.
혼란스럽다는 듯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걸 보고 힘이 잔뜩 들어갔던 안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한숨을 내쉬며 바닥의 의자를 세우고 털썩 앉았다.
“깜짝 놀랐다. 정말로.”
걱정 가득한 오빠의 목소리에 여동생은 고개를 숙였다.
허여멀건 한 목덜미가 점차 붉어지는 게 자기가 한 짓에 대한 자각은 있는 듯했다.
“왜 그랬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죄송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여전히 고개 숙인 여동생을 보며 안현은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 진정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 최근, 아니 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그런데 또 이렇게 된 건…. 뭐라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조곤조곤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김한별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너 갑자기 또 왜 이래!’ 라는 말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는 안솔을 향해 안현은 갑갑하고 안타까움이 뒤섞인 낯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어떤 거라도 좋아. 오빠는 항상 네 편인 거 알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안솔은 느릿하게나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그래.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줄 테니까. 아니면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아니지?”
아니지? 라는 말에 안솔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걸까.
혹은 상대가 내비치는 강한 신뢰감에 떠밀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굳게 닫혔던 입술이 조금씩이나마 힘겹게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
잠시 후, 희미한 음성으로 이어진 일련의 설명을 들은 안현의 낯빛이 딱딱히 굳었다.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라버니가 좋은데 어떻게 해요?’ 라는, 소녀라면 한 번쯤 으레 할 법한 사랑 고민이었다면 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수현을 생각하는 진심과 주변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 그로 인한 상실감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뭣보다 안현도 당장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와, 어렵네. 이거 방법이 없겠는데?”
그때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진수현이 한 마디 툭 던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안현이 발끈했다.
“뭐? 내 동생이 어때서? 이 정도면…!”
안솔을 위로하려는 건 알고 있지만, 타이밍을 잘못 맞춘 팔불출에 진수현이 쓰게 웃는다.
“물론 기운 내라, 힘내라는 말 등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니까…. 그런데 쟤는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진수현의 검지가 정확히 안솔을 가리켰다.
좀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뜻이었다.
안현도 마냥 무딘 놈은 아니라 동생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걸 멈췄다.
진수현이 말을 이었다.
“뭐 네가 하려는 말은 알겠다. 안솔, 확실히 괜찮아. 얼굴도 귀여우니 매력 있고. 몸매도 만점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고. 호불호가 좀 갈리지만, 분위기나 성격도 수요가 있는 편이고. 가진바 능력도 개성 있고. 게다가 여동생이라는 포지션도 좋지. 어느 미연시에 등장해도 충분히 메인 히로인을 꿰찰 만한 캐릭터야. 그건 인정한다.”
진지한 음색으로 줄줄이 칭찬 일색을 늘어놓던 진수현은 돌연히 말을 반전했다.
“그래, 인정은 하는데…. 일단 첫 번째. 쟤가 확실히 귀엽기는 해도 얼굴만으로 경쟁력이 있느냐고 하면 난 글쎄올시다 거든?”
“뭐야?”
“화내지 말고 객관적으로 봐봐. 형수 님들 중에서 안솔보다 못난 사람이 있나?”
“…….”
안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콩깍지를 쓰고 봐도 그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 여동생 포지션이라는 게 사실 양날의 검이야. 분명히 잘 먹혀. 내가 하는 게임에서도 한 명씩 꼭 등장하는 편이고…. 그런데 이게 마냥 유리한 건 아니거든. 시간이 흐르면서 쟤가 여동생이란 인식이 강해질수록…. 아, 이건 너도 느꼈지?”
실로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었다.
물론 이쯤 되면 누구나 진수현이 자신이 한 게임을 경험 삼아 하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틀렸느냐고 한다면 무조건 그렇지도 않다.
진수현의 지적에 안솔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그 방증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김한별?”
갑자기 돌려진 화살에 집중해서 듣고 있던 김한별이 화들짝 놀랐다.
“상황이 상황이니 이거 하나만 말해줘. 너나 형수 님들 중, 형님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사람 있어?”
김한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김수현이 사귀고 싶어 먼저 접근했다?
“아니요. 없어요.”
“한 명도?”
“제가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김한별이 아니라 안솔을 향한 말이었다.
“상대가 다가오지 않으면 네가 다가갈 생각을 했어야지. 세상에 너 혼자만 여자가 아니잖아. 언젠가 다가와 주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하니까 그렇게 된 거야.”
“…….”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난 이해가 안 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넌 조건은 완벽해. 정말로. 내가 아마 너였다면, 그리고 할 마음만 있었다면 벌써….”
“그만해요.”
김한별이 적당한 선에서 말을 잘랐다.
내심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약간 도가 지나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한별이 눈짓하자, 진수현은 푸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겠다고…. 나가면 되잖아.”
그렇게 말한 진수현은 멍하니 앉아 있는 안현을 잡고 몸을 돌렸다.
“어, 어?”
“어는 뭔 놈의 어. 나가자.”
“자, 잠깐….”
“어차피 더 있어 봤자 넌 도움도 안 돼. 여기서부터는 쟤네 둘이 얘기하는 게 더 나아.”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잘 안다는 소리였다.
안현은 끝까지 안솔을 바라봤지만, 결국에는 올 때와 반대로 끌려나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둘만 남게 된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속으로 말을 고르던 김한별은 일단 말문을 열었다.
“솔아.”
침대에 살짝 걸터앉으며 말을 걸자, 안솔이 시무룩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그동안 신경도 많이 못 써주고…. 언니 많이 미웠지?”
“아, 아니에요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안솔.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그동안 마음을 숨겼던 거야?”
“괜히 말했다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우리한테 상담할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언니들은 이미 오라버니 곁에 있고…. 또 사이가 멀어질 것 같아서….”
아직 뺨에 남은 선명한 눈물 자국을 김한별은 안쓰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그리고 모두가 힘을 합쳐 세라프를 꽃단장해주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진수현의 비판은 생각보다 논리적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껏 안솔이 세운 공은 김한별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중요한 건 눈앞의 여리디여린 소녀가 그동안 어떤 일념으로 놀라운 활약을 펼쳤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오라버니를 위해서.
그러니 설령 토사구팽당했다고 느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터.
“음…. 있잖아.”
거기까지 김한별은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사실 이미 할 말은 진수현이 전부 했다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를 위로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속으로 십분 이해해도 딱히 해줄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김한별은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문득 고연주와 임한나가 떠올랐다.
노련하고 능숙한 둘이라면 뭔가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불현듯 심한 갈등이 있었지만, 김한별은 곧 포기했다.
한창 축제로 바쁜 사람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나.’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린 김한별은 품으로 손을 넣었다.
손아귀로 작고 얇은 봉투가 스쳤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깬 안솔은 막 일어난 것치고는 또렷한 정신에 눈을 깜빡거렸다.
어젯밤 축제에 참가하지 않아 일찍 잠들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멍하니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안솔은 문득 손아귀에 걸리는 바스락한 감각에 눈을 돌렸다.
손바닥에는 약간 짜부라진 작은 팩이 놓여 있다.
투명한 봉지 안으로 분홍빛 가루가 반쯤 넘게 차 있다.
어제 김한별이 주고 간 것이었다.
‘받아. 내가 줬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고.’
‘아프로디지아 라는 약초로 만든 가루야.’
‘굉장히 강력한 미약이지. 손톱만큼만 사용해도 그대로 방치하면 오 분 안에 죽을걸?’
‘왜 내가 갖고 있냐고? 그,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안솔은 김한별을 의심했었다.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미약을 쓰라니.
설령 좋은 의도로 줬다손 쳐도 언어도단의 만행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김한별은 어떻게 생각할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었다.
‘오해하지 마. 쓰라고 준 거 아니야. 네가 잘도 쓰겠다.’
‘그러니까…. 아, 부적이라고 할까?’
‘응. 부적. 난 사실 진수현 씨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너도…. 그렇지?’
분하지만 안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분명한 건 김수현은 안솔을 특별히 대했다는 것이다.
등급제가 도입됐을 때 김수현과 유일하게 EX 등급에 선정됐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오라버니가 아껴준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졌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용자로서 특별 대우였다.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그걸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언니들은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 게.’
‘하지만 도와주는 건 딱 거기까지.’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거…. 이해하지?’
‘한 번 시도라도 해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오빠랑 앞으로 계속 천 년 만 년 이 관계로 지낼 거야?’
김한별이 남긴 마지막 말은 안솔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성공하면 그것대로 좋다.
실패하면 당장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김수현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날 가능성도 있잖은가.
그때는 김수현도 분명히 축하해줄 것이다.
아무튼, 결론은 더는 질질 끌기 싫었다.
적어도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릴 터였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니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용기가 질박하게 솟구쳤다.
그때였다.
“!”
단단히 결심을 다지던 안솔이 갑자기 놀란 얼굴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이리저리 더듬는다.
상쾌해도 너무 상쾌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하다.
자신감이 생기기는 했으나 스스로 생각해도 과한 느낌이 있었다.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그 순간 안솔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현상을 처음 경험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주까지는 아니었으나 드물게 겪었었다.
오 년 차가 되기까지 총 다섯 번.
일 년을 주기로 딱 한 번씩 찾아오는 날.
그래,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솔은 불침 맞은 망아지처럼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 음?
가장 먼저 이상 징후를 느낀 건 다름 아닌 제로 코드였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으나, 제로 코드는 무려 십천의 존재.
그렇기에 누구보다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머셔너리 캐슬을 중심으로 세상을 감싸는 기류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 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제로 코드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머셔너리 캐슬 내 복도를 가로지르는 여인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길한 기운이 대거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흔한 일이다.
전 우주로 따져보면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이 살면서 한 번쯤 겪는 일이다.
말인즉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해야 하나.
행운이라는 게 원래 묘한 경향이 있다.
잘 되는 날은 한없이 오르고, 안 되는 날은 한없이 내린다.
안솔도 아마 그런 경우일 것이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안솔은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홀 플레인에 흐르는 기운이 모조리 모여드는 것도 모자라, 안솔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이무기가 허물을 벗듯, 그리하여 비로소 용으로 진화해 하늘로 승천하듯.
–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닌데.
어느 수준이었느냐면 그 제로 코드가 개입을 고려할 정도였다.
100은 사용자로서 설정된 한계 능력치다.
101은 인간을 초월한 능력치를 일컫는다.
102부터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지만, 화정 같은 구천급 신의 힘을 완전히 이끌어내는 하나의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안솔의 행운 능력치는 105포인트였다.
– 거기다 Blue Dahlia와 바라는 대로까지…? 허, 뭐하는 인간이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제로 코드가 내린 결정은 관망.
이유는 간단했다.
–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흥미가 동했으니까.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어떤 소망을 지녔길래 저렇게 어마어마한 기운을 뿌리는 걸까?
– 혹시.
김수현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둘의 관계로 미루어보아 꽤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 제로 코드는 서둘러 김수현을 관찰했다.
하지만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왜냐면 김수현은 대담하게도 사 층 복도 계단에서 한 여인과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막 절정에 올랐는지 몸을 떨기까지.
새벽까지 이어진 축제에 대부분이 곯아떨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제로 코드는 저런 생식 행위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주의는 다시 안솔로 옮겨졌다.
좌우지간 지켜볼 가치는 충분했다.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 정도라면 과장 조금 보태서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가볍게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의 격이다.
뭐가 됐든 절대로 시시한 바람은 아닐 터.
다음 순간, 한 점으로 모여들던 기운이 느닷없이 거세게 요동쳤다.
– 오…!
드물게도 흥분한 제로 코드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몸짓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물론, 안솔의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까지 모조리 주의 깊게 봐야 했다.
어떤 사소한 사태라도 좋다.
그 일이 발생한 대는 저 여인의 바람이 강력히 깃들어 있을 것은 명약관화.
그렇다면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이윽고 제로 코드의 생각대로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김수현이 사정을 끝내자, 정하연이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성기에 씌운 콘돔을 벗겼다.
그러나 막 오르가슴을 느껴서일까?
미미하게 떨리던 손은 간신히 벗겨낸 콘돔을 놓쳤고, 아차 하는 찰나 계단 틈새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갓 사정한 정액이 가득 찬 얇은 고무 주머니가 수직으로 낙하한다.
그 결과 공교롭게도 일 층을 지나가던 안솔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안착했다.
“아야!”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첫 사건이 발생했다.
“뭐, 뭐야?”
불행 중 다행은 우리의 순진무구한 안솔은 콘돔이란 것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쓰레기라고 판단, 착하게도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총총 자리를 떠났다.
한편, 그동안 눈이 빠지라 지켜보던 제로 코드는.
– ?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 작품 후기 ============================
420화 후반부에 재미 삼아 썼던 내용을 이렇게 써먹게 되네요.
하하.
얼른 끝내고 김수현 옴니버스 들어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