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1
01020 Omnibus – AhnSol. =========================================================================
실신한 정하연을 숙소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일 층 통로는 아직도 푹 익은 술 냄새로 가득하다.
새벽까지 이어졌던 축제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원래 목적은 세라프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지만, 정작 신 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특히 이유정은 약간 과하다 싶을 만큼 즐기더니 끝내 축제를 광란의 장으로 만들더라.
하긴 임신이나 육아 등으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니 어떤 방식으로든 배출할 구멍이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굳이 막지 않은 거고.
그나저나 여기 어디 떨어트렸었던 것 같은데?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주변을 샅샅이 관찰한다.
그러나 로비 바닥에는 어젯밤 진했던 축제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사 층 계단에서 떨어트렸던 콘돔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는 당황하느라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벌써 누가 주워서 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럴 가능성은 적을 텐데.
아직 고용인이 출근할 시간도 아니고.
한 번 더 두루두루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건 매 한 가지였다.
이만 신경 끄기로 하고 걸어왔던 복도로 몸을 돌렸다.
평소보다 과음해서인지 방광이 서서히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숙소에도 화장실은 있다.
하지만 사 층까지 올라가느니 일 층에 고용인이 주로 사용하는 간이 화장실이 훨씬 가깝다.
“…….”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자, 문득 가슴 한구석에 묻은 의문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세라프는 도대체 어떻게 내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던 걸까?
임신했다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세라프도 기뻐했다.
하지만 즐거운 건 즐거운 거고, 의구심이 솟구치는 건 따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왜냐면 내 자식과 연관이 있으니까.
확인 결과, 소현이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기가 나와 비슷한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었다.
아홉 명 전원이 말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후우우우….”
깊이 상념 하다 보니 어느새 화장실이 목전이었다.
정신적인 숙취 때문인지 눈이 침침한 느낌이다.
무거운 생각에 목과 어깨도 덩달아 뻐근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시에 눈을 감으며 목을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힘 있게 돌렸다.
뚝, 뚝, 기분 좋은 아픔이 전신으로 짜릿하게 퍼졌다.
몸이 저절로 떨리는 걸 느끼며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볼 일을 보기 위해 조준하려 눈을 뜬 순간이었다.
“어.”
처음 눈에 보인 것은 어깨에 닿는 흑단 같은 고운 빛깔이 흐르는 단발머리였다.
두어 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변기 위에 앉아 있는 안솔이 보였다.
응?
왜 안솔이 눈앞에 있는 거지?
모로 봐도 안솔이 분명하다.
사제복 하의를 발목까지 내리고, 살이 드러난 허벅지는 가지런히 모은 채 멍하니 날 올려다보고 있다.
순진무구한 눈망울은 이윽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내가 움켜쥔 것에서 딱 멈췄다.
나도 눈앞의 어여쁜 허벅다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흰 눈이 쌓인 듯 새하얗게 빛나는 살결.
살집도 적당히 붙어서 포동포동하니 보기 좋은 게 참 맛있어 보였다.
한 입 콱 깨물어 잇자국을 남기고 싶을 정도다.
잠시 후, 양팔이 내려가더니 흰 하의를 주섬주섬 올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올리지 마.
좀 더 보고 싶어….
“?”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오…. 오라버니….”
앓는 듯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변기에서 일어난 안솔이 날 보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는다.
난 재빠르게 바지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해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미, 미안하다.”
물론 사과도 잊지 않았다.
“아니에요.”
안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니, 살짝 긴장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말로 미안하다. 고의가 아니었다. 설마 이 시간에 사람이 있을지 몰랐어.”
저지른 입장에서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뭔가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부주의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내가 이런 실수를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다.
육 년 가까이 전장을 떠나 있다 보니 감이 무뎌진 건가?
“네, 네. 괜찮아요. 저도 오라버니가 일부러 이러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안솔은 맑은 음성으로 사분사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꾸벅 고개 숙이더니 얌전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내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 잘났다는 듯이 툭 튀어나온 남근이 보였다.
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아침에 묘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난 볼 일을 마치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하루 즐겁게 놀았으니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나태라는 게 원래 관성과 같아서 한 번 게을러지면 계속 게을러진다.
정오가 지날 즈음 머셔너리 캐슬로 전령이 찾아왔다.
중앙 관리 기구인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신전에서 보낸 것이었다.
천계로 도망갔던 천사들이 일부 복귀했다는 소식이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간을 보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식을 전달받은 조승우가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악마를 상대로 제로 코드를 지켜냈으니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그렇다면 굳이 복귀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오 년 전을 기점으로 우리 사용자와 천사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로드. 사정을 모르는 사용자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쨌든 천사는 수십 년 동안 홀 플레인을 관리해왔으며 도우미로서 사용자와 관계를 맺어오지 않았습니까.”
“예. 분명히 도와준 부분도 있습니다. 인정해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 이상 이용당하는 건 사양입니다.”
“하지만 로드. 최후의 전쟁이 끝나고 남은 천사는 약 삼 할가량…. 그중 이번에 일 할에 달하는 인원이 추가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전령에 적혀 있던 것도 그 내용뿐이고요. 천사 쪽에서 로드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번에 복귀한 천사들은 세라프 님과 비슷한 처지라는 겁니다. 우선은 기다려 보시죠. 오늘 가봤자 헛걸음만 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도 많이 몰릴 테고요. 나중에 대 천사까지 복귀했을 때 담판을 짓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아니 제가 배려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요.”
단호히 일축하자, 조승우는 두어 걸음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다.
눈치가 빠르니 내 생각이 변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세라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모르실 겁니다.”
“웬만하면 모르게 하세요. 괜히 신경 쓰게 하기 싫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무기와 장갑을 준비할까요?”
난 머리를 흔들었다.
고작 천사 따위를 상대로 완전히 무장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제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난 무검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조승우의 말대로 오늘은 헛걸음을 할 소지가 다분하다.
세라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반 천사는 정보나 행동의 제한을 심하게 받는다.
대 천사급이 아니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봤자 겨우 의지를 표명하는 정도?
하지만 그거라도 해야겠다.
내가 힘을 얻은 후 무서워서 천계로 도망친 주제에 이제 와서 살살 기어들어 오는 꼬락서니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변했지만, 천사를 향하는 감정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세라프 빼고.
그때였다.
계단으로 발을 내디딘 찰나, 안솔과 딱 마주쳤다.
어딜 가는지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어디 가?”
먼저 아는 체를 하자, 약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안솔이 싱긋 웃는다.
“잠깐 밖에 볼 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 일?”
“신전이요.”
“아, 나도 신전 가는데. 같이 갈까?”
안솔은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우리는 사이 좋게 계단을 내려가 머셔너리 캐슬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안솔과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걸까.
조금이지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졌다 해야 하나.
오라버니, 오라버니 찾으면서 징징거렸던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기특한 마음에 귀여운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안솔은 살짝 놀란 빛을 보이더니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
– 에휴….
제로 코드는 긴 한숨을 흘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숨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안솔의 행동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뭔 줄이 이래 길어?”
“빨리빨리 들어가라고!”
웅성웅성.
신전에는 구름처럼 인파가 모여 고성이 오고 가는 중이었다.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그리고 그 속에 꼭 낀 김수현과 안솔은 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딱 붙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줄이 움직일 때쯤에는 은근하게 서로 몸이 비벼지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의도는 명백했다.
– 그럼 그렇지 뭐….
어마어마한 행운을 모아 뭘 하나 싶더니.
고작 한 남자를 위해 쏟아 붓는다?
언어도단이다.
저 정도라면 당장에라도 결심한 일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조심스러워 하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 왜. 아예 이렇게 하지그래.
제로 코드는 투덜거리며 힘을 사용해 둘의 뒤에 있던 사내의 몸을 스리슬쩍 밀었다.
“어, 어?”
불쌍한 사내는 여지없이 김수현 쪽으로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김수현이 무너져 안솔을 덮치게 될 터.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와 넘어지던 사내를 반대쪽으로 밀었다.
안솔을 중심으로 모이던 길한 기운이 한 짓이었다.
– 음? 왜 방해하는 거지? 도와주는데.
그 말이 들린 걸까?
문득 기운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와 제로 코드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뿡뿡 화를 내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의지를 갖춘 표현에 제로 코드의 식었던 흥미가 다시 동했다.
– 응? 방해하지 말라고? 이게 어째서 방해지?
웅웅!
– 뭐? 절대로 김수현이 의심하게 하면 안 된다고?
웅웅!
– 아…. 저 여인의 이와 같은 소원이 처음이 아니다?
웅웅!
– 오 년 동안 총 다섯 번 시도했는데 전부 실패했다?
웅웅!
– 아하. 조금이라도 강하게 할라치면 저놈의 경계가 심해졌다고. 하긴….
제로 코드는 이해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집합한 행운도 확실히 엄청나지만, 김수현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저 괴물 같은 능력으로 모조리 벗어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게 기운의 하소연, 아니 설명이었다.
– 그럼 이번에는 어쩔 생각이지?
웅웅….
–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데 강한 바람은 필요 없다. 스스로 벗게 만들지 않는 이상…. 그런가? 좋아. 그럼 더 끼어들지 않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제로 코드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안심한 기운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는 동안 김수현은 안솔을 보호하듯 숫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죄송해요….”
“네가 사과할 게 뭐 있어…. 안솔. 우리 몰래 돌아서 들어갈까?”
“그, 그러시면 안 돼요. 사람이 이렇게 많잖아요. 안쪽에도 복작복작할 걸요?”
“그럴까?”
“네. 또 오라버니 위치도 있고, 사람들이 분명히 안 좋게 생각할 거예요. 저는요, 오라버니가 욕먹는 게 싫어요.”
또랑또랑 말하는 안솔을 김수현은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더니 오빠가 여동생을 안아 드는 것처럼 불쑥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안솔이 바동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에? 에….”
“귀엽기도 하지. 우리 복덩이 이제 다 컸네. 이제 시집 보내도 되겠어.”
“시, 시집이요?”
“응. 혹시 누구 마음에 둔 사람 없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던 안솔의 다리가, 김수현의 정강이를 갑자기 세게 걷어찼다.
============================ 작품 후기 ============================
어제 하루 쉬어서 죄송했습니다.
진도가 영 나가지 않아서 새벽까지 끙끙 앓다가, 적은 글을 다시 읽고 휴재를 결정했습니다.
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잔뜩 적혀 있어서요. ^^;
그리고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잠시 연재 주기를 조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제가 자취방으로 이사도 해야 하고, 3월 2일부터 개강이라 많이 바빠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상으로 외전을 길게 끌고 싶지 않은 게 제 솔직한 속마음이기도 해요.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결심이 서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약속드린 옴니버스 외전 두 개는 꼭 완성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