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3
01022 Omnibus – AhnSol. =========================================================================
신전을 나오니 시원한 공기가 볼에 닿았다.
줄을 기다릴 때만 해도 중천에 있던 해는, 어언간 서쪽으로 느릿하고 부드럽게 굽이져 움직이고 있다.
청명하던 하늘 또한 붉은 물감을 탄 듯 석양이 산뜻하게 번져가는 중이었다.
홍해를 넘실넘실 유영하는 뭉게구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느슨해졌다.
참으려고 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가가 실룩거린다.
아마 가슴 한구석에 붙박여 있던 감정을 털어놓아 홀가분해진 탓이리라.
그래, 애초 이렇게 했으면 됐는데.
이렇게나 간단한 일이었는데.
난 뭘 걱정했었던 걸까?
정말로.
진심으로 후련하다.
“오라버니?”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흥분한 기분을 추스르고 있자, 문득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안솔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끝난 거야?”
“네. 그런데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렇게 보여?”
“네!”
힘차게 외친 안솔은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앳되고 청초한 백합꽃봉오리가 새하얗게 피어나는 듯한 미소랄까?
“너도 뭐 좋은 일 있나 봐?”
“아니요. 저는 없어요.”
“그럼 왜 웃어?”
“그냥요. 오라버니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방긋방긋.
티 없는 맑고 순수한 웃음을 보니 덩달아 미소가 나왔다.
얘도 참 어지간하다니까.
“우리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적당한 시간이기도 하고 약간 들뜬 기분에 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날 보던 또랑또랑한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요?”
그렇게 의외였나?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네! 있어요!”
안솔이 가고 싶어 한 곳은 다름 아닌 ‘산들바람’이라는 고급 주점이었다.
원래 바바라에서 유명한 주점이었는데, 신 대륙이 발견되고 재빠르게 애틀랜타에 분점을 낸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안솔은 굳이 바바라에 있는 본점을 고집했다.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 별로 상관없기는 하다만.
구 대륙이기는 했지만, 워낙 이름값이 높아서인지 주점은 성황이었다.
이 층에 겨우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친 안솔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여기 기억나세요?”
“응? 아, 예전에 한 번 왔었지. 옛날 생각나네.”
“저도, 저도요!”
“그래?”
난 머뭇머뭇 서 있는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건네며 대꾸했다.
이 회차를 시작하고 초반의 이야기다.
뮬에서 바바라로 넘어올 때 잠깐 들른 기억이 있다.
“헤헤….”
안솔은 아까부터 계속 실없이 웃는 중이었다.
자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고서야 이렇게 즐거워할 리가 없잖아.
그때였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 이곳저곳 둘러보며 신을 내던 안솔이 돌연히 얌전해졌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탁자를 보며 손장난만.
살짝 숙인 고개 아래 흰 목덜미는 구운 가재처럼 선명하게 붉어졌다.
“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층에 있는 남자 대부분이 안솔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감탄을 넘어서 추악할 정도로 진한 정욕이 느껴지는 눈초리도 여럿 있었지만, 어쨌든 시선이 쏠리는 건 사실이었다.
“인기 좋은데?”
“아, 아이…. 오라버니-이. 놀리시면 싫어요.”
안솔은 난처하다는 듯이 떼를 썼다.
“뭘 놀려.”
“아마 옷 때문이 아닐까요? 여기서는 흔한 복장이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안솔은 지구에서 가져온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까.
사용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그러나 여자로서 어울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안솔의 가장 큰 매력은 고운 살결이다.
밤새 하얀 눈이 내리고 쌓여서 아직 누구도 밟지 않은 순백의 대지를 보듯 매우 희고 해말갛다.
그리고 현재 복장은 자신의 깨끗하고 순수한 매력을 한껏 살려주는 옷차림이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좋은 예시랄까.
자기 색깔과 잘 어울리는 귀여운 흰색 머리띠도 좋지만, 어깨가 살짝 비치는 연분홍빛 블라우스도 청순함을 돋보인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A 라인 화이트 스커트는 소녀적이면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거기다 치마 아래 훤히 드러난 종아리를 감싸는 살 색 스타킹은….
오….
“오, 오라버니~.”
애원하는 음성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양손으로 치마 하단을 꾹 짓누르는 안솔의 얼굴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실수다.
스타킹을 보는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요리 나왔습니다~.”
상당히 어색해질 뻔했지만, 천우신조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웨이트리스는 야채와 해산물이 잔뜩 얹힌 커다란 스튜 그릇을 내놓았다.
그런데 왜 하나밖에 안 내놓는 거지?
“저기 하나는 아직 덜 나왔습니까?”
“네? 같은 요리로 이 인분 주문하지 않으셨나요?”
“예. 그런데 그릇이 하나밖에 없어서….”
“아~. 제가 한 그릇에 이 인분을 모아서 달라고 요청했어요! 두 분이 연인이신 것 같아서!”
아니, 이 사람아.
그걸 당신 멋대로 정하면 어떡하나.
왜 이렇게 양이 많나 싶었네.
하지만 ‘저 잘했죠?’ 라는 듯 헤실헤실 웃는 웨이트리스를 보니 화낼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냥 먹지 뭐.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렇게 웨이트리스가 물러갔으나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숟가락이 하나밖에 없다.
끝 부분이 하트로 장식된 것으로 보아 용도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정말로 가지가지 한다.
“먹고 있어. 아래 내려가서 하나 더 가져올 테니까.”
당황하는 안솔에게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준 후 난 일 층으로 내려가서 여분의 스푼을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었다.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방금 주방의 실수로 남은 수저 전부를 쓰레기로 착각해 소각장에 버렸다더라.
하다못해 젓가락이라도 가져가려던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너무 죄송하다고 계속 사과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투덜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가자, 안솔은 음식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남은 수저가 없다는데.”
“에? 정말요?”
“응…. 네가 먼저 절반 먹을래? 내가 나중에 먹으면 되니까.”
“그럼 음식이 식잖아요…. 그냥 같이 먹어요. 네?”
“그래도 괜찮아?”
“그럼요.”
시원스레 말한 안솔은 숟가락으로 스튜를 한가득 떴다.
그러더니 내 입 앞으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오라버니. 아~.”
“잠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으려는 찰나, 계단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분연히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까부터 쭉 안솔을 보고 있던 사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못마땅하고 아니꼽다는 표정이었다.
“숟가락이 필요하다면 제 걸 드리죠.”
고맙기는 한데, 먹던걸?
“아, 지금 당장 씻어오겠습니다. 아주 깨끗하게요.”
그렇게 말한 사내는 바로 계단으로 내려갔지만, 수 초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우당탕 구르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내 “말도 안 돼! 숟가락이 부러졌어어어어어!” 라는 까닭 모를 절규를 부르짖는다.
그야말로 창졸간 발생한 일이었다.
…고작 굴렀을 뿐인데 숟가락이 부러졌다는 건 좀 신기하긴 하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안쓰럽다는 듯이 말한 안솔은 내 입으로 숟가락을 쏙 밀어 넣었다.
그리고 싱글벙글한 얼굴로 새끼 새처럼 입술을 벌렸다.
“오라버니~. 나도 아앙~.”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고 말았다.
*
첨벙!
“후…. 좋구나.”
열탕에 몸을 담그니 더운물의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스몄다.
뻐근하던 목이 풀리고, 뼈다귀가 살살 녹는 듯해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서 공중목욕탕을 사용하는 기분은 역시 최고다.
숙소에도 욕실은 있지만, 공중목욕탕보다는 작아서 기분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즐거웠던 하루였는데,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뜨거운 물을 양손에 한가득 담은 후 얼굴에 냅다 뿌렸다.
줄줄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느끼며 난 머리를 젖혀서 탕의 벽에 기댔다.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회상하고 있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녀석.”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안솔과 엮인 것 같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마주친 것부터 시작해서 집무실을 나왔을 때, 신전에서 나왔을 때, 그리고 식당에서….
“…어.”
‘이상할 정도로 안솔과 엮였다.’ 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느닷없이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스쳤다.
왜냐면 예전에도 오늘과 비슷한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일 년에 꼭 한 번씩 찾아오는 날.
그렇다면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
…에이, 아니겠지.
적어도 오늘은 아닐 거다.
그래.
그냥 우연히 마주치고, 밥 같이 먹은 게 다이지 않는가.
오늘이 만약 그날이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밤도 늦었잖아?
한두 시간만 지나면 하루가 지나간다.
난 생각을 관두고 주변에 흐르는 뜨듯한 공기를 힘껏 들이켰다.
몸이 적당히 풀려서일까?
전신을 어루만지는 듯한 달궈진 물의 흐름이 숙소의 침대보다 훨씬 안락하게 느껴졌다.
으음.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하지만 시야는 내 의지와 다르게 서서히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최면처럼 어른거려 수면 욕구를 부채질한다.
결국, 해일처럼 밀려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츰차츰 머릿속을 점령하는 어둠에 몸을 맡겼다.
*
목이 타는 감각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모르겠다.
아니, 중요하지 않아.
목마름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시뻘겋게 달군 철을 식도에 집어넣은 느낌이었다.
열탕에서 잠들어 탈진이라도 한 건가.
어쨌든 지금은 모조리 집어치우고 일 초라도 빨리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젠…. 장….”
그런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에 힘이 없다고 해야 하나.
갈증은 가일층 심해지는데 정신마저 비몽사몽 하니 정말로 죽을 맛이다.
그러고 보니 증기만 가득하고 목욕탕은 아닌 것 같은데….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
그때 아른아른한 김 사이로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꽃이었다.
꽃.
작고 예쁜 백합.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서 눈앞에 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꽃잎에는 수분이 있지 않을까?
아주 조금만 있어도 좋다.
이 미칠 것 같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면….
잠시 후, 난 엉금엉금 기듯이 접근해 꽃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를 처박아 꽃잎을 물고, 필사적으로 빨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꽃잎은 따뜻했다.
그리고 적은 양이기는 했으나 액체 같은 것도 흘러나왔다.
약간 진득진득한 점성이 느껴졌지만, 신기할 정도로 달아서 생명수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빨아 마셨다.
“음…. 쭉…. 음음…. 쭉쭉….”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너무 부족하다.
갈증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한 번 단맛을 보니 못 참겠다.
다른, 다른 꽃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백합 아래 있는 또 하나의 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화처럼 생긴 새 꽃은 처음 발견했던 꽃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수많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것이 꼭 주름진 것처럼 보였지만, 내 입은 이미 하얀 꽃잎에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필생의 힘을 기울여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인 순간이었다.
“삐아아아!”
꽃이, 펄떡거렸다.
하늘로 올라간 두 꽃잎 중, 백합이 부르르 떨며 세찬 조수를 뿜는다.
곡선으로 솟구친 투명한 액체는 이내 후드득 떨어져 얼굴에 묻는다.
“…….”
두어 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흐릿하던 시야의 초점이 순간적으로 돌아왔다.
갈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아…. 하아….”
헐떡거리는 신음에 난 멍하니 눈을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물에 젖어 흐트러진 단발머리.
움찔움찔 경련하는 아담한 몸.
눈물이 잔뜩 괸 그렁그렁한 두 눈동자.
끊임없이 김을 토하는 힘겨워 보이는 입술.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형상의 정체는.
“뭐….”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전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일정 조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3월 2일에 개강을 하는데, 올해 자취를 합니다.
그런데 허락을 너무 늦게 받은 터라, 오늘 방을 계약하러 갑니다.
안 그래도 계약 시기 늦었다고, 방 없으면 어떡하냐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가 무조건 같이 가서 방을 보셔야겠답니다.
덕분에 어머니가 일을 쉬시는 날인 오늘 가게 됐습니다…. OTL
뭐 방은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는 하시는데, 어쨌든 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분간 휴재를 해야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2월 29일 오늘 계약이 되면, 3월 1일이 쉬는 날이니 바로 이사가 가능할 것 같아요.
중간에 인터넷 개통 및 설치 등 큰 문제(?)만 없다면, 일단 복귀 예정일은 3월 3일(목요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변경 사항이 생기면 꼭 공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득이하게 휴재하는 점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리며, 부디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돌아오는 대로 안솔 옴니버스 편을 끝내고, 바로 김수현 옴니버스(평행 세계) 편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원하시는 외전을 다 진행하려면;;;; 어우. 독자님들. 저 솔직히 어서 외전 끝내고 신작 쓰고 싶습니다. 현대 마법사와 아포칼립스 크로니클을 기반으로 한 신작! 부디 자비를 내려주세요. ㅠㅠㅠㅠ
PS 2. 비주얼 노벨 관련해서. 마시멜로 OS(버전 6.0)를 사용하는 기기(마시멜로 OS로 업그레이드 된 넥서스 5, 넥서스 6, LG G4 등)에서 정상적으로 플레이가 되지 않는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해당 오류에 대한 문제점을 찾고 있으며 해당 기기를 사용하는 사용자분들은 구매를 보류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가 문제가 있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아마 곧 적용이 되지 않을까 저도 예상만 하고 있습니다. -_-;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