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4
01023 Omnibus – AhnSol. =========================================================================
한바탕 커다란 소란이 일었지만, 난 겨우 추스르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팔짱을 끼고 흘끗 눈을 뜨자, 고개 숙인 채 무릎 꿇고 있는 안솔이 보였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던지다시피 한 수건으로 나신은 가렸으나 보일 듯 말 듯한 건 여전하니.
“네 말은 공중목욕탕에 들어왔는데 내가 있었다. 놀라서 나가려고 했지만, 자는 걸 확인하고 몰래 씻고 나가려고 했다.”
안솔이 내게 한 상황 설명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안솔의 소중한 곳에 얼굴을 처박은 상태였다.
진정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데 내가 널 갑자기 덮쳐서 그 짓을…. 했다는 거네.”
“그, 그게 아니라!”
“그럼?”
“…….”
극구 부인하던 안솔은 다시 묵묵부답이 됐다.
내가 한 말이 맞는다면 어쨌든 내 잘못이다.
백 번 사과해도 부족할 터.
하지만 진실이 아니므로 당황스러웠다.
사실 여부는 이미 확인을 마쳤다.
제 3의 눈을 발동하니 안솔의 생각이 훤히 읽혔으니까.
안솔은 성격상 거짓말을 못 한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고, 추궁에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게 그 방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안솔은 아프로디지아까지 갖고 있었다.
내가 보관하고 있던 걸 어떻게 갖고 있는 걸까?
도대체 뭔 생각으로?
“후….”
한숨을 내쉬며 제 3의 눈을 비활성화로 돌렸다.
“안솔.”
“네….”
강제로 뺏은 아프로디지아를 꽉 쥐자, 안솔은 유구무언이라는 듯 더욱 고개를 숙였다.
“너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고 있어?”
“…사용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럼 왜 갖고 있는 건데?”
“그냥…. 부적으로….”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좋다.
어쨌든 사용한 낌새는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당혹스러움은 가시질 않는다.
설마 설마 했던 예상이 역시였다.
예전에도 이런 적은 가끔 있었지만, 그때는 이상한 상황이 대놓고 연달아 일어나서 어느 정도 경계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적당히 받아주고 장난으로 치부하며 넘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다.
무엇보다 꿈에서 백합, 국화라 생각했던 꽃은…
도를 넘은 장난, 아니 장난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덕분에 오늘 하루 즐겁게 보냈다고 흐뭇해 하던 중이었는데.
놀란 걸 넘어서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게 멈춘 듯한 공중목욕탕 속에서 흐르는 건 무의미한 시간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한 번 제대로 화를 내야 하나?
“으음….”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신기하게도 화를 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러웠지.
또, 그동안 안솔이 해왔던 게 있는데.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는 말은 있지만, 너무 칼같이 구분하기에는 이제껏 안솔이 세워온 공이 너무 크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었던 내 책임도 없잖아 있는 것 같고.
그래, 한 번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단, 이번에는 확실히 말해야겠다.
“안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자, 안솔의 몸이 흠칫 떨렸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어. 꿈을 꾸게 해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을 하다니….”
“…….”
“하지만 말이다. 장난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다.”
“…….”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모르는 남자가 너한테 네가 한 행동과 똑같은 짓을 했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
“속상한 정도가 아니야.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잖아. 응?”
“…….”
“받아줄 수 있는 장난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장난이 있어. 이번에는 명백히 후자고.”
“…….”
안솔이 시종일관 입을 닫고 있어서 공중목욕탕에는 한동안 내 말소리만 울려 퍼졌다.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으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아무튼, 네가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지?”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이지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안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개는 간신히 끄덕여졌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좋아.”
난 가슴까지 차올랐던 갑갑함을 쭉 뱉으며 몸을 돌렸다.
할 말도 다 했으니 이쯤에서 매듭짓자.
계속 더 있어봤자 서로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오늘 일은 잊을 게.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
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걸음걸이가 급해져 출구는 금세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아니에요.”
막 문을 벗어나려는 찰나, 기어들어가는 음성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으, 응?”
“아니…. 라고요….”
아니다.
주어는 없었으나 무엇이 아니라는 건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부담이 심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솔?”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기세를 일으키고 말았다.
기껏 먼저 다리를 보내줬건만.
방금 아니라는 부정은 스스로 다리를 불태운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
“…….”
“다시 말해봐. 나 똑바로 보고.”
“……!”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도 썩 곱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차 할 정도로.
그래서일까?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 안솔의 얼굴빛은 반항적인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치고 일 초 후, 표정이 이지러지며 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겠지.
안솔은 분명히 뛰어난 사용자이지만 결국은 사제.
내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거북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문득 꼿꼿하던 안솔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 건 열 시간 같은 십 분이 흐르고 나서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안솔의 머리가 다시금 천천히 들리기 시작한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삐걱 올라오더니 가까스로 날 응시한다.
그리고, 웃었다.
“맞아요….”
분명히 웃어 보였다.
“장난….”
힘없이 입을 떼고, 한없이 애처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아침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다른, 억지가 다분한 웃음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질 만큼.
“…이었어요.”
희미한 음색이 덜덜거리며 떨려 나왔다.
다행이다.
비로소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 확실히 다행인데….
“안솔….”
안솔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듯하다.
어깨는 눈에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린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당황과 놀람으로 들썩거리던 가슴이 돌연히 찬물을 뒤집어쓴 듯 차갑게 식는다.
얼굴을 보니, 목소리를 들으니.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순간적이나마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래.”
난 바로 기세를 풀었다.
불현듯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나 마주 선웃음을 지었다.
“역시 장난이었구나. 그렇지?”
“…네…!”
안솔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과도할 정도로 머리를 크게 끄덕거렸다.
“장난….”
필사적으로 쥐어짜 낸 듯한 음색은 표정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장난쳐서….”
힘겹게 이어지는 습기를 잔뜩 머금은 체념 조.
“정말로…. 윽!”
문득 코를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정말…. 흑, 흐흑….”
어떻게든 참으려 애를 쓰는 안솔.
“죄…. 흐…. 히으…. 우으으윽….”
그러나 부르르 떨리던 입술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죄송해흐으으…. 흐어어어…. 어엉…. 어어어엉….”
다음 순간, 서러운 울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안간힘을 기울여 유지하는 것 같던 안솔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목놓아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왜?
왜 장난이라고 멋대로 단정 짓고, 안솔의 대답을 강요했지?
어떤 상황이었든 안솔의 본심은 장난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예전과 같이 넘기려고 했던 걸까?
“…….”
어쩌면.
어쩌면 난 안솔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연주에게 안솔의 비밀을 들었을 때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방금 상황에서 안솔에게 먼저 손을 건넸다고 생각했다.
선을 넘은 상황에서 서로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도 오늘처럼 예전과 같이 지내고 싶어서.
하지만 이게 아니었다.
이랬으면 안 됐다.
확실하게 말하겠다고 했지만, 그 심리에 깔린 근본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
언제나처럼 미적지근하게 넘어가려 했다.
즉 상대를 기만했고, 기만해왔다는 소리다.
하다못해 ‘장난이 아니었어요.’ 라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줬을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난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상대를 기만했다.
단지 부담스러워서.
귀찮을 것 같아서.
철저히 외면하고 있던 걸 직시하자 내가 얼마나 비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면목이 없을 지경이었다.
안솔은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계속 오열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혀서 난 입만 뻐끔거렸다.
외면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넌 정말로 좋은 동생이야.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난 이미 아내가 많잖아.
머릿속으로 여러 말이 우수수 떠올랐다.
그러나 하나도 선택할 수 없다.
난 질끈 눈을 감았다.
수십 가지 기억이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래.
그런 안솔이었다.
‘오라버니…. 저 놔두고 다른데 가시면 안 돼요?’
‘그렇지만 오라버니는 항상 강하고 다정해요. 아마 오라버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배신과 암투가 난무하는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 속에서.
‘저도 열심히 할게요. 오라버니가 흡족해하실 만큼 정말 열심히 할 테니까….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어느 사용자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천사 님! 부디, 오라버니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맞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세신데요!’
바보 같을 정도로 한 명만 바라보는.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제 행운을 걸고 맹세해요!’
‘그렇죠?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그리고 언제나 날 지켜주던.
그런 안솔.
그러할진대.
자기 진심조차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솔은 어떤 심정을 느꼈을까?
그리고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껏 생각했다는 말이 얼마나 심한 상처를 주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 짓이기는 하나, 진심으로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
결국에는 상황을 여기까지 몰고 온 내가 바보였다.
애초 진심을 듣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될 일이었으니.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몸을 휘돌던 기운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결국, 남은 선택은 하나.
잠깐 멈칫하기는 했지만, 난 마음을 굳게 먹고 몸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가서 내가 두르고 있던 수건을 덮는다.
그리고 안솔의 몸을 정성스레,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아….”
안솔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지만, 곧 내가 하는 행동을 알아차렸는지 비척비척 고개를 틀었다.
“오라버니….”
아무 말도 않으며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꼼꼼히 몸을 닦아주고 허리를 펴자, 불안해하는 눈초리가 쫓아왔다.
이윽고 난 웃으며 안솔은 번쩍 들어 올렸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에, 에?”
“일단 나갈까?”
깜빡깜빡하는 큼지막한 눈망울을 보며 난 공중목욕탕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바깥으로 나가니 살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대담한 차림새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시간이어서인지 로비는 휑하다.
수건을 덮어두기는 했으나 갑자기 알몸으로 나온 게 신경 쓰이는지 안솔은 자꾸 뒤척거렸다.
속으로 무슨 말을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마셨던 찻잔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어?”
그러자 안솔을 안은 두 팔에서 화들짝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색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풀 요량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저….”
“오라버니….”
또 한 번의 야릇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재빠르게 양보하자, 안솔은 주저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어요?”
“응.”
“…….”
“미안해. 아까 강요해서.”
안솔의 통통한 볼이 뾰로통해졌다.
“미워요. 저는 오라버니가 절 싫어한다고 생각했다고요. 얼마나 싫으면 얘기도 못 꺼내게 하고….”
“그럴 리가.”
“그럼 아까 왜 도망치신 거예요?”
“…미안하다.”
너무 서러웠다는 말이에요, 라고 안솔은 작게 덧붙였다.
거기까지였다.
얼마나 사람 마음을 갖고 놀아야 만족하겠냐고, 욕이라도 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해지련만.
날 올려다보는 눈초리에는 사뭇 신뢰와 애정이 가득하다.
“저는…. 절 여동생으로만 생각하는 오라버니는 싫어요….”
아직 습기가 가시지 않은 조심스러운 말소리였다.
하지만 얼마나 용기를 낸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징징거려서, 어쩔 수 없이 절 받아들이는 오라버니는 더 싫어요.”
협박하는 거냐.
귀여운 항의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솔은 확실한 답을 원하는 듯했으나 대답은 이미 아까 했으니까.
그러니 대답 대신,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너야말로. 어때?”
“네?”
“지금이라면 돌릴 수 있는데.”
“저는-.”
문득 내 목을 단단히 껴안는 살의 감각이 전해졌다.
“제가 가장 먼저 오라버니를 좋아했어요.”
안솔치고는 드물게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물론 나 또한 방금 대답이면 충분했다.
사실 좀 전까지는 미안한 마음 반, 안솔의 진심을 배신하기 싫다는 마음 반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확실해지는 듯하다.
계단을 나는 듯 올라가서 안솔의 숙소 앞에서 멈췄다.
난 안솔을 내려놓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억지로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명색이 여자인데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겠지.
나도 그렇고.
“먼저 들어가. 들어가서 마음의 준비가 되면 불러.”
“자, 잠시만요. 전 괜찮으니까….”
“그리고 있잖아….”
“?”
낑낑거리며 날 끌고 들어가려는 안솔의 귓가에 나직이 속닥거렸다.
그러자 안솔은 매우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쭈뼛쭈뼛하며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난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킥.”
불현듯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꼴이 우습게 됐다.
명색이 클랜 로드가 한밤중에 나체로 복도에 서 있다니.
들키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행여 내가 떠날세라 문이 벌컥 열리기까지 했다.
뒤돌아보니 안솔은 아침에 봤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내가 강력히 요구한 살 색 스타킹을 신었다는 게 매우 흡족했다.
“드, 들어오…. 꺅!”
요청대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안솔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헛웃음만 나온다.
이제 와서 왜 이래?
서로 볼 거 안 볼 거 다 봤으면서.
…뭐, 하긴 옷 입으면서 진정했을 테니 서서히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거겠지.
안솔은 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침대로 직행해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방 풍경을 느긋이 구경했다.
소녀의 방치고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수수한 구조였다.
안솔답다고 해야 하나.
“저, 정말 언니들 말이 사실이었네요.”
그때 작게 헛기침한 안솔이 말문을 열었다.
언뜻 들으면 한결 차분해진 음성.
그러나 여전히 몸을 돌리고 있는 주제에, 힐끗힐끗하며 손을 쉴 새 없이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귀엽기도 하지.
“그러니까요.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데 엄청나게 오래 걸렸대요. 특히 살다 살다 오라버니처럼 방어 본능이 심한 남자는 처음 봤다고….”
“누가 그랬는데?”
“소영이 언니요.”
“…….”
할 말이 없군.
“저도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안솔은 자그맣게 웃었다.
“응? 무슨 소리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천연덕스레 대꾸하고 말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고 여유가 생기니 또 못된 버릇이 도졌다.
장난기가 살그머니 고개를 든 것이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너 혼내러 온 건데.”
“…네?”
“혼내러 왔다니까.”
“에? 하, 하지만 아까…!”
“아. 분명히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전에. 오늘 네 행동도 딱히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 그건….”
정곡을 찔렸는지 안솔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잘못했으면 우선 벌을 받아야 해. 이야기는 그다음이야.”
일부러 단호히 말하고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안솔을 향해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이어지는 행동은 상당히 귀여웠다.
시무룩한 얼굴빛으로 여전히 다른 곳을 응시한 채 주춤주춤 다가온다.
“침대 위로 올라와서 내 위에 서.”
그러자 정수리로 오랜만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안솔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난 침대에 누워 있고, 안솔은 다리를 벌리고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다.
거기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까지 더해지니 없던 음심마저 동할 지경이었다.
눈앞의 자태를 천천히 감상하면서 깍지 낀 양손을 머리 뒤에 대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제 슬슬 혼이 나야지?”
“네에….”
들리지는 않았으나 안솔은 정말 너무한다는 표정이었다.
“치마 올려. 두 손으로.”
그러나 다음 순간 안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네?”
“응?”
“치, 치마요?”
“그래, 치마. 왜? 혼나기 싫어?”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방금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아, 혼난다는 게….”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기운 없던 안솔의 낯빛이 잔뜩 상기됐다.
“아, 아니요! 혼날래요.”
“정말로? 괜찮겠어?”
“네, 네! 솔이는 오라버니한테 혼날래요. 꼭 혼나고 싶어요.”
“좋아. 그럼 치마 올려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솔은 주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난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이것도 하나의 재미였기 때문이다.
꼭 남다은과 상황극을 할 때의 느낌이랄까.
단숨에 발라당 올렸으면 오히려 내가 놀랐을 것이다.
“어서.”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솔을 채근했다.
“네…. 오라버니….”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는 안솔은 순한 양이라도 된 듯했다.
잠시 후, 각각 치마 가장자리를 꾹 쥔 작고 흰 손이 서투르게나마 스커트를 주섬주섬 올려 젖혔다.
============================ 작품 후기 ============================
1. 복귀 날짜가 예상보다 하루 늦었습니다.
자취방 관리비에 분명히 인터넷도 포함돼 있었는데, 랜선만 가져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와서 연결했다가, 연결이 되지 않아 애 좀 먹었습니다.
주인집은 모르쇠로 일관해서 결국에는 인터넷 기사님을 불렀어요.
속도는 좀 느리지만, 어쨌든 지금은 인터넷이 됩니다. 🙂
2. 안솔 옴니버스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어떻게든 끝내고 싶었는데, 아마 1회를 더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약속을 못 지켜 정말로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_(__)_
다음 회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무조건 끝내겠습니다.
3. 자취 시작한지 사흘째인데, 확실히 만만하지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밥 먹는 게 가장 큰 문제네요….
4.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님들.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ㅠㅠㅠㅠ
자취 + 복학생 크리까지 맞으니 진짜 외롭네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