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8
01027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흥, 쌀쌀맞은 콧소리를 내는 화정을 김수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응시했다.
하지만 곧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화정의 왼 눈이 살그머니 치켜 떠졌다.
“뭐야? 왜 웃어? 내가 웃겨?”
“아니. 신기해서.”
“응?”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문제인데…. 너한테 털어놓으니 거짓말처럼 가슴이 편안해졌어. 고마워. 화정.”
갑자기 들어오는 진심이 꽉 찬 돌 직구였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스트라이크에 화정의 얼굴빛이 돌연히 멍해졌다.
“…당연한 거 아냐?”
반 박자 늦게 거드름을 피웠으나 숨어서 지켜보던 제갈 해솔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화정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들썩거렸다는 걸.
“넌 항상 그렇잖아~. 뭔 일 터질 때마다 항상 나만 찾고~. 너 눈 뒤집혔을 때 내가 말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 정말 나 없으면 어쩌려고 이래~?”
“그러게. 앞으로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어휴~. 이래서 맨날 부인이니 정실이니 당연한, 이, 이상한 말로 날 속박하려고만 하고~. 뭐 나도 이제 거의 포기했지만~. 어쩔 수 없네~.”
“헤-에.”
한창 엿듣고 있던 제갈 해솔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실제로 그녀는 한 수 배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거만을 떨면서도 은연중 자신이 본처라는 걸 끼워 넣고 있다.
실로 고단수라 할 만한 어필이요 돌려 말하기였다.
“잠깐.”
석조 뒤에 숨어 있던 제갈 해솔의 몸이 움찔 떨렸다.
건너편에서 한 여인이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수현, 그리고 화정조차도 놀란 눈으로 시선을 던졌다.
화정보다 더욱 진하고 풍성하게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칼을 빛내는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게헨나였다.
화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비켜.”
“그렇게 못하겠다면?”
“뭐야?”
“방금 상당히 거슬리는 말을 들어서 말이지.”
뚜벅뚜벅.
고혹적인 다리맵시를 앞세워 걸어온 게헨나가 화정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화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쭉 밀며 일어서자, 두 여신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종미(終尾)의 불.
지옥 겁화(劫火).
‘최고’라 일컬어지는 태고의(太古) 불.
화정(火正).
각각 상이한 기운을 뿌리는 두 눈동자가 근거리에서 맞부딪쳤다.
그리고 제갈 해솔은 서둘러 워프 능력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는 아수라장을 살아가는 아내로서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본처?”
선공은 게헨나가 취했다.
“감히 누구 허락도 없이 멋대로 정실 부인을 칭하는 게냐.”
“감히? 허락?”
“그래. 무릇 본처라 함은 지아비의 첫 아이를 낳은 반려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이니라. 한데 아이는커녕 아직 살도 섞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은근슬쩍 정실을 자처하는 게지?”
“윽!”
평소의 느긋하고 품위 있는 음성이었지만, 정곡을 사정없이 찌르는 목소리였다.
화정은 부들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문득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건 네 생각이고.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내가 알려줄 게. 똑똑히 들어. 자고로 본처란 남편이 가장 믿고 의지하며 인정받는 반려를 뜻한단다.”
“무어라?”
“그렇잖아? 애만 낳으면 뭐해? 게다가-. 난 이미 본실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거든. 왕을 세워 무간 구간을 되살리겠다고 이용한 누구와 질적으로 다르지.”
“하?”
화정도 기품 넘치는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함이 번뜩거리는 음색이었다.
게헨나는 큭 소리를 냈다.
“네가 한 말 그대로 돌려주지. 그건 네 생각이다.”
“놀고 있네.”
대화는 점차 격해졌다.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 이 사람의 심장이지 않으냐?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지? 나와 이이가 사랑 나누는 걸 보고 침만 꼴깍꼴깍 삼키지 그러느냐? 그때처럼.”
게헨나는 대놓고 비아냥거렸고.
“너야말로 언제 돌아갈 거야? 지옥은? 아, 그러고 보니 네 의지로 여기 있는 것도 아니던가? 지옥 왕에 의해서 겨우 소환이 유지되고 있는 거였지? 이 정도 집착이면 한심한 걸 넘어서 무섭네. 내가 너라면 창피해서라도 스스로 돌아갔겠다.”
화정도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게헨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두 눈이 부릅떠지더니 동공 중 검은자위가 수직으로 찢어질 듯 갈라졌다.
용 또는 파충류의 눈알처럼.
드디어 이성의 끈을 놓은 것이다.
동시에 화정의 얼굴빛 또한 급격히 차가워졌다.
“…죽고 싶은 게냐?”
게헨나의 눈동자가 진득한 진홍빛을 뿜었다.
“해보자고? 나쁠 것 없지.”
화정의 눈동자도 청명한 다홍빛을 뿌렸다.
드드드드, 드드드드!
문득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멍하니 보고 있던 김수현의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사실 그동안 마음을 놓고 있었다는 게 정답이었다.
여러 아내와 아무리 물고 빨고 놀아도 게헨나와 화정은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화정이 말했듯이 신은 인간을 상대로 질투하지 않는다.
아득한 상위 존재의 입장에서 한낱 먼지와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이 서로 교미하는 걸 아무 생각 없이 구경하듯이 딱 그 정도의 감정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동격의 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다 상대가 맞수이자 경쟁자 관계라면 다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구천(九天)급 신인데.
무엇보다 정실(?)이라는 중요한 자리가 걸린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김수현은 일, 이 회차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 도망쳐라! 어서!
언제나처럼 관조하고 있던 제로 코드가 툭 튀어나온 것이 첫 번째 방증이요.
제갈 해솔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머셔너리 클랜원 전원이 걸음아 날 살리라며 성 밖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게 두 번째 방증이요.
신의 기운을 견디지 못해 허공에 금이 생기는 게 세 번째 방증이었다.
“어서 말려야….”
– 말린다고? 어떻게?
“하지만….”
– 네가 아무리 격을 갖춰가는 중이라고 하나 저 둘은 이미 진심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
– 만화와 현실을 혼동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휘말리는 순간 무조건 죽을 거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니, 김수현도 익히 알고 있다.
구천 세계에 거주하는 신이 진심으로 내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 강대하던 칠 대 악마의 군세와 남 대륙 연합군이 단 몇 번의 손짓에 깡그리 소멸하지 않았었는가.
문제는 두 여신의 힘이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점이다.
게헨나는 구천급 이상으로 평가받는 수나의 마력 지원을 받는다.
화정은 체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김수현을 백업으로 두고 있다.
말인즉 이미 설정을 벗어나 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두 여신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둘이 반의반에 반의반만 힘을 진심으로 낸다손 쳐도, 그날로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제로 코드가 괜히 심심해서 끼어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김수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둘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게헨나의 오른손에 불꽃을 튀기는 채찍이 쥐어지고, 화정의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염화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두 여신은 동시에 왼쪽으로 이동하며 각자 힘차게 오른팔을 뻗었다.
이윽고 광선처럼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불길과 꿈틀거리며 쏘아진 불의 채찍이 서로 충돌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젠장!”
그 찰나의 순간, 양팔을 활짝 펼친 김수현이 이를 악물며 그 중간으로 뛰어드는 것과.
“그대!”
“야!”
게헨나와 화정이 같이 고함친 것.
– 이 멍청한 놈!
그리고 제로 코드가 분통을 터뜨린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꽝,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터져 나온 섬뜩한 빛무리가 사방을 점령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힘과 힘의 격돌.
물론 애초 어느 정도 힘을 조절했고, 막판에 힘을 뺀다고도 뺐다.
그런데도 일 층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창문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충돌 지점에서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을 지경이었다.
그제야 냉정함을 되찾은 걸까.
자욱이 솟구친 연기를 급히 걷어낸 둘은 황급히 중앙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망연한 기색을 지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아가리를 쩍 벌린 듯한 지름 십 미터의 화구.
그리고 깨진 액정처럼 쩍쩍 갈라진 균열투성이 공간뿐이었다.
김수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무언가 강렬한 기운 같은 게 눈을 무겁게 짓눌렀다.
눈을 뜨니 흐릿한 어둠 같은 것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숨을 한 번 들이켜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 맡아졌다.
기체 같기도 하고 액체 같기도 하고….
– 쯧.
몽롱하던 머리가 확 깼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앞을 바라봤다.
여전히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무형의 기운이 날 직시하는 게 느껴졌다.
“제로 코드?”
– …….
“네가…. 구해준 거야?”
– 정상으로 구해내지는 못했다…. 뭐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군.
약간 비난하는 기색이 섞인 울림이었다.
그나저나 정상으로 구해내지는 못했다?
“여기는 어디야?”
난 좌우를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막막한 암흑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중간중간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게 보이기도, 또 어디선가 약한 빛살이 비쳐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제로 코드?”
– 뭐냐.
“날 어디로 데려온 거냐니까?”
– …에휴….
방금 몹시 한심해 하는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 말해주면 알아들을 수나 있나?
“어딘데?”
– 너의 세계.
“너무 추상적인데.”
–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좀 더 구체적으로.”
– 양자의 파동 함수에 따라 끊임없이 갈라지는….
“너무 과학적이야.”
– …….
“미안.”
나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제로 코드가 콧등을 꾹꾹 누르고 있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뒤를 봐라.
그 말에 난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봤다.
– 양자 다중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이 멍청한 놈.
동시에 중후한 음성이 귓전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무사히 세이프 했네요.
개강도 했으니 어서 이 생활 리듬의 악순환을 끊어야 할 텐데요.
졸업반이다 보니 차마 강의 시간에는 못 졸겠고, 자취방에 오자마자 쓰러졌다가, 밤에 일어나 집필하는 생활의 반복을….
크흡.
그래도 오늘은 10시에 강의 시작이니 아직 여유 만만입니다.
하하.
아, 남겨주신 코멘트는 잘 읽었습니다.
예상대로 보고 싶다, 필요 없다는 쪽으로 갈렸는데요.
보고 싶다는 분들의 의견이 더 많아서 진행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후자의 의견을 적어주신 독자분들께는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고 보니 쪽지도 빨리 답신해야 되는데요. ㅜ.ㅠ
PS. 양자 다중 세계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이론입니다.
진행상 편의를 위해서 해당 이론을 부분적으로 차용했습니다.
단 완전히 똑같지 않고, 메모라이즈 세계관에 맞도록 비틀고 수정한 부분도 있고요.
당연히 믿지 않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냥 공상 소설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