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29
01028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처음 눈에 보인 건 나무의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아니다.
저것은 끝 간 데 모르고 저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버팀목이다.
수백 년쯤은 우습게 여길 만큼 유수의 세월을 살아온 고목의 기둥처럼.
아무리 머리를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높이에 입이 떡 벌어졌다.
거기다 너비도 장난이 아니다.
양팔을 활짝 펼친 성인 남성 수백 명이 있어도 도저히 감싸 안을 수 없을 부피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악한 건 높이도 크기도 아니었다.
저 나무처럼 보이는 것에서 전해지는 심원한 기운.
어떻게 느껴지기는커녕, 뭐라 말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쎄, 굳이 표현하자면….
동질감?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진짜로 날 보는 듯하다.
– 굳이 정의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제로 코드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 근원, 나, 본질, 생명….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하등 틀린 말이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게 틀리지 않는다는 건가?
– 옳고 그르다는 게 아니라 정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보다 한 번 아래를 보는 건 어떨까?
그 말에 힐끗 눈을 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발을 치워버렸다.
“뭐, 뭐야?”
젠장,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다.
그나저나 저 균열들은 뭐지?
아니….
균열이 아닌가?
성인 몸통만 한 밧줄이 구불구불하게 엉켜 있는 것이 거대 식물의 줄기를 보는 것 같다.
하도 크기가 크길래 처음에는 크레바스인 줄 알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문득 한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깊고 넓은 틈 안쪽으로 게헨나와 화정이 보였다.
영상은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이건…?”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우르르릉, 우르르릉!
느닷없이 강렬한 굉음이 귀를 때림과 동시에 몸이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균형이 단숨에 흐트러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충격이었다.
– 으음!
급히 이형환위를 사용해 허공으로 이동했으나 무소용.
용의 날개까지 펼쳤으나 워낙 강력한 충격이 전신을 엄습해 비행조차 불가능했다.
아예 이 공간 전체가 떨어 울리는 듯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진동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분명히 어딘가로 고꾸라졌을 터.
– 조심해라. 이제 복원이 시작되는 듯하니. 아마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간신히 균형을 잡자,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보, 복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그럼 구천급 신이 진심으로 격돌했는데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나?
약간 비난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래도 좀 잡아주지.
어쨌든 졸지에 조금이지만 허공으로 올라가 버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른 후 날갯짓을 해 가일층 위로 날았다.
그리고 질린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잠시 후, 난 다시금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허….”
뭐라 해야 할까?
드넓은 우주 같은 공간에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줄기 같은 것들이 사방팔방 뻗어 있다.
고목과 바닥이 맞닿는 접합부를 중심으로.
처음 봤던 게 나무의 기둥이었다면 지금 보는 건 나무뿌리가 흐르는 바다처럼 느껴지고, 다가왔다.
달걀 껍데기를 나노 단위로 깨트려도 이만한 갈라짐은 나오지 않을 터.
탄성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장관이었다.
개중에 하나 신기한 건 언뜻 복잡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일정한 규칙을 갖고 퍼져 있다는 점이다.
비록 굵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꼭 물결에 이는 파문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 그럼 내가 방금 봤던 줄기 속 장면은?
– 인간은 평생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순간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이내 강제로, 그리고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한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바닥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닿는 감각이 전해졌다.
어느새 지진 같던 진동도 멈춰 있었다.
날개를 접은 후, 난 틈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제로 코드가 느껴지는 곳을 돌아봤다.
“선택?”
–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가령 네 앞에 음식이 나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거지?
“먹거나, 먹지 않거나.”
– 혹은 그릇째 던져버리거나,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경우도 있겠지.
놀리는 거냐고 반문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제로 코드의 음색은 자못 진중했으니까.
– 선택 전 하나였던 개체는, 자기 자신이 선택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달라진다. 즉 선택하는 순간 하나였던 세계도 여러 개로 나뉘지. 바로 네 선택에 따라서.
선택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제로 코드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알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설령 중간에 마음이 변할지언정, 어쨌든 한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 각 세계의 실체는 자신이 선택한 상황만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지만.
“예외?”
– 간섭, 역행, 차원 이동, 회귀 등등. 그러고 보니 넌 상당한 예외 덩어리라 볼 수 있겠군. 흐흐.
“뭐야….”
놀리는 듯한 어조에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나왔다.
망연한 기분에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 무한을 연상케 하는 광대무변한 줄기가 각각 하나의 세계라는 건가?
“그러니까 날 중심으로, 내 선택에 따라 나뉜다는 거군.”
– 그렇지…. 음?
순순히 긍정하던 제로 코드의 울림이 돌연히 높아졌다.
– 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라는 근본을 제외하면 나뉜 세계에 원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 아무튼, 꽤 재밌는 오만이군.
“오만?”
반문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보이는 시야로 주변의 어둠이 빠르게 지나친다.
그렇게 아차 하는 사이 난 어딘지 모를 곳에 서 있었다.
단지 내가 처음 서 있던 곳에서 상당히 떨어졌다는 것만 알겠다.
– 아래를 봐라.
아래에는 역시 줄기가 하나 보였다.
내가 나왔던 줄기보다 훨씬 굵직하고 깊숙해 보이는.
조심조심하며 안을 들여다보니 이번에도 필름 같은 영상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장면이요 풍경이었다.
밝은 햇살이 처음 보는 성 같은 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은….”
…아, 찾았다.
이 세계 속의 나는 여러 명에게 둘러싸인 채로 중앙의 높은 권좌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고연주와 남다은과 한소영과….
“유현아?”
의외의 인물이 눈에 보인 순간 급격히 숨이 멎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떠도.
아무리 다시 봐도 그녀는 유현아였다.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안겨 있었다.
잠깐만, 이럴 리가 없는데.
유현아는 분명히 내 손으로 살해했잖아.
– 그 세계의 김수현은 너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거지.
중후한 울림이 의문에 찬 뇌리를 뒤흔들었다.
– 넌 유현아를 적으로 규정하고 처리하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고연주와 조우 후, 네 심경에 조금이지만 변화가 생겼었지….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아직 새싹에 불과한데 이용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나?
– 어쨌든 넌 유현아를 배척하는 걸 선택했다. 반대로 그 세계의 김수현은 의도가 어떻든 그녀를 받아들이는 걸 선택했다.
“받아들이는 선택….”
– 이후 힘을 키워서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과 연합한 결과 이 년 만에 독자적으로 아틀란타 공략에 성공. 거기서 또 육 개월 만에 테라까지 공략하고 정상에 올랐다.
“…….”
–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세계가, 이 다중 우주 공간에서 가장 빠르게 이 회차를 클리어한 세계다. 악마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쾌속한 속도였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년 육 개월 만에 테라를 공략했다?
그게 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난 마르를…!”
– 아, 물론 요정 여왕이 성스러운 여왕을 대체하기는 했지. 덕분에 최후의 전쟁에서 손쉽게 요정의 협력을 얻었고. 하지만.
잠깐 말을 끊은 제로 코드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 그 세계의 김수현은 마르의 미래는 물론, 유현아 본연의 미래 협력까지도 얻어냈지.
“유현아 본연의 미래?”
– 흐흐. 네가 기억하는 그녀의 미래는 어떻지?
“…….”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미래.
유현아.
본인은 뭐 하나 특별한 능력이 없던 사용자.
하지만 사기라 생각될 정도로 걸출한 사용자들이 모여들었던 여인.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철혈 여왕 한소영과 정면에서 대적했을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성스러운 여왕.
– 그래. 생각해봐라. 네 명의 여왕이 서로 적대하지 않고, 오롯이 네게 협력하며, 춘추 전국 시대마저 뛰어넘었을 때 펼쳐졌을 미래를.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건가?”
별안간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져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제로 코드는 싱거운 울림을 냈다.
– 아니. 적어도 내 관점에서 봤을 때 잘못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 목표를 생각해보면, 목적에 부합하는, 좀 더 효율적인 선택은 있었을 수도 있겠지.
“…….”
–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중요한 건 네가 이 수많은 뿌리 중 한 갈래에 불과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
…그런가.
그래서 재밌는 오만이라는 표현을 쓴 건가.
– 뭐 너무 기운 빠진 표정 짓지 마라. 무력만 놓고 보면 넌 확실히 어느 세계보다 앞서 있으니까. 독보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기운 안 빠졌어.”
바로 받아치기는 했지만, 스스로 들어도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가 아니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인이 떠올라 그런 것이리라.
후회는 없다.
단, 조금이지만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달라졌으니까.
내가 했었던 행동들을 재평가할 여지쯤은 생겼다.
그래.
단지 그뿐….
…관두자.
난 머리를 털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주위를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 복원이 끝나면.
명료한 대답이었다.
– 그래도 마지막에 힘을 뺐는지 충격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지 않더군. 서너 시간이면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데?”
– 네가 나왔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줄기로?”
그것참 간단하네.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린 지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놀라움의 크기는 여전하다.
이 엄청난 수의 줄기가 선택에 의해 하나하나 갈라진 세계라니.
신기하다는 생각에 면면이 주위를 살피니 문득 눈에 박히는 줄기가 하나 보였다.
아까 위에서 확인했듯이 근원을 중심으로 갈라지고 뿌리내린 세계는 일정한 규칙으로 생성돼 있다.
그런데 방금 시야에 잡힌 건 이 복잡한 우주에서 눈에 띌 만큼 돌출돼 있다.
여타의 줄기와 달리 홀로 어그러져 있는 형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빼앗기기에 충분했다.
– 흠…. 저건….
빤히 바라보며 걸어가자, 제로 코드가 약한 침음을 흘렸다.
보면 안 되기라도 하는 건가?
– 굳이 보는 걸 추천하지는 않지만…. 뭐 상관없겠지.
뭐길래 저러는 걸까.
상관없다고는 하나 괜스레 불안해지잖아.
심한 갈등이 이는 가운데 난 목적지에 다다라 걸음을 멈췄다.
호기심은 동한다.
하지만 이 다중 우주 세계라는 공간은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터.
난 몸을 돌리며 물었다.
“혹시 보면 나쁜 영향이라도 있는 건가?”
– 딱히. 그건 네 선택이니까. 단지 그 세계는…. 으음….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듯 울림이 흐려졌다.
“뭔데 그래.”
일단 확인도 받았겠다.
난 아까 그랬던 것처럼 어그러진 속을 살그머니 들여다봤다.
그러나 보기보다 틈이 깊은 탓에.
“응?”
약간 허리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우르르릉!
부지불식간에 또 한 번의 시끄러운 굉음이 귓전을 강타했다.
동시에 기울던 몸 전체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흡사 등을 강하게 떠미는 것처럼.
그야말로 창졸간 발생한 일이었다.
“아…!”
다음 순간, 배꼽 부근이 훅 쏠리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이미 내 몸은 블랙홀 같은 구렁텅이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내 시야를 덮쳐오는 해일 같은 암흑을 느끼며 난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세이프!
밤은 샜는데 오히려 기분은 즐겁네요.
적고 싶은 내용을 적으니 그런가 봐요.
제가 우주에 관심이 많거든요.
물론 허무맹랑한 내용이다 보니 독자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도 되지만…. 🙂
여담이지만, 유현아를 살리는 게 무조건 좋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해요.
김수현과 성향이 정반대에 서 있는 이상, 사사건건 부딪쳤을 테니까요.
결과가 좋다고 해도, 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제로 코드는 목적에 한해서 가장 좋은 미래를 보여줬지만, 다른 미래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언뜻 드네요.
중간에 후회는 없다, 라는 독백을 집어넣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 벌써 일곱 시네요.
저는 슬슬 학교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독자님들도 활기찬 하루 시작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