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39
01038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이 상상이라는 건 대체로 인간이 처한 상황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현실에 염증이나 심한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핵전쟁이 발발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가 오지 않을까?
혹은 자고 일어나면 세상에 좀비가 창궐하지 않을까 등등.
김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애틀랜타 원정에 성공하고 악마와 맞닥뜨린 직후, 하루하루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신 대륙을 포기하자니 죽을 고비를 넘겨 강철 산맥을 공략한 게 아까웠다.
그렇다고 끝까지 버텨보자니 전멸은 불 보듯 뻔한 상황.
이 딜레마 속에서 그녀는 하루 이십사 시간 중 내심 바랄 적이 있었다.
악마가 물러나 주지 않을까,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까고.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아니,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해서 전자나 후자나 일어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상상이었다.
그래, 말 그대로 상상이다.
이루어질 리 없는 머릿속의 공상이다.
현실이 너무 힘겨워 가끔 남몰래 했던 망상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그랬던 만큼, 침대에서 눈을 뜬 김수연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현실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볼을 찰싹 때렸다가, 또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가.
그러더니 멍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한다.
“…….”
아침 햇살이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는데도 김수연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질수록 더욱 눈동자에 힘을 줬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 같아서.
혹시라도 눈을 감았다가 뜨면 또다시 절망과 마주할 것 같아서….
“으음.”
문득 뒤에서 느긋이 껴안아오는 기척에 김수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을 뻔했다.
등에서 전해지는 탄탄한 감촉과 전신을 부드러이 감싸 안아주는 감각이 너무 감미롭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시 곯아떨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 뒤를 봤다.
편안한 얼굴로 자는 김수현의 얼굴이 코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베개가 마음에 드는지 살짝 미소 지으며 한층 강하게 껴안는다.
이곳이 자기 개인 침실이라는 사실을 김수연이 깨달은 건 약 삼사 초가 지났을 때였다.
퍽.
“억.”
팔꿈치로 복부를 가격하니 김수현이 신음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름 힘껏 쳤는데도 눈도 뜨지 않는다.
깨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얼굴은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으응…. 왜 그래? 뭔 일이야?”
침대가 출렁거리자, 상반신을 일으킨 김유연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두 남녀를 바라보던 김수연은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왜 여기 있어?”
“같이 자고 싶어서….”
“언니는 그렇다 치고. 쟤는?”
“내가 같이 자자고 했어. 남동생이랑 여동생이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게 내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단 말이야.”
거창하게 숙원이라는 단어까지 꺼내는 태도는 자못 당당했다.
“그리고 말로 하면 되지. 왜 때리니…. 응, 우리 수현이 많이 아팠어? 그래그래, 이리 오렴. 누나 품에서 좀 더 코하자.”
거기서 한술 더 떠 여동생을 야단치더니 서러워하는 남동생을 달래며 꼬옥 끌어당긴다.
김수현은 헤헤 웃으며 품에 안겼다.
김수연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친언니라는 작자의 행태는 둘째치고서라도, 저 한심한 얼굴은 진정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의 목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싶을 정도였다.
어제 모습은 뭐였냐고.
누가 진짜 너냐고.
단신으로 악마를 깨부쉈던 압도적인 무력을 떠올리니 가슴이 두근거리다가도, 핏빛을 번들거렸던 눈동자를 생각하니 무서워졌다가도, 지금 칭얼칭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넌.’
‘나랑 다르구나.’
불현듯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치자, 기분이 확 가라앉는 걸 느꼈다.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었을까?
차라리 비난하거나 실망하는 가락이었다면 느낌상 이해라도 했을 터.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김수현의 어조는 분명히 기특해 하고 대견해 하는 억양이었다.
심지어 일말의 부러움마저 전해졌을 정도였다.
자신이 잠시나마 그의 뒷모습을 선망했던 것처럼.
김수연은 복잡한 낯으로 친언니에게 안긴 김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바보.”
그렇게 한참을 가없이 바라보더니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장난해요?”
아름다운 소프라노 톤의 미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제가 분명히 그 사건에 관한 정보 일체를 요구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악마 진영이 패배했다. 머셔너리 연합의 피해는 경미한 것 같다. 이게 끝이에요?”
손에 쥔 통신 구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으르렁거리는 여인은 제갈 해솔이었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 아랫부분이 거무스름하게 음영이 졌지만, 두 눈동자는 언제나와 같이 총기를 빛낸다.
“알아요. 들었어요. 웬 사용자가 불쑥 출현했다는 거. 그러니까 그 사용자가 뭘 어쨌냐는 거예요.”
잠시 후, 구슬에서 흘러나오던 음성을 듣던 제갈 해솔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 진짜! 결과 말고 과정, 과정이 중요하다고! 악마 진영이 왜 패배했는지! 어떻게 깡그리 몰살당했는지! 그 사용자는 또 누군지! 그 자식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게 중요하다고!”
차승현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통신을 끊는 제갈 해솔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성을 내는 건 드문 일이라 지켜보는 처지에선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데카르트의 환생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모든 걸 의심한 뒤 비로소 계획을 세우는 사용자다.
어떤 상황과 직면하더라도, 어떤 국면과 맞닥뜨리더라도 미리 생각해둔 바로 냉정하게 유현아를 이끌어간다.
몹시 위태로웠던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여인이 저렇게까지 흥분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방증일 터.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계속 씨근거리는 걸 보다 못한 차승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의자에 있는 대로 몸을 묻고 콧등을 꾹꾹 누르던 제갈 해솔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섹스할래요?”
차승현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흐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안심이 되는데. 여유 있어 보여.”
“너무하네요. 위해주는 말에 감동한 여자의 순정을 무참히 짓밟으시는군요.”
“그런 것치고는 진도가 빠르지 않나.”
“설마 연애편지부터 시작하자는 건 아니죠?”
장난은 거기까지였다.
“오늘 아침 신전에 다녀왔어요.”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한 제갈 해솔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전? 호출이라도 받았나?”
“아니요. 확인해볼 게 있었거든요. 실은 근래 이상 징후를 느꼈던 게 있어서….”
“이상 징후?”
“그런 게 있어요. 저도 희미하게 느낀 터라 딱 짚어서 말하기 힘드네요.”
약간 귀찮다는 투이기는 했으나 차승현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제갈 해솔은 간혼 놀라울 정도로 현실을 통찰하는 역량을 선보이곤 했다.
그것이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이라는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걸 모르는 그로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어쨌든 무신의 입장에서 그녀는 신뢰할만한 사용자였다.
“원하는 답은 얻었나?”
“아니요. 전혀.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초조해하면서 숨기려 하더라고요.”
“뭔가 일이 있긴 있나 보군.”
“바로 그거예요. 뭔가 일이 있다. 천사가 당황해 할 정도의 엄청난 일이. 그런데 그거면 충분해요.”
제갈 해솔의 어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는 그녀를 보며 혹시나 한 차승현이 입을 열었다.
“핵심을 말해봐. 같이 안도 좀 하고 싶다고.”
“안도는 무슨.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위험할 텐데?”
“…위험?”
“방법은 떠올랐어요. 그런데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요.”
선문답을 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차승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느 순간 제갈 해솔의 말에서 가정이 사라졌다.
말인즉 그녀가 속으로 모종의 확신을 내렸다는 소리였다.
“제가 느꼈던 이상 징후, 천사를 당황케 할 존재,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뭐 거지 같은 상황인 건 마찬가지예요. 아아, 악마들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킬킬 웃던 제갈 해솔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건 그 존재가 단 한 명이라는 점이죠.”
“한 명?”
“네. 군대도 아니고, 여러 명도 아니고, 딱 한 명. 그럼 방법이 먹힐지 어떨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성공률은 올라가거든요.”
“제갈 해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숫자는 무의미하다.”
차승현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는지 제갈 해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아요.”
“그 강력하던 악마 진영이 하루아침 전멸했다. 네 말이 맞는다면 단 한 명에 의해서.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죠. 준비할 수 있는.”
“실패하면?”
제갈 해솔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다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그 방법에서는 어떤 의심을 했지?”
차승현의 표정을 보더니 싱거운 웃음을 터뜨린다.
이내 의자에서 사뿐 일어서더니 발레를 하듯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말을 잇는다.
“간단해요. 최악에 최악이라는 가정하에. 그 존재는 우리와 동부가 힘을 합쳐도…. 아니. 어쩌면 사용자, 천사, 악마 전부가 달려들어도 죽일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잠깐 뜸을 들인 제갈 해솔은 갑자기 씩 웃어 보였다.
“정말로 그렇다면, 없애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없애는 건 가능하다.
차승현은 이 두 단어의 차이를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제갈 해솔은 형형한 눈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거죠.”
*
같은 시각.
김수현이 사라진, 그가 원래 있던 세계의 머셔너리 캐슬은 한바탕 난리….
까지는 아니고, 뜻밖에도 조용했다.
과거와 비교해서 의외라면 의외의 현상이었다.
그중 가장 예상외인 건 친형인 김유현이 날뛰지 않고 얌전히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수현이가 다중 우주 세계로 말려들었다는 건가.”
김유현이 허공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물론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뿐, 바라보는 곳에는 심원한 기운이 어른거리며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 호. 다중 우주 세계를 알고 있나?
제로 코드는 감탄했다.
“조금은. 예전에 수현이가 지옥으로 끌려갔을 때 한동안 중앙 도서관에서 살았었거든. 그때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지.”
– 그런가…. 아무튼, 내가 네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는 괜한 짓 하지 말라는 거다. 지금의 그놈이라면 어딜 던져놔도 알아서 살아 돌아올 놈이니까.
“확실히 그렇기는 해. 내 동생은 대단하지.”
– 큭. 알고 있으면 얌전히 기다려라.
“좋아.”
– 좋군.
생각보다 대화가 통하는 사실에 기뻐한 제로 코드가 떠나려는 찰나였다.
“주변 사람들한테는 내가 알아서 적당히 말하겠다. 그 대신 넌 날 수현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줘.”
– ?
훨훨 날아가려던 기운이 멈칫 정지한다.
아마 제로 코드가 얼굴이 있었다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 뭐?
“날 수현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 미친놈인가.
“수현이가 갔다면 나도 갈 수 있을 거 아닌가?”
– 혹시나 싶어 묻는데, 넌 차원을 이동하고 세계에 간섭하는 게 딱지 치기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나?
“뭐가 됐든 내 동생의 안위보다 중요하지 않아.”
제로 코드는 재빠르게 김유현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했다.
진명을 보고 곧 이해했다.
– 거절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얌전히 기다려라.
“거절을 거절한다.”
– 거절을 거절…? 미친놈. 네 마음대로 해라.
“후회할 텐데?”
– 난 네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해볼 테면 해봐라.
“그러지.”
‘인간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나.’ 는 의도가 다분히 깔린 비아냥에 차갑게 대꾸한 김유현은 몸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웃음을 치며 떠나려던 제로 코드는 문득 호기심이 동해 그의 뒤를 몰래 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지옥의 겁화, 만년설, 화정의 앞에서 고자질 중인 김유현을.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저 셋은 하나하나가 구천급의 신이다.
구천에 달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구천에 거주하는 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저 셋을 능가하는, 어쩌면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존재가 방금 끼어들었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말을 드물게도 경청하는 수나를 보자마자 제로 코드는 기억에서 ‘인간 주제에.’ 라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음 순간, 세 여인과 한 여아는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제로 코드를 이루는 기운이 크게 움찔거렸다.
– 어….
멍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오늘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제가 집필할 때 항상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MS 워드인데요.
이상하게 키보드에서 한자 키를 누를 때마다 워드가 중지하고 Microsoft Word의 작동이 중지되었습니다, 라는 창이 뜹니다.
평소에 안 누르려고 노력하지만, 간혹 저도 모르게 한두 번 누르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사실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한자야 메모장에서 복사 붙여넣기 하면 그만이고, 설령 중지 창이 떠도 작업 관리자를 눌러 강제 종료하면 워드에서 저장 여부를 묻는 창이 새로 뜨거든요.
거기서 저장하기를 누르고 새로 클릭해서 불러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급한 마음에 클릭을 남발하다가, 저장하지 않음을 클릭해 버렸습니다. OTL
워드가 휙 꺼지면서 윈도우 화면이 뜨는데 순간 반사적으로 격한 신음이….
다행히 워드 기능상 문서 복구 기능이 있어서 전부 날라가지는 않았지만, 절반이 사라진 걸 보고….
아…. ㅠㅠ
정신이 붕괴되서 화면 보고, 한숨만 쉬고.
담배 한 갑 들고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담배만 뿌악뿌악 피우다가, 또 나와서 한참을 바닥만 쳐다봤습니다.
내가 뭔 죄를 지었길래….
앞으로 자주 저장하는 습관을 들이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