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0
01039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새 아침을 맞이한 애틀랜타 성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구석구석 깔린 어둠을 걷어내는 맑은 햇살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달까.
하긴.
천신만고 끝에 공략한 신 대륙이 적에게 빼앗기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하룻밤 만에 증오스러운 악마가 깡그리 소멸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따라서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표정을 짓거나 허탈해 하는 기색은 비쳐도, 부정적인 감정이 보이지 않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닐 터.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안 식당 공기가 어색한 이유는 김수현에 대한 김유연의 도를 넘는 애정 행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수현이, 맛있게 먹어?”
숫제 둘만의 테이블을 따로 잡은 김유연은 꼭두새벽부터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고작 조식이 수라상이 저리 가라 할 만큼 호화로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또 그 모든 게 오직 남동생 한 명만을 위한 식사라는 점은 또 둘째치고서라도.
누나라는 사람이 다 큰 남동생 옆에 찰싹 달라붙어 한 입 한 입 떠먹여 주는 장면은, 백 번 양보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김수현도 조금도 빼는 기색 없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는 중이라는 점이다.
“나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어. 어미 새가 새끼 새한테 먹이 줄 때 딱 저렇더라.”
“얼씨구…. 저러다 진짜 젖이라도 물리겠네.”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흘렀으나 김유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행여 애가 체할세라 중간중간 손수 물잔을 기울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 몸짓 하나하나에도 사랑이 듬뿍 넘쳐 흐르고 있다.
“이것도 먹어 보렴.”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는 김수현을 황홀한 얼굴로 보던 김유연은 새 식사를 해다 놓았다.
그릇 위에는 참치 살처럼 보이는 붉은 고기 두 점이 정갈히 얹혀져 있었다.
각각 빛깔이나 크기가 약간씩 다르기는 했지만, 회덮밥을 연상케 하는 매우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이었다.
“라돌로프 고기로 만든 덮밥이야. 오늘의 주요리란다.”
주요리라는 말에 김수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라돌로프 고기요?”
“응. 혹시 안 먹어 봤니?”
“예. 뭔지는 아는데.”
“그렇구나. 라돌로프의 고기는 확실히 맛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요. 수컷은 성체는 살이 퍽퍽하고 어린놈은 비린내가 심해. 하지만 암컷은 어릴 때는 살이 연하고 신선하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맛의 농도가 진해지지.”
“아…. 그럼 암컷만 먹어야 하는 거네요?”
“꼭 그런 것도 아니야. 암컷은 수컷과 짝을 짓고 새끼를 낳는 순간 맛이 확 떨어져. 신기한 일이지. 어쨌든 라돌로프는 기본적으로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놈들이니, 보게 되면 부모 형제는 버리고 자매, 만 데려오는 게 좋아.”
‘자매’라는 말을 특히 강조한 김유연은 두 점의 고기 중 크기가 약간 크고 진한 빛을 띤 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얘는 두 마리 중 언니였던 것 같네? 색도 무르익은 게 아마 입안에서 살살 녹을걸? 자, 아~.”
김수현은 덥석 받아먹었다.
천천히 음미하듯 굼뜨게 움직이는 입을 김유연은 살짝 긴장한 눈으로 주시했다.
이내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남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크기가 작고 비교적 연한 빛을 띤 살이었다.
김유연의 표현을 따르면 두 마리 중 여동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뭐, 먹어 봐. 방금 먹었던 것보다 풍미는 덜하겠지만.”
묘하게 박한 평가였으나 김수현은 개의치 않고 받아먹었다.
곧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그를 보며 김유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
“예?”
“어느 게 더 맛있어?”
“글쎄요. 두 번째 게 좀 더 신선한 것 같은데….”
그러자 김유연의 안색이 까닭 없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말씀대로 처음 먹었던 게 확실히 맛이 농후해요. 제 입맛에는 첫 번째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다음 순간, 시무룩해 하던 김유연이 갑자기 매우 기뻐하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로?”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몇 번이나 되묻는다.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뒤 테이블에 앉은 김수연을 돌아보며 뻐기는 미소를 날리기까지.
조용히 식사 중이던 김수연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윽고 극도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우쭐거리는 김유연을 세게 밀쳐내고 김수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김수현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는 순간, 그녀의 고개가 반쯤 숙어졌다.
“고마워.”
식당이 조용해졌다.
다시 고개를 든 김수연은 눈을 맞춘 채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는 정신이 없었어. 아니, 실은 오늘 아침까지도 믿기지가 않았거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미 없이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솔직히-.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너한테 가장 먼저 말해야겠지. 우리 연합을 대표해서, 고맙다고.”
“…아, 응.”
사르르 흘러내리는 머릿결을 보느라 김수현은 약간 늦게 대답했다.
잠깐의 침묵 후, 조용히 웃는다.
멋쩍으면서도 부드러운 미소와 마주한 순간 김수연은 작게 숨을 삼켰다.
‘너는, 나랑 다르구나.’
왜 자꾸 그 말이 뇌리에 떠오르는 걸까.
흐뭇해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는 것 같은 웃음.
그 감정은 김수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롯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실망 따위는 한 치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는 것 같다.
정말로 장하다고, 넌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으면서, 저 또 다른 나는 도대체 나의 어떤 점을 선망하는 걸까?
김수연은 문득 묻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살짝 입을 연 찰나, 돌연히 날아온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아….”
“전황은 굉장히 유리해졌어요.”
비로소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 가자, 눈치만 보던 정하연이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신 대륙도 지켰고,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여유가 생겼어요.”
“맞아 맞아! 아마 악마 놈들도 크게 놀랐을걸?”
“난 구 북 대륙 놈들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러네. 우리는 여기 눌러앉으면 그만이니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장내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승리에 취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소리 높여 웃는다.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북 대륙의 애틀랜타 공략을 저지하려던 악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세력도 크게 꺾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구 북 대륙 연합은 닭 쫓던 개가 돼 버렸다.
이와 반대로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은 애틀랜타라는 새로운 무대를 얻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이라 부를 정도니 앞으로 걸어갈 길이 탄탄대로라 생각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터.
그러나 지켜보는 김수현의 낯빛은 무표정에 가까우리 만치 차가웠다.
“꼭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보이는군.”
혼잣말처럼 나직이 뇌까리며 김수연의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김수현을 돌아봤다.
사내의 손이 함부로 가슴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잊었을 만큼 놀란 얼굴이었다.
“별로 유리한 것도 아닐 텐데.”
두 번째 말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식당이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전원의 시선이 연초에 불을 붙이는 사내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김수연이 물었다.
“말 그대로야. 악마는…. 사탄이 건재한 이상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없을 거다.”
‘넌 알고 있잖아?’ 라는 느낌으로 힐끗 쳐다보는 눈초리에 김수연은 말문이 막혔다.
“참고로 말해주자면, 난 이보다 더 유리한 상황에서, 더 강한 전력을 갖추고도 패배할 뻔했다.”
김수연의 낯에 강한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저만한 무력을 지니고도 질 뻔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어쨌든 저쨌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알아차렸다.
사탄의 수완은 김수연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뭐…. 기뻐하는 건 좋지만, 말은 정정하자는 거야. 어마어마한 여유가 아니라 일말의 여유 정도로. 등 뒤에 북 대륙도 아군은 아니잖아?”
뼈 있는 말에 정하연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 있잖아….”
“그리고, 난 곧 돌아갈 거다. 오늘이라도 당장.”
김수연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으나, 김수현은 이왕 내친김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단호히 말했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어쩌다 이 세계에 떨어졌고, 또 어쩌다 휘말렸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 아니, 돌아갈 거야. 아마 지금쯤 굉장히 혼란한 상황일 거다.”
하긴 동료도 아내도 아이도 전부 원래 세계에 있으니.
거기다 스스로 싫다면 모를까, 원래대로라면 진작 돌아갔어야 정상이다.
그래.
내심 이해는 하지만, 그런데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내만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편해질지는 명약관화였으니까.
한동안 눈치만 보던 정하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군요. 그럼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니요. 신경 써주신 건 감사하지만, 돌아가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명확히 선을 그은 김수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김수연을 보며 쓰게 웃는다.
“더 나설 생각은 없지만…. 괜찮다면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 말에 김수연은 매달려서라도 부탁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상대가 생각을 단단히 굳혔음을 느낀 것이다.
사실상 이제껏 해준 것만 해도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여기서 더 해주길 바라는 건 염치없는 일이었다.
“…좋아. 고맙게 들을 게.”
시원한 대답에 김수현은 씩 웃어 보였다.
김유연이 소리 죽여 흐느끼는 소음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자리를 옮기자는 눈짓을 보냈다.
아직 이 회차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으니 듣는 귀가 많으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이윽고 신호를 받은 김수연이 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우르르릉!
갑자기 천둥이 치는 것 같이 무겁고 둔한 소리가 창을 때렸다.
화들짝 하늘을 쳐다본 인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과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맑고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어느 순간 어둑해지다 못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곧 뇌성을 동반한 벼락이라도 칠 것처럼.
잠시 후, 하염없이 밖을 응시하던 누군가가 멍한 음성으로 말했다.
“…뭐지?”
============================ 작품 후기 ============================
흐. 길었던 외전도 서서히 끝이 보이네요.
어제 하루 쉬어서 죄송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힘내서 옴니버스 최종회를 서둘러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