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1
01040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갑자기 하늘에 낀 먹구름은 날이 저물도록 걷히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니 그나마 틈새로 비치던 햇빛도 숫제 자취를 감췄고, 석음이 내리기 직전의 황혼이 커다란 도시를 석양빛으로 불태운다.
낡은 고성의 옥상이 저녁때의 햇빛으로 타오르는 가운데, 사방이 탁 트인 장소에는 오직 두 남녀만이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수현과 김수연은 식당에서 자리를 옮긴 이후 매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걸어온 길과 현재 처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고, 그는 조용히 경청했다.
그 결과 김수현은 조언을 하는데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상황은 생각대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가 좀 오묘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김수현은 애틀랜타 안정화에 시간을 쏟지 말고 바로 테라로 진군하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강철 산맥 공략에 성공한 이상, 약속의 신전까지 가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단,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이 있다면 전제하에 말이다.
김수연은 테라를 손쉽게 공략하는 방법을 들었을 때는 크게 놀라면서도 복잡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면 김수현의 세계와는 다르게 이 세상에서는 네 여왕 중 두 명이 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수현이 첫 만남에서 확인한 결과, 김수연은 왕으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검의 여왕 남다은과 철혈 여왕 한소영도 아군이다.
하지만 그림자 여왕 고연주와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는 명백한 적군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은 두 갈래로 압축됐다.
무력으로 찍어 누르느냐?
아니면 대화로 풀어나가느냐?
악마를 생각하면 후자를 선택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악마 전력의 절반을 소멸시켰으니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
잘만 되면 사탄이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제로 코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대로 흘러갈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를 방불케 하는 북 대륙 내 세력 간의 반목은, 한두 번의 대화로는 메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골이 있었다.
하긴 오죽하면 악마가 전면에 나섰는데도 서로 힘을 합치지 않고 있겠느냐마는.
한편으로는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는 요정 여왕으로 각성한 마르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김수연은 마르의 존재는 물론, 환각의 협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단지 섬망의 산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김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머리도 식힐 겸 레몬 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누구냐고 물어봤다가, 오벨로 기사 단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악 소리를 질렀다.
구 북 대륙의 북쪽 미개척 지역에 오벨로 왕국과 관련된 생명의 샘이라는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서로 같은 존재인 만큼 거의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엄연히 차이점은 있었다.
어쨌든 여러 말이 오고 갔으나 문제가 되는 부분까지 김수현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
김수연도 그걸 이해하고 있었고, 거기서 길었던 김수현의 조언도 끝났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비가 내릴 것 같네.”
한참을 하늘만 보고 있던 김수연이 한 마디 툭 던졌다.
그 말대로 당장 빗방울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무의미한 침묵을 깬 김수연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 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아.”
이내 몸을 돌리려는 찰나, 고개만 돌려 아직 의자에 앉아 있는 김수현을 바라봤다.
“아마 돌아올 때쯤이면….”
“난 여기에 없겠지.”
김수현은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수연도 은은한 미소를 피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 아니, 고마웠어.”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작별에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럼, 안녕.”
“그래. 안녕.”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수연은 망설이지 않고 옥상 문으로 모습을 감췄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지자, 김수현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홀가분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은 만큼 한 번쯤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여러 개였다.
속마음을 사실대로 말하라면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이대로 훌쩍 떠나기에는 조금, 아니 굉장히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서 빨리 떠나려는 거였다.
간섭은 최소화할수록 좋다는 말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정말로 가능성은 적겠지만, 혹시라도 호기심이 커질수록 이 세계에 아예 눌러앉아 버릴까 봐서.
결과적으로 떠나겠다는 생각은 이미 몇 번이고 굳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
조심스레 열리는 문으로 걸어 나오는 김유연 때문이었다.
“…가니?”
떨리는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떠날 거니? 지금 바로?”
“예….”
두어 번의 채근에 김수현은 간신히 대답했다.
“수현아….”
잠깐의 침묵 후, 김유연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루만. 아주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을 게.”
“죄송합니다.”
“제발.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니? 응?”
“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김수현은 억지로나마 단호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옅은 붉은빛으로 충혈된 눈동자를 보니 저절로 말이 흐려졌다.
퉁퉁 부은 두 눈은 진정으로 서운하다는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못됐어, 정말.”
“…….”
“차라리 내 앞에 나타나지나 말지…. 이건 너무하잖아.”
“…….”
김수현은 눈을 감아 외면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탓이다.
훌쩍 코를 들이켠 김유연은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럼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이요?”
“응.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누나라고 불러줘.”
“에….”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 말투에 김수현은 다시 눈을 떴다.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김유연은 모로 봐도 진심이었다.
“안 될까…?”
은근하게 흐리는 목소리는 애간장을 녹이는 듯해 자꾸만 힐끔거리게 된다.
새삼스럽지만 김수현이 이성을 보는 눈은 상당히 높다.
한 명 한 명 개성적인 매력을 뽐내는 아내들과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높아졌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유연은 한소영이 인정한 김수현의 철벽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환상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잠시 후, 김수현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휘휘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자기를 아는 사람?
도 당연히 전혀 없다.
이 세계?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김유연?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 누나!”
어차피 마지막이기도 하고, 굳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누나!”
김수현은 김유연의 품으로 와락 안겼다.
“으, 응?”
설마 이렇게 격하게 달려들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안아주는 김유연이 당황한 낯빛을 보였다.
“누나 누나. 실은 저도 여기 남고 싶어요.”
“어…?”
“아니, 어디든 상관은 없어요. 그냥 누나랑 같이 있고 싶어요.”
“저…. 정말이니?”
“네!”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그럼요. 누나랑 같이 살면서 보살핌 받으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아요.”
“어, 어머…. 그랬구나. 역시 그랬구나?”
“으으으응. 누나, 누나….”
“아…. 아아…. 그래, 그래그래! 누나가 우리 수현이 평생 보살펴줄 게.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죽어서도 보살펴줄 게.”
김유연은 교성 같은 격한 신음을 터뜨렸다.
아마 김수현이 그녀의 표정을 봤다면 지금 하는 행동을 곧장 멈췄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슴으로 파고들어 마음껏 응석을 부리느라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제 3의 눈이라도 켜 놨다면 그녀의 진명이 변화한 걸 알아차렸을 터.
이미 때는 늦었다.
김수현의 방금 언행으로 김유연은 위험한 세계에 첫 눈을 떴다.
김유연의 두 팔이 남동생을 미친 듯이 보듬고 쓰다듬으며 꽉 껴안는 게 그 방증이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거야…. ”
김수현의 머리에 뺨을 쓱쓱 비비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광기로 희번덕거렸다.
“이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어…. 아무도….”
…그러니까, 얀데레라고 하던가?
그때였다.
우르르릉!
돌연히 어둑한 하늘이 찢어지라 세찬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에 한 번 치고 지금 또 한 번 치는, 이번이 두 번째로 울리는 굉음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쯔우우웅.
문득 공간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음이 들리더니.
털썩, 털썩!
뭔가가 옥상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연달아 들렸다.
“큭!”
“아야야야!”
이어서 웬 남녀의 목소리까지.
이 갑작스러운 출현에 김수현과 김유연은 놀란 기색을 비쳤다.
물론 각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형?”
“제, 제갈 해소오올?”
그랬다.
옥상에 떨어진 두 남녀는 다름 아닌 김유현과 제갈 해솔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을 앞두고 김유연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김유현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수현….”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던 낯빛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달려가려던 걸 멈추고 김수현의 옆에 붙어 있는 걸 빤히 응시한다.
그 시선을 느낀 걸까.
망연자실한 얼굴로 제갈 해솔을 보고 있던 김유연도 언뜻 눈을 돌렸다.
한 남동생의 형과 누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때 쾅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옥상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언니!”
아래로 내려갔었던 김수연이 김유연의 비명을 듣고 급히 뛰어 올라온 것이다.
“무슨 일…?”
그리고 다음 순간, 김수연의 행동이 우뚝 정지했다.
그리하여.
김유현과 김수현.
김유연과 김수연.
이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 작품 후기 ============================
아마 다음 회는 오늘 자정에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토요일에 바쁠 것 같아서 글을 쓸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아서요.
여하튼 4월 2일이나 4월 3일 중에 하루는 꼭 올리겠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
PS. 독자님들.
이 옴니버스도 팔부능선을 넘기는 했으나, 혹시 요새 전개 속도가 많이 느려진 것 같지는 않으신지요?
혹시 지루하게 느껴지신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압축하고 쳐내서, 보다 빠르게 전개를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