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3
01042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그래…. 이름이 김수연이라고?”
“네….”
무지근한 분위기였었다.
“참 신기한 일이구나. 내 이름은….”
“알고 있어요. 김유현…. 유현이 오빠 맞으시죠?”
좀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 끼어들기 힘든, 뭔가 함부로 입을 열기 어려운 분위기였었다.
“어. 알고 있었어?”
“그럼요. 이야기 많이 들었는걸요.”
일촉즉발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었다.
그런데.
“하하. 넌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아이, 오빠도 참….”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무거웠던 주변 환경이 확 가벼워졌다.
“그런데 수연이는 여태껏 어떻게 지내 왔어? 혹시 말해줄 수 있을까?”
“아, 저는….”
아니, 가벼워졌을 뿐만이 아니라….
“응응. 그래서?”
“그래서 강철 산맥 원정을 결정하고….”
뭐라고 해야 할까?
딱딱하던 공기가 푹신푹신해지고, 뜨듯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
김유현의 진명이 변한 시점부터.
“그랬구나.”
간략한 요약을 들은 김유현은 진중한 얼굴로 주억거렸다.
그리고 팔을 살짝 들어서 김수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김수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수리부터 천천히 쓸어내려 주는 손길은 남자의 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고,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다.
“많이 힘들었지?”
문득 귓전을 울리는 속삭임에 김수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단순하고 진부한 한두 마디였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닭 모를 감동과 듬직함이 전해졌다.
걱정 따위는 전부 날려 버리고, 이대로 스르르 잠들고 싶을 만큼 아늑하고 포근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황이 썩 좋지는 않구나.”
그래도 뇌제는 뇌제였다.
간추리고 간추린 설명만 들었는데도 김유현은 단숨에 전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김수연은 살짝 눈을 떴다.
바로 옆에서 여전히 진지하게 눈을 빛내는 김유현을 보니 저절로 콧등이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수연이는 최선을 다했잖아. 그렇지?”
“하지만 결과가 이래서….”
“아니.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일은 사람이 꾸미되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일은 절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는단다.”
잔잔히 위로해주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김수연의 두 눈동자가 애틋해졌다.
‘어쩜 말을 해도….’
지금껏 혼자서 속앓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걸 다 안다는 듯이 부드러이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이내 서서히 손이 떨어지자, 김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정수리를 갖다 붙였다.
떼지 말라는 듯, 더 어루만져 달라는 듯.
꼭 순종적인 새끼 고양이 같은 행동에 김유현의 인중이 길쭉해졌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하긴.
항상 남동생한테서 바랐던 모습을 오늘 처음 만난 예쁜 여동생이 보여주니 이보다 황홀한 감격은 없었으리라.
“아무튼, 이제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네? 아, 안 돼요.”
“응? 왜?”
“오빠는 돌아가셔야 하잖아요. 원래 세계로.”
참고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김유현이 직접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오빠라는 소리는 그 말을 뇌리에서 까맣게 잊도록 만들고 있었다.
“수연아. 애초 여기 안 왔으면 모를까? 이렇게 만났고 사정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하…. 하지만…. 혹시 오빠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싫어요….”
김수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김유현은 몸을 배배 꼬며 헤벌쭉 웃어 보였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오빠랑 수현이만 있으면 북 대륙이나 악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했다고.
기실 김수현만 있어도 이 세상 전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 진배없었지만, 김유현은 유독 자기 자신을 강조했다.
“그렇지? 수현아?”
김유현은 몹시 한심한 표정 그대로 얼굴을 돌려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러나 당연히 긍정해줄 거라고 기대한 것과 다르게 대답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수현아?”
이윽고 눈을 휘둥그레 뜬 김유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김수현을.
넋이 나간 얼굴로 제자리에 힘없이 서 있는 남동생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마주한 두 눈동자에 조금이지만 눈물이 괴었다.
“수, 수현아?”
그 순간 김수현은 곧바로 몸을 돌렸고, 김유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수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현의 손에 붙잡혔다.
둘의 민첩 능력치 차이를 생각해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잡히기는 잡혔다.
순간적으로 팔을 떨치려던 김수현은, 잠깐 숨을 고른 후 태연히 뒤를 돌아봤다.
“왜?”
거친 호흡 때문인지 말소리는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어…. 어디 가?”
“형이 무슨 상관이야?”
가시가 잔뜩 돋친 말투였다.
“미, 미안해.”
김유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김수현과 다르게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내가 잠깐 정신이 팔려서…. 혹시 화났어?”
“아니? 화 안 났는데?”
“화났잖아.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 화나게 한 거?”
“형은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뭔가 형제가 하는 대화치고는 상당히 이상한 말이었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주변 인원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온 김수연이 당당하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야, 너 뭐야?”
“응?”
“너 우리 오빠한테 왜 그러는데?”
“뭐, 뭐라고? 우리 오빠?”
김수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팔짱을 낀 김수연은 자못 도도하게 말을 이었다.
“너 되게 웃긴다. 너랑 언니랑 한 짓은 기억도 안 나나 봐? 왜? 우리는 이러면 안 돼?”
그 말에 김수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동안 해놓은 짓이 있으니 말문이 막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흥 코웃음 친 김수연은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왼쪽 눈을 살며시 치켜떴다.
하지만 김수현에게도 강력한 아군은 있었다.
“김수연! 너 방금 뭐라 그랬어?”
귀를 찌르는 고성에 김수연이 움찔거렸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김유연이 드디어 나선 것이다.
하기야 사랑해 마지않는 남동생이 위기에 몰렸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머, 어머 어머. 얘 좀 봐. 말 진짜 웃기게 하네. 감히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어, 언니….”
“생명의 은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미쳤어?”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조용히 해. 수현아? 이리 오렴.”
“…….”
톡 쏘아붙인 김유연은 천사 같은 얼굴로 양팔을 벌렸다.
입을 삐쭉 내밀고 있던 김수현은 순순히 품에 안겼다.
그걸 보던 김유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당신 뭐야?”
다분한 시비조의 말투였다.
김유연도 숨기지 않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뭐긴? 알면서 물어봐? 내가 넌데.”
“누가 그걸 물었어? 뭔데 수연이한테 윽박지르느냐고?”
“그럼 안 되나? 내 친동생인데? 뭔 상관이람.”
“그럼 그 손 떼지그래? 수현이는 내 친동생이거든.”
“웃겨. 질투하나 봐.”
“뭐?”
김유현의 어깨에서 황금빛 전류가 파직 튀었다.
“…해보자는 거야?”
번개의 마녀, 김유연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안 될 것 있나.”
뇌제, 김유현도 차갑게 답했다.
“형! 우리 누나 털끝이라도 건드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끝이야, 끝!”
“야! 우리 오빠한테 소리 지르지 말랬지!”
“수연이 너 조용히 안 해?”
“왜 애꿎은 애한테…!”
김수현이 입을 열면 김수연이 나서고,
김수연이 입을 열면 김유연이 나서고,
김유연이 입을 열면 김유현이 나서고,
김유현이 입을 열면 다시 김수현이 나선다.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가 이럴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진 가운데, 머셔너리 클랜원은 하나같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거렸다.
오직 제갈 해솔만이 임한나가 갖다 준 차를 음미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
“응~.”
차 맛이 마음에 든 걸까.
허밍에 가까운 감탄을 흘리더니 여전히 다투는 네 남매를 힐끗 보며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하. 개판이네.”
어차피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제갈 해솔은 신경을 꺼 버렸다.
저 웃기지도 않은 남매 다툼보다 이 세계에 존재할 또 한 명의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과연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인 이상 바보는 아닐 테고. 그럼 지금쯤 어느 정도 상황은 파악했겠지.’
자화자찬이기는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성스러운 여왕 휘하의 제갈 해솔은 김수현을 사라지게 할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뭘 해도 저 남자한테는 통하지 않을 텐데.’
김수현이 있는 이상 어떤 전력도, 함정도 통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만큼 검의 군주가 지닌 무력은 압도적이라 봐도 좋았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는 있다.
무력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건 쉽다.
그러나 이 말인즉, 김수현이 또 대규모 살인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원래 세계에서 동료인 사용자를, 또는 아내를 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김수현은 이제 겨우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중이었다.
상대가 악마라면 모를까, 북 대륙을 무력으로 제압할 시 악영향이 미칠 것은 명약관화.
기껏 현대에 다녀온 게 수포로 돌아가는 건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일 터.
‘결국, 대화밖에 없나.’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제갈 해솔은 피식거렸다.
고연주의 존재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아까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 대륙은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을 제외한 나머지가 연합해 맞서고 있는 듯했다.
현 상황에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골이 깊다고 했으니, 남은 방법은 하나.
성스러운 여왕의 진영과 동부 진영의 동맹을 갈라놓는 수밖에 없다.
그럼 최소한 한쪽과는 대화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진영의 사이를 어떻게 이간질하느냐는 것.
‘이 임무 수행에는 고연주 씨만 한 적임자가 없는데…. 아이 씨, 진짜.’
차분히 상념을 정리하던 제갈 해솔은 와락 표정을 구겼다.
시끄러워서 도저히 생각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갈 해솔은 가볍게 마력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전신이 물보라처럼 흩어졌다.
워프 능력이었다.
그리고.
“…….”
밖에서 은밀하게 지켜보던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자취를 감췄다.
*
“일은 어떻게 됐지?”
–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
– 내부까지 침투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습니다. 그나마 고성에 최대한 근접해서 겨우….
통신 구슬 속의 그림자가 담백이 실패를 보고하자, 고연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정보였다.
악마 군세는 어떻게 전멸했는가, 새로 출현한 사용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등등.
– 그래도 그 사용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모습을 기록 영상에 담았습니다만….
그것도 정보라면 정보였으나 성과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탁 까놓고 말해서 단순히 겉모습만 찍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마는.
“그것뿐이야?”
곱지 않은 어조였다.
하기야 갖은 고생 끝에 침투시킨 첩자가 제구실을 못하니 성이 날만도 했다.
또 실패한 주제에 태도가 거리낌 없는 게 거슬리기도 했고.
게다가 타나토스가 등장했을 때, 그림자가 지레짐작하고 멋대로 빠져나왔으니 좋게 볼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림자도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꾸벅 허리를 숙였다.
– 송구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 실수를 만회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 비록 정보 수집에는 실패했지만….
“…했지만?”
말을 끊은 그림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록 구슬이었다.
– 그에 결코 못지 않은, 큰 거 하나 들고 왔습니다.
“큰 거? 뭔데?”
– 우선 주변부터….
“……!”
그림자의 음성이 돌연히 낮아졌다.
고연주도 눈치 없는 사용자는 아니었다.
신속하게 자리를 이동한 후, 통신 구슬을 바스러지라 쥐었다.
“이제 말해봐.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면 알아서 해.”
– 흐. 이걸 보십시오.
그렇게 말한 그림자는 기록 구슬을 가까이 대고 활성화했다.
이윽고 재생되는 영상을 확인한 고연주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김유연과 김수연 두 자매와 처음 보는 두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 네 명이 아니라 한쪽에서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여인에게 꽂혀 있었다.
“제갈, 해솔…?”
–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그 여자는 어제도 나와…!”
– 워프 능력을 잊으셨습니까?
뭐라 외치려던 고연주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제갈 해솔의 장기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해당 어빌리티의 자세한 능력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
막말로 엄청난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못 들었어?”
– 그것까지는…. 하지만 제갈 해솔을 사이에 두고 저렇게 다투는 걸 보면….
그림자는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어질 말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네 존재가 들켰을 가능성은?”
고연주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이 중얼거렸다.
– 확신은 못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됩니다.
“낚인 걸 수도 있잖아? 가령 그쪽에서 네가 있다는 걸 알고….”
–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설령 겉모습은 흉내 낸다고 해도, 능력까지 똑같이 구현할 수 있습니까?
“그건 거의 불가능하지.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바로 그때.
– 펑!
작은 소음과 함께 기록 영상 속의 제갈 해솔이 창졸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분분히 흩날리는 물방울 모양의 마력 결정뿐.
– 어떻습니까?
눈을 찢어지라 크게 뜬 고연주가 입을 딱 다물었다.
몇 번을 돌려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워프 능력이었다.
잠시 후, 뻣뻣하게 굳었던 입꼬리가 섬뜩하게 치켜졌다.
“…이것 봐라?”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어헝헝 잇힝.
어헝잇 어헝잇 어헝잇 어헝잇 어헝.
어헝헝 흥흥.
어힝흥헹흥항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