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4
01043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도시에 머무르던 밤은 하얗게 트는 동에 물러날 채비를 시작했다.
지난밤의 암야(暗夜)는 서서히 사라지고 파란 하늘을 단장하는 색조의 대비는 눈부시리 만치 선명하다.
곳곳에 깔렸던 어둠이 서서히 밝아지는 가운데, 그림자 하나가 미동도 보이지 않고 새벽 내내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후………….”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고연주는 손에 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밤새 동안 쉬지 않고 돌려본 영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조금도 지루한 기색 없이 구슬에 집중했다.
다시, 소리 없는 영상이 재생된다.
“…….”
고연주는 잇자국이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
밤 동안 수백 번 돌려보며 확인한 결과, 머릿속으로 결론은 내렸다.
단지 앞으로의 일이 걱정돼 잠을 이루지 못했을 뿐.
퀭한 그녀의 눈이 흐르는 장면을 유심히 관찰한다.
주목해야 할 상황은 두 가지였다.
김 씨 자매가 처음 보는 두 남자와 얽히고설켜서 말다툼하는 광경과 바로 옆 탁자에 앉아서 여유롭게 미소 짓는 제갈 해솔.
일단 찻잔을 든 여인이 제갈 해솔이라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영상 끝자락에 나오는 워프는 오직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능력이니까.
그렇다면 제갈 해솔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그뿐만이 아니다.
김유연의 동생 사랑은 북 대륙 사용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김수연에게 소리치거나, 눈을 부라리는 등의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고연주는 가능성 높은 가설을 하나 내세웠다.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
이 세 클랜을 중심으로 한 남부 연합이 악마를 상대로 승전한 소식은 분명히 예상외였다.
호시탐탐 어부지리를 노렸던 제갈 해솔도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였었다.
적대하는 상대가 애틀랜타를 차지한 이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북 대륙에 남은 세력이었다.
결국, 제갈 해솔은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워프로 스스로 적진으로 이동해 모종의 제안을 했을 터.
그 제안이 동맹 안건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폭군과 성스러운 여왕의 세력 간 갈등은 삼척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골이 깊고 오래됐다.
그런 두 진영이 하루아침에 손을 잡는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귀가 솔깃해질 제의를 했다면?
물론 지금까지의 정리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상념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북부가 동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이었다.
뭣보다 은밀하게 조사를 지시한 결과, 제갈 해솔이 어제 적잖은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고연주는 드디어 결심이 서는 걸 느꼈다.
서로 힘을 합쳐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믿었던 동맹이 먼저 등을 돌렸다.
이대로 두 세력의 장밋빛 미래를 위한 제물이 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먼저 의를 저버렸는데, 우리가 지킬 필요는 없지.”
싸늘하게 독백한 고연주는 서랍을 열어 호출석을 눌렀다.
현재 동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개.
첫 번째는 영상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따지는 것.
두 번째는 영상을 숨긴 채 역으로 뒤통수치는 것.
그림자 여왕이 염두에 둔 건 당연히 후자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고연주는 말했다.
“회의 준비해.”
“회의, 말씀이십니까?”
“내 이름으로 비상 소집령 내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그림자는 서둘러 자취를 감췄다.
고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진 만큼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 서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왕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제갈 해솔은 어마어마한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유연과 김수연이 대립하는 장면도 이해가 간다.
영상 속의 내분은 아마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문제에서 기인했을 터.
어느 정도 수준의 제안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제갈 해솔이 한 발 빠르게 움직여서 먼저 저울에 올라갔지만, 원래 저울의 그릇은 양쪽에 있다.
또 동부는 남부와 갈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북부만큼 심하지는 않다.
즉 아직 참가할 여지는 여러모로 남은 셈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회의 준비가 완료됐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고연주는 눈을 빛내며 구슬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라면, 있었다.
북부를 뛰어넘는, 상대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자신이.
*
다음 날.
아침이 돼 잠에서 깬 머셔너리 클랜원은 조용히 식당으로 모였다.
김수현과 김수연, 김유현과 김유연은 어제저녁 말다툼을 매듭짓지 못했다.
속을 풀기는커녕, 다툼이 길어질수록 서로 강도 높은 비난을 가한 탓에 분위기는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졌었다.
중간에 동료 서너 명이 억지로 두 편을 갈라놓지 않았다면, 과장 좀 보태서 혈육의 연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하룻밤 자고 나니 이성이 돌아왔는지 네 명은 식당에서 마주쳤는데도 어제처럼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김수연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못 볼 꼴을 보였던 게 창피한 듯 말없이 식사만 했다.
식당에는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흘렀다.
그렇게 불편한 식사도 거의 끝나갈 무렵, 먼저 움직인 건 김유현이었다.
끼니 내내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김수현만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흠.”
어색하게 헛기침하더니 남동생이 앉은 탁자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마침 김수현도 식사를 마치고 팔짱을 낀 채 가없이 창문만 보던 중이었다.
“수현아.”
“……어?”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도 김수현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게 상념에 빠져 있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 어제는……. 어……. 내가 너무 당황해서…….”
“뭐….”
“네가 말했던 사정이라는 거 말이다. 그것도 한 번 들어봤어야 했는데……. 정말로 미안했다.”
“크흠…….”
김유현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김수현은 시선을 피하며 괜스레 눈만 돌렸다.
보아하니 조금이지만 기분이 풀릴 기미가 보여서 형은 준비해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이거…….”
두 손으로 곱게 받친 채 내민 건 다름 아닌 새끼 카오스 미믹이었다.
“이건 뭔데?”
“네가 사용하던 장비들 좀 챙겼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했어.”
“아……. 고마워.”
“뭘. 고맙긴.”
김수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김유현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뒤집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와주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다들 기다리고 있다며.”
김수현은 퉁명스레 받아쳤다.
“오기 전에 상황 설명은 하고 왔다. 또 가끔 제로 코드가 들러서 네 근황을 전해줄 거야.”
“으음.”
“부탁한다. 어제 얘기를 나눠봤는데 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수현이 네가 꼭 필요해. 너만 도와준다면 분명히 일이 쉬워질 거야.”
“…….”
김유연과 김수연은 입을 다문 채 형제의 대화를 지켜봤다.
사실 저 정도의 존재가 도와준다는데 반대할 사용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김수현의 존재감은 이미 앞선 두 번의 전투로 입증됐으니까.
대답은 한동안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유현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김수현은 여전히 새침한 표정이었지만, 새끼 카오스 미믹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천천히 상자를 열고 장비를 확인하는 남동생을 보며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싸운 것도 되게 오랜만이지 않아?”
“갑자기 훈훈한 척하지 마.”
아직 앙금이 남았는지 김수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던 김유현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멋쩍어했다.
“자! 이제 그만 우리 건설적인 대화 좀 나눠보는 게 어때요?”
그동안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끅끅 눈물만 흘리던 제갈 해솔이 눈을 훔치며 말했다.
짝짝 손뼉까지 치자, 클랜원은 주목하면서도 참았던 숨을 토했다.
뭔가 몹시 험난한 고비를 하나 넘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서서히 공기가 풀리자, 정하연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대다수가 비슷한 표정이었다.
현 세계의 제갈 해솔과 이 세계의 제갈 해솔의 머리 싸움은 확실히 흥미로운 대결이었다.
“좋은 생각까지는 아니지만, 쉬운 방법은 있는데…….”
말꼬리를 흐린 제갈 해솔이 한쪽으로 은근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시선을 받은 김수현은 담담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악마라면 모를까?
아무리 다른 세계라지만, 동료와 아내를 향해 칼을 빼 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던 김유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혹시 대충 쳐죽이고 돌아가자는 말을 했으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뭐, 무력보다는 대화가 좋기는 하죠. 잘 풀리기만 한다면.”
물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럼 어떻게, 북 대륙에 연락해 자리라도 만들어보는 건?”
김수현을 응시하던 시선이 구십도 회전했다.
뭐라 말하려던 김수연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갈 해솔도 바보는 아니었다.
악마가 등장했는데도 서로 반목하는 걸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와. 그 정도로 심각해요? 현재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되는데요? 수치화해서, 대충이라도.”
“강철 산맥 원정으로 손실은 봤지만, 그래도 우리 남부 연합이 5.5에서 6은 될 거예요.”
대답은 김한별에게서 나왔다.
“그럼 동북부 연맹이 4에서 4.5쯤 된다는 거네요?”
“네. 아마도.”
빠르게 중얼거리던 제갈 해솔이 문득 침묵했다.
고개를 있는 대로 젖히더니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말했다.
“동맹이라는 게 뭘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전부 눈만 깜빡거렸다.
잠깐의 적막 후, 제갈 해솔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하지는 마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사실 전 동맹을 맺는데 선의나 우정, 약속, 믿음. 이런 것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대화를 통해 앙금을 풀고 동맹을 맺자. 그런데 꼭 갈등을 풀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네?”
“우리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두 세력이 동맹을 맺고, 더 나아가 오래도록 단결하는데 가장 확실한 그림이 뭘까요?”
“그거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요, 라고 말하려던 정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제갈 해솔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간단해요. 한 세력이 타 세력보다 무지~하게 강하면 돼요.”
신선하면서도 생소한 논리였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반론하지 못했다.
막말로 세력 구도가 구 대 일로 나뉘었다고 가정하면, 약한 쪽이 감히 배신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말인즉 강자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성립될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 동맹이라는 소리였다.
“설마.”
머리 회전이 빠른 몇 명은 지금에 이르러서 제갈 해솔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동부와 북부를 갈라놓자?”
“바로 그거죠. 보아하니 북부는 완전히 물 건너간 것 같고. 동부를 우리가 품을 수만 있다면 세력 균형은 완전히 무너지잖아요?”
“그렇죠.”
“거기까지 상황이 몰리면……. 그, 누구라고 했죠? 성스러운 호구?”
“네. 맞아요.”
“아무튼, 그렇게 되면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더 싸우려 들지는 않을 걸요? 그 진영에 제가 있다면 말이죠. 울며 겨자 먹기로 동맹에 응할 거예요. 네, 분명히 그럴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제갈 해솔은 돌연히 한숨을 푹 쉬었다.
잘난 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두 세력을 어떻게 떼어놓는지가 관건이었다.
“아-. 어렵네~. 안솔을 데려올 걸 그랬나?”
“네? 저요?”
열심히 듣고 있던 안솔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차 한 제갈 해솔이 황금빛을 분사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으나, 실망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 좀 모호한데……. 넌 아무래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안 되겠다.”
“데우,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단다. 기도 한 번에 위기를 뻥뻥 타개해주는 사기적인 행운이.”
“뭔지는 모르지만, 저도 돕고 싶어요.”
“기특하기는 한데, 넌 안 돼.”
“왜요!”
은연중에 무시하는 말투를 느꼈는지 안솔이 화를 냈다.
“하지만 아직 바라는 대로도 활성화하지 못했잖니?”
“바라는 대로?”
“봐. 모르잖아.”
“저도 할 수 있다니까요!”
그러자 제갈 해솔이 피식거렸다.
“그래? 한 번 해봐.”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동부와 북부가 갈라서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돼.”
“이익!”
네까짓 게 할 수 있겠냐는 어조에 안솔이 발끈했다.
잠시 후.
양손을 꼭 맞잡고 정말로 기도하는 안솔을 보며 제갈 해솔은 낄낄 웃었고, 지켜보던 이들은 악취미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세계의 안솔이라면 가능하다는 말에 좀 놀라기는 했지만, 어쨌든 현재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쾅!
갑자기 누군가가 식당 문을 박차며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전령이었다.
“보고드립니다!”
얼마나 급하면 숨도 고르지 않고 외쳤다.
“뭔데?”
김수연이 고개만 돌려 물었다.
“도, 동부에서 그림자 여왕이 전언을 보냈습니다!”
“그림자 여왕?”
김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는 동부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였다.
그런 그녀가 전언을 보냈다?
“뭐라고 했는데?”
“좌표만 알려준다면 지금 바로 관리 중인 모든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겠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현 시간부로 동부는 남부 연합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그 순간.
“?”
제갈 해솔의 정수리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
“이해가 안 되는군.”
오직 어둠만이 들어찬 공간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홀로 권좌에 앉은 어둑한 형상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특정할 수 있는 외양은 머리에 돋은 두 개의 뿔과 세로로 쭉 찢어진 시뻘건 동공.
그랬다.
어둠의 정체는 바로 모든 악마의 왕, 사탄이었다.
“지금 바로 철수하라?”
두 손을 깍지 낀 사탄이 위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벨리알. 대계의 예언이 그리 말했다고? 정말로?”
방 안에 다른 누가 있기라도 한 듯 말을 건다.
“그, 그렇습니다.”
얼마 동안 정적이 흐른 후, 칠흑색 천장에서 당황한 음성이 울렸다.
“저도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지금 당장 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럼 제로 코드는?”
“손을 떼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주일 후 대계에서 직접 귀환 포탈을 열어줄 테니, 그 안으로 정리하고 돌아오라고…….”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나자, 목소리는 황급히 끊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상황이 이 정도로 유리한데 왜 철수하라는 거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일 년, 아니 육 개월만 더 있으면 제로 코드를 얻을 수 있는데…….”
“혹시 애틀랜타 공략에서 문제가 발생했나?”
“새로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사나흘 전까지 공략이 순조롭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어쩌시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강제 소환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사탄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계의 예언은 지금껏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심지어 직접 귀한 포탈까지 열어주겠다는, 드물게도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불복한다는 건 대계 전체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처사였다.
“……일단, 공략은 그대로 진행한다.”
“예?”
“예언을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돼. 명령 이전에 이해의 문제다.”
“하, 하오나!”
그러나 사탄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대계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애틀랜타에 관한 정보를 보고하도록.”
“그래도 대계의 예언이 이 정도로…….”
“대답은?”
“알겠습니다.”
말하는 동시에 천장에서 거무스름한 형상이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거의 웅크리듯이 허리를 굽히며 낮게 말했다.
“…모든 것은, 사탄의 뜻대로.”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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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계의 예언 → 사탄
모든 악마의 왕, 사탄에게 고합니다.
현재 홀 플레인에 진입한 모든 대 악마 및 악마 십사 군주는 2주 안, 즉 5/31까지 대계로 귀환할 것.
더불어 귀환 준비 기간 동안 전 활동을 금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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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계의 예언 → 사탄
귀환 준비 기간 연장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정확히 2주 뒤인 5/31까지, 자정에 열리는 포탈로 귀환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소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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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계의 예언 → 사탄
「5/31까지 귀환을 완료하라」 라고 말했으면 「5/30」자정에 포탈을 열겠다는 의미입니다.
5/30의 자정은 5/30의 밤 열두 시로, 31일이 시작되는 분기점이 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런 건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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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계의 예언 → 사탄
다른 마신이나 악마가 평소 언제, 어떤 시간에 포탈을 여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반례를 아무리 든다 한들, 정량적으로 논하지 않으면 의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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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계의 예언 → 사탄
어째서 그런 열의를 가지고 좀 더 빨리 제로 코드를 얻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명령이 모호했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5/30 자정에 열리는 포탈로 귀환하는 것으로 명령을 정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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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계의 예언 → 사탄
아직도 「5/30 자정」이 아닌「5/31 자정」까진가 아닌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반드시 30일 자정에 열리는 포탈로 귀환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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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계의 예언 → 사탄
사탄.
이번 통신에 고양이 시체 영상을 보낸 건 어떤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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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계의 예언 → 사탄
「내가 포탈을 연 순간에 파동 함수가 수렴하여 내부 상태가 정해지므로, 포탈을 열 때까지는 포탈이 열렸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알겠습니다.
방금 5/30 자정에 자동으로 포탈이 생성되도록 설정을 완료했습니다.
5/30 오후 12:00가 되면 자동으로 귀환 포탈이 열리므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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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계의 예언 → 사탄
적당히 좀 하죠.
5/30 오후 12:00 는 「대계를 기준으로」 한 시간이 아닌, 당연히 「홀 플레인을 기준으로」 한 시간입니다.
이건 상식 이전의 문제입니다.
진입 후 지금껏 홀 플레인 표준시로 활동한 주제에, 갑자기 대계의 표준시를 들먹이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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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계의 예언 → 사탄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현재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는 악마 및 마족의 과반수가 대계의 표준시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야행성 생활도 정도껏 하라고 생각하지만, 귀환은 홀 플레인 시간을 기준으로 5/31 오후 12:00까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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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계의 예언 → 사탄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무래도 베르그송의 시간론을 곡해하는 것 같은데, 주관적 시간이 어떻든 6/1 다음에 5/31 이 오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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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의 예언과 사탄이 통신 기록 中』
*
(원문은 동북대 아사카와 조교수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