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5
01044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항복 선언!
동부 연합이 남부 연합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상대가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공표는, 굉장히 갑작스럽고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령으로 소식을 접한 김수연을 비롯해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정도로.
그러니 ‘제갈 해솔의 수작이다.’, ‘함정이 분명하다.’ 등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부 연합이 산하로 받아들여 달라는 조건으로 내세운 조항은 의구심이 쑥 들어갈 만큼 파격적이었다.(사실 동맹이 아니라 스스로 산하라고 표현했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 굵직한 것을 몇 개 꼽아보면.
1. 동부 연합 전체는 십 강을 포함해서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남부 연합의 산하로 들어간다.
2. 동부 연합은 항복하는 즉시 관리하는 전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개방하고, 통제권을 남부 연합에 이양한다.
3. 동부 연합은 애틀랜타 활동에 관한 전권을 남부 연합의 지침에 따른다.
4. 남부 연합은 동부 연합 내 사용자 및 클랜 중 원하는 일부를 인질로 관리할 수 있다.
5. 남부 연합이 원할 경우, 동부 연합은 북부 연합에 선전포고 후 자력으로 전쟁한다.
6. 동부 연합이 상기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시 남부 연합은 산하 클랜의 안전을 보장한다.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동부 연합이 조건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그야말로 말도 안 나오는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동부로서는 더 굽히려야 굽힐 것도 없을 만큼 양보한 셈이다.
거기다 김수연이 허락만 해준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주요 인사들이 넘어가겠다는 말까지.
이러니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결국 입을 다문 게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항복은 당일에 바로 수리돼, 북 대륙과 애틀랜타의 워프 게이트 연결이 이루어졌다.
동부 연합 사용자들이 속속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워프 게이트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림자 여왕이 도착했습니다!”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김수연은 정말로 나타난 고연주를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넘어온 인원은 쉰 남짓.
최소한의 호위도 데려오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머셔너리 로드.”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고연주는 약 십 미터쯤 거리를 두고 깍듯이 인사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니 뒤의 인원도 전원 머리를 숙였다.
“급하게 요청했는데도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요.”
수천 명의 사용자에게 둘러싸였는데도, 항복을 말하는 고연주는 태도는 자못 당당했다.
“정말로 항복하는 거야?”
김수연은 한 손을 칼자루에 얹은 채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고연주는 싱겁게 웃으며 돌연히 손에 들고 있던 걸 던졌다.
철그렁, 자루 하나가 묵직한 소음을 내며 땅을 굴렀다.
“일단 현재 워프 게이트가 연결된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메모리아 스톤이에요.”
정하연이 재빨리 자루 안을 확인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김수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고연주는 품에서 통신 구슬을 꺼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북부에 선전포고를 하죠. 뭐 지금쯤 그쪽도 상황은 알아차렸겠지만……. 아니면 여기 있는 인원을 인질로 잡아도 좋아요.”
양손을 위로 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행동에 김수연은 미간을 좁혔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니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꿀꺽.
김수연의 목울대가 작은 고저를 그렸다.
테라 공략 방법을 들은 후 그녀는 남은 두 여왕을 회유하기로 결심을 굳혔었다.
그런데 그림자 여왕이 제 발로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뭣보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북부 연합은 이제 고립무원이라고 봐도 무방한 처지에 몰렸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모로 봐도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전후 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김수연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빙빙 에워싸 무기를 겨누고 있던 사용자들이 일제히 손을 거뒀다.
“좋아.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고연주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속으로 안도했다.
가만히 있으면 죽고, 북부 연합보다 늦어도 죽는 상황에서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담보로 도박을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은 상대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비무장으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건 생각보다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도박은 방금 가까스로 성공했다.
뒤통수를 맞기 전에 먼저 뒤통수를 친다.
이게 고연주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그때 김수연을 뒤따라가던 고연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왼쪽을 건너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시선을 느낀 제갈 해솔은 눈을 깜빡거렸다.
두뇌 회전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녀였지만, 현재 상황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장난으로 안솔을 도발했는데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어리둥절할 만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연주를 위시한 동부 인사들이 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지 궁금했다.
“뜻밖이네. 당신은 뭔 낯짝으로 여기 온 거지?”
화난 듯한 음성에 제갈 해솔이 멍한 낯빛을 비췄다.
고연주는 그 표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응. 그 얼굴 마음에 드네. 그러게 걸리지 말지 그랬어?”
“으, 응? 자, 잠깐만요?”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지만……. 당신이라면 워프 정도는 이미 준비했겠지.”
“아니, 저기요?”
“현실을 직시해. 봤을 거 아냐? 남부는 우릴 선택했고 당신의 저울질은 실패했어.”
“그러니까-.”
“입 닥쳐. 이 배신자.”
“……!?”
그 순간 제갈 해솔의 안색이 다채롭게 변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연주가 ‘이 배신자.’ 라고 외치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가, ‘아.’ 하는 얼굴로 가볍게 손뼉을 쳤다가, 이제 알겠다는 듯 오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망연자실한 낯을 지어 보였다.
표정 하나하나가 창졸간 스치고 지나가서 누구도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 둘? 갑자기 뭔 말을…….”
“하!”
김수연이 갸웃하며 뒤돌아본 찰나, 제갈 해솔이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말했다.
“예상도 못 했어……. 설마 항복이라는 조건을 내세울 줄은!”
김수연은 넌 또 뭔 말을 하느냐는 얼굴로 제갈 해솔을 바라봤다.
“흥. 이제 본색을 드러내네.”
반대로 고연주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어째서! 어째서냐고! 조금만, 조금만 더 있었다면……!”
“호호. 우리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나 봐?”
고연주는 분해하는 제갈 해솔을 보며 비웃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이제는 전쟁이야.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걸?”
제갈 해솔도 지지 않았다.
“……젠장, 멋지게 당했네?”
“아무렴.”
“하지만 그림자 여왕? 우리 북부 연합을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짖을 수 있을 때 실컷 짖으렴.”
숫제 이까지 갈며 독기 찬 원망을 쏟아낸 제갈 해솔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황급히 워프 능력을 사용했다.
펑 소리와 동시에 그녀는 물보라가 돼 흩어졌다.
살금살금 그림자를 늘어트리던 고연주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한편, 상황이 이쯤 되니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은 제갈 해솔이 방금 보인 행동의 진의를 깨달은 듯했다.
김수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김수현은 두 손을 뻗었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으니까.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
같은 시각.
이(異) 세계에서 넘어온 제갈 해솔이 아니라, 성스러운 여왕 휘하의 제갈 해솔은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중이었다.
두 눈은 탁상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깃 펜을 든 손은 쉬지 않고 뭔가를 그려나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쉴 틈 없이 움직이던 깃 펜이 뚝 정지했다.
동시에 제갈 해솔은 희열에 찬 탄성을 터뜨렸다.
“됐어!”
허리를 들어 올리니 커다란 탁자를 꽉 채우는 거대한 마법 진이 비로소 드러났다.
자기 자신이 그리기는 했지만, 그 복잡하고도 어마어마한 위용에 제갈 해솔은 가슴이 흥분으로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중간중간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제갈 해솔은 이것이야말로 정체 모를 사용자를 보내버릴 수 있는 비장의 무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진을 구상하는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였던가?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면서 가진 역량을 총동원한, 전력으로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구현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진을 발동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눈에 선히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전에서 생각대로 작동할지, 또 과연 먹힐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변수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
제갈 해솔은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동안 이걸 준비한다는 이유로 방 밖으로 일절 나가지도 않았었고, 누구의 출입도 엄금했었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했으니 이제는 나갈 차례였다.
제갈 해솔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열어젖혔다.
“?”
이윽고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문 앞에 늘어서 있는 북부 연합 소속 십 강 사용자들을.
또 몹시 슬픈 얼굴을 한 유현아를.
약간 침체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걸까.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뜬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덜미로 날카로운 창끝이 겨눠졌다.
흉흉한 기세를 풀풀 날리는 반다희가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정면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우리는-. 널 믿었어.”
“……네?”
“그러니까 설명해.”
실로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반다희의 음성은 쾅 폭발할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갈 해솔은 침착히 입을 열었다.
“설명은 뭔 놈의 설명이에요? 이제 겨우 완성했는데.”
“완성? 뭘?”
“마법 진이요.”
“마법 진?”
제갈 해솔은 방 안을 가리켰다.
힐끔 들여다본 반다희는 코웃음을 쳤다.
“아하. 아군을 날려 버릴 마법 진인가?”
“뭐라고요?”
“아니면 장거리 워프를 보조하는 마법 진일 수도?”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마침내 제갈 해솔도 언성을 높였다.
반다희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창대를 꼬나 쥐었다.
“지금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해?”
“왜요. 동부가 배신하기라도 했어요?”
다음 순간 반다희의 얼굴을 읽은 제갈 해솔은 불현듯 숨을 삼켰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진짜요? 왜?”
“진짜……. 끝까지 발뺌하시겠다.”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이 말한 반다희는 돌연히 푸른 구슬을 힘껏 던졌다.
구슬은 제갈 해솔의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이건……?”
“기록 구슬이에요. 동부에서 선전포고 겸 보낸.”
대답한 사용자는 유현아였다.
“어째서……. 어째서 멋대로 행동한 거예요?”
약간 비난하는 듯한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실제로 유현아는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울먹거리는 중이었다.
제갈 해솔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좀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에는 반문하는 대신에 구슬을 주워드는 걸 선택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비우고 천천히 마력을 흘려 넣는다.
잠시 후.
“어…….”
하염없이 영상을 보던 제갈 해솔은.
“……씨발?”
홀 플레인에 소환된 이후 처음으로 욕설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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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 로유진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