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6
01045 Omnibus – Sovereign Of Sword. =========================================================================
“아니야…….”
이럴 리 없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었다.
이 여자는 누구야?
왜 내가 저기 있는 거지?
설마 도플갱어?
잠깐만, 방금 워프 능력?
혹시 출현했다는 사용자가…….
하지만 남자라고 들었는데?
차곡차곡 정리해 뒀던 머릿속 생각들이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제아무리 제갈 해솔이라도 눈앞의 영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으니.
그때 목덜미를 꾹 짓눌러오는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에 제갈 해솔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반다희가 예의 독기 찬 눈으로 싸늘하게 직시하고 있다.
관자놀이에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그녀의 등골을 타고 쭉 흘러내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고 꺼낸 말이었다.
“제가 이 영상의 진위를 밝히는 건 불가능하지만, 함정이 분명해요. 왜냐면 전 근래 이 방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맞아. 거의 없기는 해.”
차승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중간에 두어 번 자리를 비우지 않았었나. 그중 한 번은 꽤 길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단 사실만 놓고 보자는 소리였다.
“그, 그건.”
제갈 해솔은 도로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분명히 자리를 비웠던 적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유현과 제갈 해솔이 출현했을 때, 또 한 번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확인차 나갔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느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 덕분이었다.
주위에 비슷한 능력을 갖춘 사용자가 한 명도 없으니 알리바이도 증명할 수 없다.
“자리를 비운 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확인할 게 있어서.”
“확인할 게 뭐였는데?”
“아니, 생각 좀 해봐요. 여기는 북 대륙이고 이 영상의 배경은 애틀랜타잖아요. 그 긴 거리를 제가 하루 이틀 만에 왕복했다는 건가요? 워프에도 한계가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거 아녜요.”
“글쎄? 그거야 모르지. 개인 어빌리티는 사용자 본인 외엔 아무도 알 수 없잖아?”
이미 배신자라고 낙인 찍기라도 한 듯 반다희의 말투는 자못 거칠었다.
제갈 해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변명하고 말고의 사건이 아니었다.
설령 해명한다고 해도 아군이 자신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의 계략인지는 몰라도 외통수에 제대로 걸렸다.
그때였다.
“믿어요.”
문득 당장에라도 목을 꿰뚫을 것 같던 예리한 감촉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두 손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에 제갈 해솔은 멍하니 눈을 떴다.
반다희를 밀어내고 다가온 유현아가 바로 앞에서 또렷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다.
두 눈동자는 신뢰라는 감정으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니!”
“조용히 해.”
반다희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으나 유현아는 낮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잘랐다.
“저는……. 당신을 믿어요.”
그 순간 제갈 해솔은 입을 짓씹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으나 한 마디 덕분에 혼란스럽던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군주가 믿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황은 어떻죠?”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제갈 해솔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좋지 않아요. 아니……. 몹시 나빠요.”
유현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영상을 보낸 동부 연합이 애틀랜타로 넘어가고, 고연주의 선전포고.
그리고 방금 동부가 관리하던 도시의 워프 게이트 연결이 모조리 끊어졌다는 것까지.
“제갈 해솔. 당신이 정말로 잘못이 없다면 그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나요? 결백이 밝혀지면 동부도 다시…….”
“아니요. 그럴 리는 없어요.”
설명을 듣던 제갈 해솔은 단칼에 부정했다.
“왜, 왜요?”
“간단해요. 제가 아는 그림자 여왕이라면 이런 영상을 보내거나 공식 발표는 하지도 않았을 테죠.”
손의 구슬을 바스러지듯이 쥐며 말을 잇는다.
“차라리 남부 연합과 은밀하게 연락하면서 조용히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뒤통수쳤다면 또 모를까?”
유현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말인즉 동부 연합은 애초 동맹을 깨고 싶어 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빌미가 생기니 얼씨구나 하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넘어간 거고.
적잖은 시간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유현아는 그동안 입을 뗐다가 닫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승산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상황이었다.
일말의 희망이 사라진 이상, 그나마 남아 있던 전의조차도 사그라졌다.
북부 연합 혼자서 두 연합을, 아니 남부 하나 감당하는 것도 버거웠으니까.
절망이 내려앉는 가운데 유현아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실은 방금 통신으로 소식이 왔어요. 남부 연합에서요.”
남부 연합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제갈 해솔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거기서? 뭐라는데요?”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대화를 하고 싶대요.”
“그 폭군, 아니 김수연이 그랬다고요?”
“네. 제가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그랬어요.”
“이슈는?”
“북 대륙 내전의 종결. 즉 악마를 상대로 동부, 남부, 북부의 동맹과 테라 진군 계획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유현아는 스스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갈 해솔.”
그러더니 반쯤 포기한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
“받아들일 거야.”
애틀랜타.
“반다희라면 모르겠지만, 북부 연합의 실권은 제갈 해솔이 잡고 있을 거거든.”
고성.
“그러니까 조건을 걸지는 몰라도 어쨌든 받아들일 거야. 애초 승산 없는 게임은 하지 않는 사용자니까.”
낡은 방 안에서 김수현의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망의 셔츠와 치우천왕의 갑옷을 입은 후 탁상의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새끼 카오스 미믹은 얌전히 붉은 달의 망토와 라실라스의 축복을 뱉었다.
커다란 손이 착하다는 듯이 살살 쓰다듬어주니 “삐이-. 삐이-.” 교성을 토하며 몸을(상자를) 부르르 떨었다.
“게임이라.”
흥미롭게 지켜보던 김유현은 피식 웃었다.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하긴. 아까 제수씨 보니까 확실히 즐기는 표정이더라. 난 봤지.”
“하여간 성격 이상해.”
철컥.
왼 손목에 팔찌를 찬 김수현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 네 아내다.”
“형은 몰라서 그래. 그녀가 내 애를 임신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솔직히 충격이었다고.”
망토를 질끈 동여매고 다시 상자를 건드리자, 새끼 카오스 미믹의 좁은 구멍에서 오벨로 기사 부츠가 울컥 토해졌다.
“그래도 제수씨 덕분에 일은 쉬워졌잖아?”
“그렇기는 해.”
부츠 안으로 발을 집어넣던 김수현이 주억거렸다.
“하지만 칭찬해주지는 못하겠어.”
“왜?”
“여기는 우리 세계가 아니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고 멋대로 깽판 치는 건 용납 못 해.”
“이후를 생각하자는 말에는 극구 동의하지만, 따지고 보면 너도 할 말은 없지 않나?”
“전혀. 형. 내 상대는 악마였어. 인간이 아니라.”
“어……. 그건 그렇지.”
갑자기 낮아진 음성에 김유현은 찔끔했다.
악마에 대한 증오는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김수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최대한 좋게 해결할 거야.”
“뭐, 나쁠 것 없지.”
“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해. 사실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해보고 싶었거든.”
“……그 여자랑?”
멈칫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낯에 미미한 그늘이 졌다.
하기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알고 있어요. 지금 와서 이런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꼭, 죽였어야 했나요?’
제로 코드가 그랬었다.
성후를 품었었다면 네 목적에 부합하는 좀 더 좋은 미래가 그려졌을 거라고.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저는 그냥, 당신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역시 이해할 수 없어요.’
김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가슴 한 켠에서는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봐요. 처음 보는 사용자가 다짜고짜 살기를 뿜는데, 제가 어땠을 것 같아요?’
‘무조건 죽여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나요?’
언젠가 들었던 고연주의 말은 뼈저리도록 공감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랬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어째서 꼭 죽여야 한다는,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살의를 품었었던 걸까?
그림자 여왕을 품었던 것처럼.
우정민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유현아도 그럴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시도를 해볼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설령 겉으로는 좋은 사람을 연기하며 속으로는 이용할 생각을 했을지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알고 싶었다.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이제 곧 있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가자.”
마지막으로 귀걸이 화한 빅토리아의 영광을 왼쪽 귀에 걸고, 무검은 허리춤에 찬 김수현이 몸을 돌렸다.
탁상에 걸터앉은 형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김유현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역시 넌 그 모습이 어울려.”
잠깐의 침묵 후,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내 두 사내는 같이 방문을 나섰다.
하얀 구름이 흐르는 아침 하늘은 맑고 조용했다.
생각보다 준비에 시간이 걸린 탓에 김수현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철그렁거리는 소음이 울리자, 일 층에서 기다리던 인원 전원이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김수현이 모습이 드러났을 때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다음 순간,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술렁술렁하던 장내가 갑자기 적막해졌다.
‘우리 남동생의 사용자 모습은 어떨까?’ 라며 한껏 기대한 김유연이 손에 숨겼던 기록 구슬이 떨어진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맵시 있게 잡아챈 김수현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구슬을 내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난 김유연은 느닷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기어들어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사……. 합니다.”
갑작스러운 존대에 김수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아. 준비는?”
“다, 끝났어……. 요.”
사슴 같은 목덜미는 시시각각 붉어졌다.
“그럼 가도 되겠네요?”
“네……. 좋아요…….”
김유연은 새색시처럼 김수현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완전히 풀려 버린 눈을 한 채 어깨에 살그머니 고개를 기댔다.
“우리도 갈까?”
김유현은 빙긋 웃으며 김수연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점차 멀어지는 김수현의 등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수연아?”
김유현이 손바닥을 휘휘 흔들며 시야를 가리자, 김수연은 귀찮다는 듯이 그 손을 탁 쳐냈다.
“자, 잠깐만!”
그러더니 서둘러 김수현을 뒤쫓았다.
“나도!”
“으, 응?”
“나도 같이 가!”
“그, 그래.”
김유현은 떼를 쓰며 남은 한 쪽 팔을 차지하는 김수연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응시했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그는 전신을 엄습하는 강렬한 배신감을 느꼈다.
“아…….”
‘안 도와줘!’ 라고 외칠 뻔했으나 체면을 생각해 간신히 삼켰다.
아랫입술이 닭 부리처럼 삐쭉 튀어나오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젠장, 여동생 키워 봤자 다 소용없어.”
잠깐 여동생으로 기울었었던 마음이 다시 남동생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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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를 보면 이 시간에 업데이트하냐며 놀라시는 독자분들이 자주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독자분들이 더 놀랍습니다.
어떻게 새벽에 올리자마자 읽고 코멘트까지 남겨주시는 분들이 계시는지…….
기분이 묘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