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49
01048 Omnibus – Sovereign Of Sword(完). =========================================================================
회의실에 전원이 착석한 순간 장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유현아, 차승현, 반다희, 제갈 해솔, 공찬호, 차소림, 백한결.
맞은편으로 김수현, 김수연, 제갈 해솔, 김유현, 김유연.
적막이 길어질수록 방 안에 흐르는 공기도 서서히 무거워졌다.
꼭 일생일대의 수술을 앞둔 수술실의 고요한 긴장감을 보는 것 같달까.
하긴 오늘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끝 간 데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을 깨트린 사용자는.
“역시.”
이(異)세계의 제갈 해솔을 직시하는, 원(元) 세계의 제갈 해솔이었다.
“당신이었군요. 동부와 북부 사이에 돼먹지도 않은 수작을 부린 범인이.”
언뜻 듣기로는 비난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포석이 깔린 말이었다.
그 의도를 깨달은 이상, 이세계의 제갈 해솔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맞아요. 그런데요?”
일부러 밝게 대답하니 원 제갈 해솔의 눈꼬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하……. 그런데요?”
“네. 뭐 당한 년이 병신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설마 따지시게요? 내가? 아니, 당신이?”
중간에 말을 바꾼 건 실수가 아니었다.
일부러 그랬다.
왜냐면 당신이라 함은 곧 자기 자신을 뜻하니까.
‘어쩌라고?’ 라는 것처럼 상대가 자존심을 긁어오자, 원 제갈 해솔은 은근하게 웃어 보였다.
“흐. 우습네요. 그게 지금 대화하자고 찾아온 사람의 태도인가요?”
“그쪽이야말로 처지는 자각하는 사람의 태도일까나?”
“뭐라고요?”
“왜 언성을 높여요? 틀린 점 있으면 반박 바라요.”
어깨를 들먹이며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는 이세계의 제갈 해솔을 보며 김수연과 김유연은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동일한 사람이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광경도 생소했지만, 예전에 대화할 때마다 사람 속을 긁었던 제갈 해솔이 같은 팀이 되니 조금이지만 고소한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구경하고 싶었으나, 오늘 억지로나마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명백하다.
상대 진영에서 제갈 해솔의 권한을 가늠해보면 신경전을 더 끌어 봤자 좋아질 게 없다고 판단, 김수연은 손을 들어 이세계 제갈 해솔의 말을 멈추게 했다.
“말싸움이나 하자고 온 거 아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그러자 이를 갈던 원 제갈 해솔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눈을 돌렸다.
“들어갈 필요도 없어요.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숙이고 들어오라는 거잖아요?”
“내 말이 그렇게 전달됐어?”
“말이야 동맹이지만, 어쨌든.”
“……좋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대놓고 빈정거리는 투였다.
그러나 김수연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화하자고 한 거야. 난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답이 올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이제 며칠이나 지났다고?”
“뭐?”
“어머. 동맹 제의를 받았다고 우리가 덥석 물 정도로 그동안 정다운 사이도 아니었고. 또 이 갑작스러운 사태 속에서, 느닷없는 동맹 요청 상황의 가운데,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우리 수뇌부의 수고는 생각도 안 하셨나 봐요?”
원 제갈 해솔이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천연덕스레 놀랐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김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진영에는 당신을 증오하는 사용자도 상당수라고요?”
“……알아.”
“뭐 공공연한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우리가 왜 바로 답을 하지 못했을까요? 혹시 그동안 북부 연합 내부의 의향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이구나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
“딱히 싫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일련의 이해 못 할 일들을 어찌어찌 덮고, 내부 인원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멋대로 쳐들어오는 행동이 동맹 성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었다.
한편, 이세계 제갈 해솔은 아까부터 김수연의 어깨를 은근슬쩍 툭툭 건드는 중이었다.
갑갑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한 게 말할 기회를 달라는 행동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김수연은 가만히 있었다.
“아니면.”
그러는 동안에도 원 제갈 해솔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설마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신 건……?”
몰아가려 한다.
그렇게 생각한 김수연은 차분히 가슴을 추슬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 제갈 해솔은 계속 ‘강제’라는 단어를 핵심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 하고 있었다.
분하지만, 사실 이 상황에서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여기서 대화가 성립되려면 상대의 오해를 풀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김수연은 스리슬쩍 옆자리를 돌아봤다.
그러나 김수현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대화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일절 관련 없는 참관인처럼 말이다.
결국, 김수연은 아껴둔 패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부인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 말이 주된 이유는 아니야.”
“그럼요?”
“급하니까.”
“급하다?”
제갈 해솔은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 난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 당신이 필요해. 잘만 되면 악마를 물 먹일 수도 있거든.”
김수연은 마침내 테라 공략에 숨겨진 비밀을 꺼냈다.
상세한 설명을 들은 북부 진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만 된다면 악마라는 거대한 골칫거리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남자는 우리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앞서 정상에 오른 사용자야. 믿어도 좋아.”
김수연의 덧붙임에 온 시선이 김수현에게로 쏠렸다.
진짜냐는 눈초리에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응. 확실히…….”
제갈 해솔은 멍해 보이는 눈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 진지한 얼굴에 김수연은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야. 사탄이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리가 빠르게 행동해야 해.”
“맞네요. 사실이라면.”
“그럼.”
“하지만~.”
그때 제갈 해솔이 갑자기 말을 반전했다.
동시에 한쪽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그게 우리가 꼭 동맹을 맺어야 하는 이유는 안 되죠.”
“뭐? 어째서!”
윤이 흐르는 긴 머릿결이 순간적으로 찰랑거렸다.
김수연이 탁자를 짚고 거칠게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도 제갈 해솔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당신의 사정과 우리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요.”
‘그것도 모르냐?’ 는 어조에 김유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서 남부 연합의 최대 무기는 북부 연합이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 있었다.
물론 테라에 관한 비밀은 꼭 해야 할 이야기였지만, 애초 꺼내는 게 너무 일렀다.
이래서야 상대가 동맹이 꼭 필요하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네를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는 건더기만 준 셈이다.
“너흰-.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눈을 날카롭게 치뜬 채 하는 말에는, 마디마다 분노가 서려 있었다.
“중요한 비밀을 숨김없이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터럭이 올올이 곤두서는 듯하자, 차승현이 침착하게 나섰다.
“그렇지만 동맹 안건에 관해서는 저도 제갈 해솔과 같은 의견입니다.”
김수연은 잡아먹을 듯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왜? 설마 아직도 서 대륙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글쎄요. 분명히 그때는 머셔너리 로드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나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이상, 왜 그랬었는지. 왜 그랬어야 했는지 조금이지만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차승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김수연은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그때 보였었던 행동입니다.”
“행동?”
“마지못해 동의하는 척하고. 우리 의견에 따르는 척하면서 끝에 가서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심지어 그때나마 당신을 믿었었던……. 우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
정중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김수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우물거렸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때는 이때라는 듯 반다희도 싸늘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네가 왜 폭군이라 불리는지 이 자리에서 낱낱이 밝혀줄까?”
“한두 개가 아니죠.”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만행이죠.”
한 번 손가락질이 시작되자, 비난은 곧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지탄은 비난으로.
비난은 원성으로.
원성은 아우성으로.
그리고 아우성이 소란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책망 속에서 김수연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내 조금이지만 고개가 떨궈졌다.
왜일까?
당장에라도 소리치며 반박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하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돌연히 알몸으로 발가벗겨지는 감각이 엄습했다.
뭣보다 이 두 남자 앞에서 부끄럽고 창피하다.
하지만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그저 미미하게 떨면서 애꿎은 주먹만 바스러지듯이 말아 쥘 뿐.
그리하여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일촉즉발로 치닫는 순간-.
“그만!”
소란스럽던 공간을 순식간에 정리한 건 놀랍게도 유현아였다.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과열된 점……. 사과드릴게요.”
좌우를 번갈아 둘러본 후 천천히 목을 숙인다.
그러더니 진정된 얼굴로 김수연을 마주했다.
“알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머셔너리 로드의 말을 따르는 게 옳다는 건.”
드디어 성스러운 여왕이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적잖이 놀랐네요. 이 정도의 비난을 들었는데도 당신이 가만히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상냥히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필요에 의해서야.”
김수연은 의자에 도로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필요.”
반대로 유현아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이번 안건의 본질이며 머셔너리 로드의 진심이기도 하죠.”
“필요하니까 동맹을 맺는다. 이게 나쁘다는 거야?”
그러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던 유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나쁘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럼?”
“하지만 완전하지도 않죠.”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건데?”
서슬 퍼런 반문에 유현아는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지그시 손을 얹었다.
“그건-. 진정성이에요.”
“진정성이라.”
김수연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거야. 이 세상에서는.”
“여전하시네요. 홀 플레인이니까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은.”
“설교는 관둬. 여기까지 와서 또 다투고 싶지 않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두 군주의 가치관은 상극이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서로 좁혀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하나만 물을게요.”
유현아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머셔너리 로드가 우릴 이용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요?”
‘이번에도’를 강조한 단도직입이었다.
김수연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유현아는 약간 서글픈 빛으로 바라봤다.
“당연히 없겠죠. 필요해서 맺어진 동맹은 필요가 다하는 순간 의미도 사라지니까.”
말인즉.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어요.”
라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김수연이 포기한 얼굴로 어깨에 힘을 빼는 순간이었다.
고즈넉하던 방 안에 얼핏 조용히 웃는 소리가 흘렀다.
범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옆에 앉은 김수현이 소리 죽여 웃고 있었으니까.
짝, 짝, 짝, 짝…….
거기다 가볍게 손뼉을 치기까지.
서먹하던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김수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역시 성후라고 해야 하나.”
이어지는 혼잣말에 유현아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롭니다. 아,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성스러운 여왕으로 각성한 당신의 말을.”
담담히 말한 김수현은 바로 눈을 떼며 맞은편을 둘러봤다.
“뭐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해 봤자 무의미할 것 같은데…….”
이윽고 김수현은 가볍게 자리를 박찼다.
두 손으로 탁상을 짚고 상체를 비스듬히 숙여 상대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아무튼, 결론은 동맹은 할 생각이 없다고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습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에 유현아는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단순히 일어섰을 뿐인데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유현아의 낯빛에 긴장이 역력해지자, 맞은편의 제갈 해솔이 서둘러 나섰다.
“그렇다면요?”
태연함을 가장하기는 했으나 한없이 도발적인 대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제껏 가만히 구경만 하던 김유현은 처음으로 마음이 조여지는 걸 느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요동친다.
일련의 대화는 서로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만 했을 뿐, 성과는 전혀 없었다.
실제로 김수연은 거의 체념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김수현은 어떻게 매듭을 풀어나갈까?
대화를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쉽게 가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고연주가 없다고 해도 김수현이 조금만 움직이면 북부 연합을 와해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 강력하던 코란 연합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너트린 전력도 있으니.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
유현아가 필요한 건 맞으나 꼭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막말로 이 자리에 있는 북부 연합 사용자를 죄다 쳐죽이고, 성스러운 여왕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데려가면 된다.
그래.
예전의 김수현이었다면 분명히 그러한 방법을 선택했을 터.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믿자.
믿어야 한다.
입속말로 되뇐 김유현은 땀이 흐르는 손바닥을 로브에 닦으며 온 신경을 남동생에게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김수현은 싱긋 웃어 보였다.
“좋습니다.”
다음 순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무심하던 얼굴빛이 창졸간 차가워졌다.
두 눈동자는 야수와 같이 희번덕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전쟁, 합시다.”
김유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작품 후기 ============================
이제 3편 정도 남았네요.
오늘 내용은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부디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저는 이틀 뒤 강한 탄산을 지닌 사이다를 들고 찾아 뵙겠습니다.
독자님들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