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1
01050 Omnibus – Sovereign Of Sword(完). =========================================================================
회의실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밖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 성 입구까지 겹겹이 둘러싼 상태였다.
김수현을 막는 데 실패한 북부 연합의 사용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당장에라도 회의실로 뛰어들어갈 듯한 이도 몇 명 보였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대기하는 기조였다.
왜냐면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의문의 사내가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일부러 손을 썼다는 걸.
그리고 들어가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작지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안 그래도 문만 뚫어지라 바라보던 눈초리들이 보다 강렬해졌다.
잠시 후,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약간 힘없는 얼굴로 나타난 여인은 바로 유현아였다.
노심초사 기다리던 클랜원들은, 걱정하던 클랜 로드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한편, 긴장이 한층 치솟는 걸 느꼈다.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또 어떤 결론이 내려졌을까?
여러 의문이 담긴 시선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유현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호흡을 가다듬어 가슴을 추스르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 쌍의 눈초리와 어렵사리 마주한다.
“여러분.”
성스러운 여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
남부와 북부의 동맹!
폭군 김수연과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가 손을 잡았다는 발표는, 북 대륙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여파는 뜻밖에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분명히 충격적인 뉴스는 맞으나 소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비교적 무던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래도 북부 연합이 받아들였네?’ 나 ‘역시 굴복했나.’ 정도.
하긴 동부 연합이 돌아섰을 때부터 전력 균형이 크게 무너졌으니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북 대륙은 다시 하나로 모였다.
동시에 지겹게도 이어졌던 춘추 전국 시대도 끝을 고했다.
신 대륙 애틀랜타가 발견된 이상.
또 악마라는 거대한 공공이 적을 상대한다는 명분이 있는 만큼 서로 힘을 합치는 건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김수연이 앞서 들어온 동부 연합은 물론, 북부 연합도 제대로 동맹으로 대우했다는 점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하하 호호 웃는 정다운 분위기를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수년 동안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을 듯이 싸워온 사이니까.
그것은 테라로 진군하기 전 친목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열린 축제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역시 괜히 했나.”
태양이 저문 저녁.
을씨년스러운 축제 분위기를 보고 있던 김수연이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애틀랜타 내성 전부를 사용할 정도로 대규모 축제였지만, 서로 힐끔거리기만 하며 상대 진영의 사용자에게는 일절 말도 붙이지 않는다.
손에 쥔 잔을 떨어트려 쨍그랑 소리가 나면 곧바로 무기를 들고 아비규환의 혈투가 일어날 것 같은 공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축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전쟁 전의 최후의 만찬에 가까웠다.
옆에 서 있던 유현아는 쓰게 웃음 지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속에 쌓인 앙금을 풀고 싶으나, 이번처럼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은 찾을 수 없다.
그래.
아무리 그 남자라도 이것만큼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불현듯 김수현을 떠올린 순간, 유현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돌렸다.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초연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선을 빼앗기게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유현아는 몸만 비스듬히 돌린 채 한참 동안 손만 꼼지락거렸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강제한 장본인.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사용자.
그리고 그 세상에서 자신을 죽였다고 당당하게 선포한 남자.
여러 복잡한 감정과 호기심이 속에서 교차한다.
테라 진군은 수만 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제갈 해솔의 워프 능력을 주 이동 수단으로 삼는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인원과 네 지대를 통과하는 필요한 인원만이 동행한다.
사실상 김수현이 있으므로 실행 가능한 계획이었다.
검의 군주가 있는 이상 누가 나타나든 거리낄 게 없으니까.
여하튼 아무리 늦어도 일 주일 안으로는 공략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나마 말을 편하게 붙일 기회도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
왜일까?
다가가고 싶어도 저 남자의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몸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특히 무감정한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면 등골에 차가운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그 이유 모를 위화감이 유현아를 망설이게 하는 중이었다.
다음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골이 비치는 옷을 입은 김유연과 아예 헐벗은 한소영이 스리슬쩍 접근하려는 게 시야에 잡혔다.
그러자 어디서 용기가 솟아났는지 유현아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과감하게 김수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저히!”
악, 돌연히 새된 비명이 울렸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혀를 씹고 만 것이다.
“……?”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당황하는 유현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김수현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스쳤다.
“우……. 하, 하 마이 이어허…….”
‘할 말이 있어서’ 라고 해석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예.”
김수현이 말했다.
김 씨 자매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딱딱한 태도였다.
성후도 아주 바보는 아니라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아 대하하는 게 시으세요?”
일단 혀 씹은 것부터 어떻게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김수현은 가까스로 참았다.
“뭐 하실 말씀 있습니까?”
“네, 네. 있잖아요. 원래 세계에서 절 죽이셨다고 하셨는데…….”
김수현의 얼굴빛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혹시 제가 뭔 잘못이라도 해서……?”
사내는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잔만 기울였다.
그러나 여인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자, 몹시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세계, 그러니까 다른 세계의 유현아입니다.”
“네, 네.”
“그런데 굳이 궁금해하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제가 잘못한 거면 대신 사과라도 할까 해서…….”
약간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김수현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 묘했다.
많이 변했다고 여겼는데, 유현아를 향하는 짜증이라는 감정은 악마를 대하는 것처럼 그대로였다.
여관 사건이 떠올리기 불쾌한 점도 없잖아 있지마는.
아무튼, 예전처럼 돌아가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으니까요.”
상관하지 마라.
단호한 대답에 유현아는 울상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다니까요.”
“네…….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 진짜.”
김수현은 이마를 짚었다.
“거참 너무하네. 좀 말해줘도 되잖아?”
그때 보다 못한 반다희가 소리쳤다.
이미 술을 됫박으로 퍼마셨는지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김수현의 입이 비뚜름해졌다.
“따지고 보면 네 탓이기도 하지.”
“뭐야?”
“네가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내 동료를 죽이려고 했거든. 그것도 갓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한 병아리들이었는데.”
“어……. 그, 그러냐?”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기는 했지만.”
“뭐야?”
반다희는 주춤했다가 벌컥 화내기를 반복했고, 차승현은 서둘러 그녀를 끌고 나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는지 유현아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서로 조금만 이해했다면 어쩌면 친하게 지냈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우연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죽기 전 ‘단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라고 부르짖었던 유현아의 외침이 김수현의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다중 우주 세계에서 봤었던, 유현아가 자기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장면도 떠올랐다.
“뭐……. 그랬을 수도 있겠죠.”
마지못한 긍정.
“그렇죠!?”
유현아는 주인의 쓰다듬을 받은 강아지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김수현은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이만 건설적인 이야기 좀 해보는 게 어떨까요? 가령 테라를 공략한다고 해도 악마가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눈치 빠른 정하연이 적절한 시점에 말을 끊었다.
“저는 사실 수현 씨가 좀 더 도와줬으면 하는데~.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요.”
빠른 말로 화제를 돌린다.
“중요한 정보는 이미 김수연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북 대륙이 힘을 합쳤으니 사탄도 가볍게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요.”
완곡한 거절.
사실 악마 진영의 세력을 깎고, 북 대륙을 억지로나마 화해시켰는데 여기서 더 해달라고 하는 게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거절하면서도 도리어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귓전에 흐르는 부드러운 음성에 유현아는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
“그래도 사탄 정도는 잡고 가주면 좀 더 일이 편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 순간 낭랑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제갈 해솔이었다.
“저보고 남 대륙까지 가라는 겁니까?”
“아니요? 이 자리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저 제갈 해솔이 아내인가 아닌가 심각히 고민하던 김수현은, 그 말에 언뜻 눈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네. 무조건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어떻게요?”
“이 사람 좀 봐. 벌써 잊었어요? 사용자 김수연이 칠 년 차라고 하니까, 지금쯤 그것도 사용자 상점 목록에 있을 거 아녜요.”
제갈 해솔은 주위를 돌아봤다.
“마침 사람도 많으니 GP 걱정도 없고. 부족하면 당신 거 쓰면 되고.”
그러더니 한창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안솔을 덥석 붙잡아서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에?”
“뭣보다 가장 중요한 복덩이도 있잖아요. 거기다 기적까지 곁들이면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아요?”
그 순간 내려달라고 바동거리는 안솔을 보던 김수현이 아차 했다.
비로소 제갈 해솔이 하려는 말을 깨달은 것이다.
GP를 소모하는 만큼 밑져야 본전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래도 악신까지 소환할 정도니……. 하긴, 확실히 악마쯤은…….”
한동안 중얼거리던 김수현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이채를 뗬다.
“……해볼까요?”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럴까요?”
제갈 해솔은 싱긋 웃었다.
*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탄의 시뻘건 동공이 쭉 찢어졌다.
발 밑으로는 모든 악마의 왕이 수 년간 공 들이고 공들여 이룩해놓은 결실이 펼쳐져 있었다.
악마, 마족의 군세, 세뇌가 완료된 인간 사용자, 타락한 요정…….
그 외에도 홀 플레인 전역에서 집합시킨 군대가 도열한 광경은 장관이라 봐도 좋을 만큼 진풍경이었다.
“흐흐, 흐흐흐흐…….”
이 정도의 전력을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던가?
애틀랜타로 보냈던 칠 대 악마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는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니까.
대계의 예언이 계속 돌아오라고 명령하지만, 괜찮다.
모든 것은 결과로 보여주면 되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대계가 그토록 염원하던 제로 코드가 손에 들어온다.
악마의 눈에 천계의 멸망이 벌써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감상은 여기까지.
이변이 발생한 이상 사탄은 넉살 좋게 여유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이쪽도 차곡차곡 쌓아온 비밀 무기를 보여줄 때가 됐다.
생각을 정리한 사탄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헤아릴 수 없는 군대를 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전군-. 들어라.”
사악하면서도 웅혼한 음성이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이었다.
막 입을 열려는 사탄의 정수리 위로 갑자기 흰 마법 진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다음 순간, 사탄이 찬란한 빛살에 뒤덮이는 것과 말을 잇기도 전에 허공의 진에 빨려 들어가듯 자리에서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야말로 창졸간 벌어진 일.
“…….”
사탄은 찰나의 순간 뒤바뀐 주변 풍경을 침착히 둘러봤다.
강제 이동에 놀라기는 했으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미숙한 존재는 아니었다.
단지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와 비릿한 피 내음이 약간 거슬릴 뿐.
특히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수많은 괴물의 시체가 보인다는 점이 이상했다.
개중에는 메두사나 바실리스크 등등, 꽤 강력한 괴물도 여럿 끼어 있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쓰러진 괴물의 숫자에 비례해 땅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처음 보는 네모난 상자들…….
거기까지 확인한 사탄은 마침내 머리를 들었다.
“?”
이어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겹겹이 포위망을 구성한 북 대륙 사용자들과 번쩍거리는 무기의 향연을.
잠시 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김수연을 확인한 순간 사탄의 얼굴도 멍해졌다.
그리고 말했다.
“어?”
============================ 작품 후기 ============================
실은 본편에서 괴물 소환 상자라는 설정을 등장시켰을 때부터,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사탄아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