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2
01051 Omnibus – Sovereign Of Sword(完). =========================================================================
그리하여 ‘모든 악마의 왕’ 사탄은 ‘괴물 소환 상자 4’로 인해 허무하게 소멸했다.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진 악마의 군대는, 사탄의 행방이 묘연해 짐에 따라 거대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휘하 권속 또한 사라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홀 플레인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전력이 순식간에 와해해 버린 것이다.
그와 반대로 북 대륙은 여유가 넘치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축제가 끝난 다음 날.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 열 명 남짓한 인원은, 두 제갈 해솔 덕분에 원정이 아니라 소풍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하루에 어마어마한 거리를 이동하면서 중간에 마력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쉬게 되면, 식사하거나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유의미한 일이 하나 있었다면 김수현과 유현아의 관계가 조금이지만 개선됐다는 것이었다.
유현아는 틈이 날 때마다 김수현에게 접근해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그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유유한 화법은 김유연마저 인정할 정도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듯이 김수현도 전처럼 마냥 대놓고 불편한 태도를 드러내는 일이 적어졌다.
가끔은 유현아의 말을 경청하며 깊은 고민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 가운데, 테라까지의 여정은 애초 예상한 대로 일주일도 안 돼서 서서히 끝이 보였다.
중앙 지역에는 광범위한 법역이 쳐져 있었으나 조건을 갖춘 이상, 김수현이 호언장담한 대로 공략은 식은 죽 먹기였다.
기둥을 발동시키고,
법역 안으로 들어가,
네 지대를 지나서,
약속의 신전을 발견하기까지.
김수연이 제로 코드를 획득하고 돌아오는 데는 네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지 않고 형과 누나, 그리고 아내와 기다리던 김수현은 불현듯 조용하던 공기가 여러 발소리로 흔들리는 걸 느꼈다.
희끄무레하던 법역이 어느새 해제돼 맑은 창천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다.
이내 발걸음 소리가 뚝 멎어 주위는 다시 그윽하게 고요해졌다.
갑옷을 툭툭 털며 일어선 김수현은 몸을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다섯 여인이 푸른 하늘을 등진 채 걸음을 멈춰 서 있다.
그 중심에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김수연이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은 희게 빛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어둡게 느껴졌다.
“설마 실패한 건?”
김유연의 물음에 김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손에 쥔 푸르게 빛나는 구슬을 천천히, 느릿하게 앞으로 들어 올렸다.
“……가져왔어.”
문득.
휘이이잉!
센 바람이 불었다.
김수연의 긴 생머리가 나부끼는 깃발처럼 펄럭거릴 만큼, 그리하여 살짝 찡그린 두 눈이 가려질 정도의 강한 바람이었다.
– 네가 말한 게 저 인간들인가?
날아가 버릴 듯한 강풍 속에서 웅혼한 울림이 울렸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걷어내던 김수연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널 만나면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김수현이 말했다.
– 맡겨놓은 것처럼 말하는 건 거슬리지만…. 괜찮겠지. 너희가 빨리 떠날수록 이 세상이 안정되니까.
약간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맞는다는 소리였다.
– 그럼 바로 집행하려고 하는데. 상관없나?
한 시라도 빨리 돌려보내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듯한 말투.
김수현은 형과 제갈 해솔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다시 앞을 응시했다.
“가야겠지.”
마침내 약속된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김유현과 제갈 해솔이 넘어오기 전에 한 번 겪었었던 시간이다.
그러나 김수현이 긍정한 순간 사위는 까닭 모르게 적막해졌다.
두 남녀의 사이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진한 아쉬움을 담은 공기가 울렁거렸다.
비록 흐르는 방향은 일방적이었지만…….
정말로 헤어진다고?
이대로?
“저요.”
김수연이 생각한 순간, 제갈 해솔이 손을 들어 미묘한 침묵을 깨트렸다.
“저 먼저 보내줄 수 있어요? 전 이런 상황에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괜찮죠?”
“아……. 그럴래요?”
김수현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내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으니 굳이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 어려울 것 없다.
이윽고 제로 코드의 담담한 음성이 울린 순간이었다.
구슬의 푸른빛이 한층 강렬해지는 동시에 제갈 해솔의 전신이 창졸간 새하얀 빛이 휩싸인다.
팟!
느닷없이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제갈 해솔은 반짝거리는 입자로 변해 흩날렸다.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남은 건 공중에 점점이 흩날리는 빛 가루뿐.
무언가 대단한 걸 기대했던 김유현은 김샜다는 얼굴로 동생의 어깨를 짚었다.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수연을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 여기까지 오면서 인사는 미리 했지만.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그리고 수연ㅇ…….”
뭐라 이을 말이 있는 듯했으나.
팟!
다음 순간 김유현도 제갈 해솔처럼 찰나에 입자로 화해 사라졌다.
제로 코드가 멋대로 판단하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내 버린 것이다.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손 쳐도,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려던 김유현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세 명은 이 세상에서는 불청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오, 오빠!”
반사적으로 내뻗었던 손은, 허무하게 녹아내리는 빛무리를 보고 힘없어 떨어졌다.
김수연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무슨 짓이야!”
– 응? 뭐가 문제지?
“왜……!”
– 아까 말하지 않았나. 저 세 명은 원래 이곳에 있어서 아니 될 존재. 거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저들이 순순히 돌아가겠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래도.”
– 어차피 너희가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방금 말대로 이제 다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데…….
“잠깐 말 정도는 나눠도 괜찮잖아…….”
말소리는 점차 흐릿해졌다.
김수연의 입술은 꽉 깨물려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빨리 끝내도록. 내 심정을 솔직히 말하라면 저 존재가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서둘러 보내 버리고 싶거든. 앞선 두 명은 그렇다 쳐도, 눈앞의 인간은 내가 강제할 수 없는 존재다.
머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생각보다 후한 평가에 김수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였다.
“못 보내!”
찌를 듯한 고성을 외친 김유연이 갑자기 김수현에게 달려들었다.
“싫어! 싫어어어! 약속했잖아! 보살핌 받고 싶다고, 내가 보살펴 줄 거라고 했잖아! 가지 마! 아니, 안 보낼 거야!”
“누, 누나.”
“그냥 여기서 살자. 응? 언니, 아니 누나가 진짜로 잘해줄 게. 응? 수현아? 그럴 거지?”
“누나.”
“가, 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할 게. 그냥 잠깐만 있어 보렴. 제로 코드를 사용해서 두 세계를 잇는 방법도 있잖아? 아니면……!”
“……보내주실 거죠?”
단 한 마디였다.
그 순간 김유연은 김수현의 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거의 생떼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일대가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했다.
살짝 한숨을 내쉰 김수현은 김유연을 토닥거리며 눈을 들었다.
이내 머리를 갸웃하더니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억세지만 따뜻한 손바닥이 볼에 닿았을 때.
“!”
김수연은 그제야 김수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글썽글썽해진 눈과 또 얼마나 얼굴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를.
……어째서일까?
‘그럼, 안녕.’
‘그래. 안녕.’
그때는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었는데.
‘저는 그런 그녀가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금방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굳이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는데.
그랬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
뺨을 어루만지는 감촉이 차갑다.
그러나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은, 영원토록 기억하고 싶을 만큼 뜨겁게 전해졌다.
질끈 눈을 감아서 흐르려던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
“부럽네. 울 수 있다는 건.”
“…….”
“난 아직도 우는 게 익숙하지 않거든.”
“……난.”
쥐어짜 낸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연다.
“너처럼 되고 싶었어.”
한계까지 참았던 숨을 토하듯 말을 뱉는다.
“아니. 네가 내가 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내가 너처럼 돼야겠지. 그렇죠?”
“네,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유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현아.”
부드러운 목소리.
김수현이 사적인 자리에서 말을 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현아는 양손을 힘 있게 모아 쥐며 침을 삼켰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제 세계에서의 일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요.”
“아…….”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분명히 다른 미래도 있었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요.”
“네.”
“그러니까, 만약.”
“…….”
김수현은 잠깐 말을 끊었다.
후우우우, 긴 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는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적잖은 시간 동안 뜸을 들이더니 망설이듯이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일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네에!?”
“성스러운 여왕인 당신이라면, 사과를 받아들일 겁니까?”
“어…….”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는 건 찰나에 불과했다.
“네! 그럼요!”
유현아는 곧 마구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만, 저라면 받아들일 거예요.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받아들이고 말고요. 장담해요. 분명히!”
유현아는 활짝 핀 얼굴로 신이 나서 떠들었다.
김수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사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이었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본인을 죽인 상대를 용서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일련의 가정은 김수현이니까 그런 것이었다.
반대로 유현아라면 달라질 수도 있다.
왜냐면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극에 서 있는 사용자니까.
성스러운 여왕은 원래 그런 여인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그렇군요.”
잠시 후, 눈을 뜬 김수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서렸다.
김수연은 그 미소를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노려봤다.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조금이라도 다가가면 곧 사라질 먼발치의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좋아. 그럼.”
–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홀가분한 목소리와 윙윙거리는 음성이 동시에 겹쳤다.
이윽고 앞서 두 번 그랬었던 것처럼 작은 소음이 터졌다.
하얀 빛무리가 김수현을 순식간에 물들인다.
“수, 수현아?”
품에 안겨 시종일관 흐느끼던 김유연의 눈이 화들짝 떠졌다.
“저기!”
유현아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급하게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에 김수연은 그때까지 볼에 닿아 있던 손의 감촉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힘껏 붙잡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꽉 주먹 쥐어진 자기 손의 감각뿐이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한 김수연은, 눈처럼 흩어져 날리는 빛들을 멍하니 돌아봤다.
올 때는 아홉 명이었지만, 남은 건 여섯 명밖에 없었다.
몇 번을 봐도 김수현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수연을 비롯한 다섯 여인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계속해서, 하염없이 응시했다.
Omnibus – Sovereign Of Sword(完).
============================ 작품 후기 ============================
드디어 김수현 옴니버스가 끝났습니다.
이제 에필로그 2편만 적으면 이 길고 길었던 외전도 드디어 끝이 나네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