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3
01052 8. 외전 에필로그(3/3). =========================================================================
구슬은 강제로 쫓아내듯이 날 보내 버렸지만, 사실 별다른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단지 빛은 순식간에 내 몸을 물들였고 이후 배꼽이 갑자기 쏠리는 감각이 엄습했다.
동시에 시야가 빙그르르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몸을 식혀주던 바람이 한순간 사라지고 공허한 허공이 살에 닿는다.
그리고 눈을 뜨니 눈앞에 장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한눈에 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크기의 나무 기둥과 그것을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뻗은 줄기들.
얼떨결에 오게 됐었던 다중 우주 세계였다.
– 드디어 왔나…….
무거운 울림이 귀에 울려 퍼졌다.
왜인지 피로에 찌든 음성처럼 들렸다.
누군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설마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 그렇다고 대답해서 네가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낀다면, 맞는다고 하고 싶군.
약간 비난하는 듯한 어조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십천의 존재도 지치는 일이 있다니. 놀랄 노자네.”
– 네가 한 짓이 그만큼 상식을 뛰어넘었다는 소리다.
“아니 난, 좀 도와줬을 뿐인데.”
– 그 좀 도와줬다는 결과가 어떤지 직접 봐라.
머리가 휙 돌려졌다.
내 몸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정된 눈에 보이는 광경을 확인한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들어갔었던 세계의 틈이 빛나고 있다.
동시에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잘 정돈된 채찍을 치듯, 그리하여 채가 힘껏 쏘아지듯.
역방향으로 구불구불하게 얽히고설켰던 줄기는, 빛이 나기 시작한 지점을 기점으로 쫙 펴지며 직선으로 펼쳐졌다.
그렇게 직진하며 멀리멀리 뻗어 나가더니 다른 세계의 줄기처럼 먼빛으로 사라져 끝이 보이지 않게 됐다.
난 완전히 모양이 변한 세계의 줄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어떻게 된 거지?
– 세계의 미래가 변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네가 개입한 순간부터 그 세계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
– 이 세계는 어떤 줄기에도 네가 개입한다는 선택 따위는 없었지. 하지만 의도가 어떻든 넌 다중 우주 세계에 간섭하는 선택을 했다. 그럼으로써 원래대로라면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상황을 존재하게 했다는 거다.
“…….”
솔직히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는 결국 네 간섭에 따라서 변화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형이랑 제갈 해솔은 어딨어?”
그 순간 형태도 없는 제로 코드가 휘청거렸다고 느꼈다면 착각일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적당히 말을 끊은 건데.
“변했다고 해도 어차피 더 좋은 방향으로 변했을 거 아냐. 그렇지 않아?”
–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건가. 넌 참 속 편해서 좋겠군.
한숨 섞인 말에 불현듯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라고 외치며 방긋방긋 웃는 안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제로 코드의 기분을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 뭐 됐다. 네가 말한 두 명은 이미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아니. 내가 보내 버렸지. 그리고 이제는 네 차례다.
차례다, 까지 들었을 때 시야는 또 한 번 변한 상태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완벽하게 복구된 내 세계의 줄기가 보였다.
다행이기는 하나 어지간히도 돌려보내고 싶은가 보다.
그렇게 떠밀리듯이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조금이지만 갈등이 생겼다.
이대로 들어가야 하나.
이대로 끝내도 좋으려나.
타 세계를 갔다가 오면서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나에 대하여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다.
난 내가 변했다고 여겼었다.
적어도 예전보다는 인간답다고,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악마를 상대했을 때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놈들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현아는 다르다.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고, 듣는 족족 짓밟고 싶었다.
그런 내 심리는 실제로 동맹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성스러운 여왕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그래.
그 세계에서의 며칠을 돌이켜보면-.
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변한 척 괜찮은 척하며 숨기고 있었을 뿐.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그것 또한 기만이라면 기만이리라.
– 김수현?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슴을 어지럽히는 갈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리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모두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
무엇보다 이제 와서 굳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까?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들여 줄 거예요. 분명히!’
……유현아…….
– 왜 가지 않는 거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복잡한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나온 말이었다.
“만약.”
– 만약?
“내가 이 다중 우주 세계라는 곳에서 내 세계의 과거에 간섭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
– 뭐.
제로 코드는 얼어붙기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려서 내 과거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중간중간 내가 걸어왔던 길이 살짝살짝 눈앞을 스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잠깐만! 설마 삼 회차를 시작하겠다는 건가?
문득 등 뒤로 급히 따라오는 기척이 전해졌다.
삼 회차라.
확실히 모든 것을 리셋하기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지.
“그럴 리가.”
하지만 난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사실 아직도 꼭 해야 하는지 번민이 가시질 않는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거든.”
잠깐 입을 닫고 갈라진 틈을 내려다봤다.
이 줄기로 된 길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지만, 눈앞에는 내 기억 속의 장면이 분명히 지나가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칼을 내리치는 나.
그 앞으로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뚝뚝 떨구는 여인.
거기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은 후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발전하고 싶거든 약점을 가장 먼저 직시하고 고쳐야 한다고.”
– 설마.
제로 코드도 이제 내가 하려는 일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이전의 세계는 불가항력으로 들어갔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단 제로 코드의 말을 최대한 들어볼 생각이었다.
– 글쎄.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전 세계처럼 네가 둘로 존재하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겠지.
뜻밖에도 제로 코드는 선선히 대답했다.
“이 세계는 내 세계니까?”
– 그렇다. 굳이 말해보면 동화된다는 정도의 표현이 옳겠군.
“…….”
– 변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다.
제로 코드가 은근한 음성을 울렸다.
난 양손을 꽉 오므렸다.
알고 있다.
여기서 과거를 바꿔 버리면 그 이후의 미래도 간섭에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내가 겪었던 것들이 사라지거나 없어질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가더라도 꺼림칙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까 제로 코드가 왜 비난하듯이 말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만 한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왜냐면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 원한다면 도와주지.
그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뭐?”
– 가끔 넌 의미 없이 되묻는 경향이 있군. 못 들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지. 아무튼, 원한다면 네가 걱정하는 간섭에 의한 영향을 최소화해주겠다는 소리다. 내가 직접.
제로 코드는 직접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해서 울렸다.
어쨌든 그렇다면야 더할 나위 없기는 한데.
“정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좀 전까지만 해도 방방 뛰었잖아.”
– 방방 뛴 적 없다.
제로 코드는 약간 화난 음성으로 반박했다.
– 역전 현상의 세계에서 네가 일으킨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 줄기는 너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말인즉 내 권한이 미칠 수 있다는 거다.
미묘한 차이이기는 하나 뭔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도 네가 도와준다고 해줄지는 꿈에도 몰랐어.”
– 그거야 네가 이 선택을 함으로써 나중에…….
그때 제로 코드는 아차 하며 말을 멈췄다.
– 이런. 하마터면 말할 뻔했군.
뭐지?
딱히 유도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애초 미래는 일부러 보지도 않았다고.
– 뭐 정말로 하겠다면 나도 같이 들어가도록 하지.
뭔가 화제를 돌린다는 느낌이 강했으나 일단 신경 끄기로 했다.
어쩌면 세라프가 말했듯이 모종의 목적으로 ‘빚을 지운다.’ 는 속셈일 수도 있겠고.
여하튼 무려 십천의 존재가 도와준다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다.
– 바로 들어갈 텐가?
망설이는 것도 잠깐.
난 힘 있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내 과거의 가장 큰 약점을 직시하고 바꾼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더 속으로 되뇐 후, 개울물에 발을 담그듯 틈으로 천천히 발을 밀어 넣었다.
잠시 후, 몸이 쏠리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어둠이 시야를 뒤덮었다.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옅은 회색 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또 가물가물하면서도 회전하듯 돌아가서 초점이 맞지 않는다.
시력이 또렷하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마가 미미하게 지끈거린다는 점이 생각보다 거슬린다.
이전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게 제로 코드가 말한 동화라는 현상인가.
신호가 다 해가는 신호등처럼 시계(視界)가 깜빡거릴수록 세상은 점차 검푸른 빛깔을 되찾아가는 중이었지만, 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 상태를 점검하는 한편,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마력을 일으켰다.
사방은 을씨년스러우리만큼 고요하다.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눈을 감기 직전에 본 검푸른 빛은 현재 시간대가 늦은 밤, 새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살에 닿는 건 평소에 입었던 치우천왕의 갑옷이 아니라 하늘 영광의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날 따라온 제로 코드의 기운도 느껴졌다.
제대로 온 것 같기는 한데…….
“알고 있어요.”
그때였다.
한없이 조용하던 정면에서 돌연히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죠.”
몹시 구슬픈 음색.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요.”
동화하는 과정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에 정면의 여인은 낮게 말을 이었다.
“꼭……. 죽였어야 했나요?”
눈이 번쩍 떠졌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 새벽에 코멘트에 남기기는 했는데, 오늘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남은 분량을 마무리 짓고 업데이트했습니다.
어제 조별 과제 때문에 하도 씩씩거리다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
이제 외전도 한 편 남았네요.
남은 한 편을 올리고, 메모라이즈도 드디어 완결관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못한 이야기는 내일 후기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독자분들 모두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