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4
01053 8. 외전 에필로그(3/3). =========================================================================
어지럽던 시야가 비로소 선명해졌다.
말을 건 여인의 모습도 또렷하게 보였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도 비틀비틀 걸어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늘하늘하던 머리카락은 날붙이에 강제로 잘린 듯 목을 겨우 가릴 정도로 짧아졌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던 특유의 큼직한 눈망울은 죽은 물고기처럼 흐릿하게 풀렸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서 대륙과 부랑자 연합군과 전쟁을 치른 직후였던가.
그리고 유현아는…….
“승현이 오빠. 그리고 다희.”
갑자기 이어진 목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꼭 죽였어야 했나요?”
서서히 다가오는 유현아를 보니 새삼스런 기분이 든다.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저는요. 신세 한탄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니, 안 할게요. 안 할 테니까 대답해주세요.”
그래.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분명히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그저 당신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끅끅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꼭 그랬어야 했는지.”
목소리조차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만…….”
한 걸음씩 다가오던 유현아는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양손을 말아 쥐었다.
“그래도.”
무거운 침묵.
이윽고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힘겹게 떼어졌다.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어요.”
일렁일렁하던 두 눈동자에서 가득히 괴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유현아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저 세계의 유현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참하고 처량한 몰골이었다.
난 소리 죽여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가없이 내려다봤다.
그때는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지금은 보인다.
그 당시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
내가 이 시점에 돌아온 이유는 하나.
눈 아래 보이는 정수리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
크게 움찔거리는 기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도복을 벗어서 추위에 떠는 그녀의 몸에 걸친 후,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다.
유현아는 믿을 수 없다는,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로 날 마주 봤다.
뚫어질 듯한 눈초리를 피하지 않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과한다면 절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썩은 동태 같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당신이 절 용서하고 편안해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라고요?”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말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저였다면 용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제가 둘을 잃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요?”
알 수는 없으나 짐작은 가능하다.
“알아요?”
유현아는 서글프게 말을 높였다.
내가 걸친 도복의 옷깃을 찢어지라 힘껏 그러모은 채로.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용서하겠느냐니…….”
유현아는 아랫입술이 새하얘지도록 입을 깨물었다.
입맛이 썼다.
타 세계의 유현아는 용서해줄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과한다고 해서 바로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상대가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라고 해도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는 애초 예상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사과 한 마디로 풀릴 일이 아니었으니까.
“제 과거는 몹시 힘들고 험난한 기억들로 점철돼 있습니다. 지금도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 수두룩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전……. 이상할 정도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방향은 고려조차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 서로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죠.”
그러나.
“여관에서의 일이 있었던 후 가끔 그렇게 생각할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억지로 잊거나 스스로 합리화하며 깊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않으려 했습니다.”
왜냐면.
“아마…….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게. 십 년 동안의 세월을 부정하는 게 두려웠었던 것 같습니다.”
유현아는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다.
다시 입이 열린 건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요.”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 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한 마디만 하면 될 걸. 왜……!”
머리를 세게 흔들어 내 손을 털어내더니 와락 소리쳤다.
말소리에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울음이 섞여 있었다.
“유현아. 저는.”
“인정할 수 없어요.”
뜨겁던 목소리가 돌연히 서늘해졌다.
유현아는 고개를 거칠게 들었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해봤자.”
독기와 원한으로 점철된 눈동자로 날 노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어차피 당신이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하는 자기만족이잖아요……!”
“뭐…….”
그리고 난.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즉답했다.
서서히 일그러지던 유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것처럼.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웃고 다녀도…….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해졌습니다. 간혹 터질 듯이 꽉 막힐 때도 있었죠.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내가 거슬리니까.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말하고 보니 좀 웃기기는 하다.
하지만 이 자기중심적인 말들이 내 속내요 진심이었다.
“그럼 승현이 오빠는요?”
입을 뻐끔거리던 유현아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다희는요?”
“…….”
“……저는요!”
“그래서 바꾸려고 합니다.”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바꾼다……. 고요?”
“예. 차승현과 반다희. 이 두 명이 살아 있는 세계.”
“……?”
“그리고 당신이 살아 있을 세계로.”
원래대로라면 자포자기한 유현아가 죽여달라고 빌었겠지.
난 그런 그녀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목을 베었다.
여기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와 유현아의 관계를 포함해서 관련된 모든 것을 바꾼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유현아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애처롭게 늘어진 양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리며 같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유현아.”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는 유현아의 눈이 커졌다.
시꺼멓게 죽었던 동공이 약간이지만 예의 빛깔을 되찾는다.
난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조금씩 허리를 굽히며 입을 뗐다.
이제는 해야 한다.
그때는 할 수 없었던 말.
“그때 제멋대로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도의를 벗어난 짓을 저지른 점.”
하지만-.
“그로 인해 당신을 아프게 한 점.”
지금은 할 수 있는 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땅이 보인다.
땅거미가 그늘진 땅에 문득 흰 눈 한 송이가 너울너울 내려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신발에도 조금이지만 눈이 녹아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어라.
이때 눈이 내렸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유현아가 말했다.
“정말로 사과하실 줄은……. 몰랐어요…….”
어딘가 망연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뾰족한 가시 같던 독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난 느릿하게 허리를 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유현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중이었다.
손을 뻗어 어루만지듯이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제가 변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죠.”
“수, 수현 씨. 저, 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래서 바꾸려고 합니다. 당신은 물론, 저 자신을 위해서.”
“……네?”
더 쉬운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방법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내 가장 어두운 기억을 그냥 덮어 버리는 셈이 되니까.
그래서 여기로 먼저 왔다.
이제는…….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을 바꾼다.
괜찮을까?
아마 괜찮지 않겠지.
믿는 구석이 있다면 제로 코드뿐이다.
“끝으로.”
제로 코드가 느껴지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다시 얼굴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유현아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단지 아득한 느낌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런 그녀를 향해 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웃는 얼굴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
덜컹하며 나무로 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이곳에 김수현이라는 분이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동시에 기다렸던 음성이 여관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나를 비롯한 전원이 문으로 눈을 돌린다.
그곳에는.
“안녕하세요! 혹시 사용자 김수현 님 계신가요?”
그녀가 있었다.
세상 걱정 없이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김수현이라면 여기 이 사람인데요. 그쪽은 누구세요?”
“역시 계시는구나~. 다행이다.”
비비앙이 나를 척 가리키며 말하니 유현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 저는 소 도시 뮬의 대표 클랜으로 새로 부임한 너도밤나무 클랜 로드이며 삼 년 차 사용자 유현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삼 년 차 사용자 차승현입니다.”
옆에 서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도 중저음의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난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제가 김수현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용자 유현아.”
그 순간 성큼성큼 들어오던 유현아의 걸음이 뚝 멎었다.
그녀는 갑자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잠시 후 살구색 뺨이 진한 봉숭아 빛으로 물들었다.
콧잔등도 잔뜩 붉어지더니 스리슬쩍 눈을 내리뜬다.
뭐지?
내 미소가 이상했나?
“에…….”
“……?”
“자,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들어가고 싶은데…….”
“아, 들어오세요.”
주춤거리는 유현아의 손을 살그머니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윽고 나와 유현아는 자리에 앉았다.
고연주는 투덜거리며 찻잔을 가져왔다.
“아앗. 고맙습니다.”
난 페이스를 잃고 허둥거리는 성스러운 여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너무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 부끄러워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언뜻 날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필요 이상으로 손을 내젓는 유현아를 보며 나도 당황하고 말았다.
차승현의 한숨을 들었는지 그녀는 곧 새색시처럼 얌전해졌다.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거리니 유현아도 수줍게 웃어 보였다.
예전과는 다르다.
반응이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앞으로 할 이야기가 남았지만, 자신은 있다.
이랬으면 됐는데.
이렇게나 쉬운데.
“참 오래도 걸렸다.”
“네?”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네!”
유현아는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난 손으로 턱을 괴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에. 그, 그러니까요…….”
그러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현아는 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물우물 말을 흐리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종래에는 귀까지 빨개졌다.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걸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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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마지막에 와서도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ㅜ.ㅠ
외전 에필로그가 한 편 더 남았습니다.
사실 한 편 분량까지는 아니고, 6K 정도면 완료될 것 같아요.
5월 8일(일요일)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꼭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