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6
01055 9. 비비앙 외전(현대) =========================================================================
해말간 아침 햇살이 눈을 두드리자, 김수현의 눈이 반쯤 떠졌다.
눈 부신 빛이 방을 가득히 물들이고, 밤새 차갑게 식었던 대기 온도가 조금씩 따뜻해지는 시간.
살며시 숨을 들이켜니 맑은 공기 한 줄기가 흘러들어와 가슴 구석구석 퍼진다.
머리와 몸이 한결 상쾌해진 김수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느긋이 방문을 열었다.
10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드넓은 거실에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겨 흐르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을 걷던 김수현은 본능에 따라 코를 킁킁거렸다.
주방에는 앞치마를 걸친 임한나가 허밍을 흥얼거리며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달군 프라이팬에 샛노란 버터를 칠하더니 문득 옆을 돌아봤다.
“일어났어?”
머리가 부스스한 사내의 모습이 재밌는지 싱긋 웃어 보였다.
문 옆에 장식된 금엽목 잎을 매만지던 김수현은 입이 늘어지라 하품했다.
“오늘따라 조용하네…….”
잠이 덜 깼는지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집에 우리 둘만 있는 거야?”
“아니. 연주 언니는 오늘 새벽 늦게 들어왔고, 현아 씨는 방에서 애들이랑 자는 중.”
“소영이는?”
“소영이 언니? 오늘 이사 회의 있다고 새벽 여섯 시에 나갔는데……. 왜?”
한소영만 특정한 게 이상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임한나가 되물었다.
혀를 찬 김수현은 아쉽다는 얼굴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뭐, 됐어. 그나저나 너 출근은?”
“꽃집은 오늘 휴무. 대신 점심에 요가 강의하러 주민 센터 가야 해.”
“아……. 나머지는? 다 출근했나?”
“그럼. 아직 목요일이잖니.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임한나는 미소 띤 얼굴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멍한 얼굴로 돌아본 김수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덟 시 삼십 분.
늦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어린이집 등원 시간이 아홉 시 반인 걸 고려하면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수나를 생각하면 조금 빠듯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김수현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린이집 버스 아홉 시 십오 분에 온다니까~! 십 분 전에는 식탁에 앉아야 해~!”
임한나의 외침을 뒤로한 채 『마르♡수나』 라는 명패가 적인 문을 열어젖혔다.
따사로운 햇살이 물결치는 방 안에는 한 여인과 두 여아가 세상 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기자기한 곰 무늬로 장식된 침대에는 유현아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좌우로 마르와 수나가 한창 새근거리는 중이었다.
그 천사 같은 얼굴에 얼른 흔들어 깨우려던 김수현의 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품에 폭 안긴 채 코 자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영원토록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일 정도였다.
그러나 째깍거리던 탁상시계가 여덟 시 사십 분을 넘어갔을 때.
“……이런.”
아차 하며 정신 차린 김수현은 살그머니 다가가 마르의 볼을 어루만졌다.
“웅………….”
뺨이 간지러웠는지 마르는 큼직한 손바닥에 살살 볼을 문질렀다.
“응. 아빠야, 아빠.”
마르.
원래대로라면 가시나무 관을 쓰고 각성한 미래를 가졌을 요정 여왕.
그러나 유현아를 살리는 쪽으로 과거가 변화한 후 마르의 미래도 변했다.
성스러운 여왕이 있는 이상 마르가 굳이 그녀를 대체할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귀엽기도 하지.”
작달막한 입술을 실룩이는 여아를 내려다보는 김수현의 눈에는 애정이 넘쳐흐른다.
잠결에도 귀엽다는 소리는 들었는지 마르는 방긋 웃었다.
“으으으응…….”
그때 유현아가 눈을 감은 채로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마르만 언뜻 잠에서 깼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현아는 왜?”
“으으으응~.”
“아, 물론 현아도 귀엽지.”
“헤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다 큰 성인 여성이 좋다고 배시시 웃는다.
하지만 워낙 소녀 같은 외양이라 묘하게 어울리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나가 여전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머리를 갸웃하며 유심히 들여다본 김수현은.
“흠. 이상하네.”
빙글빙글 웃으며 수나의 통통한 젖살을 콕 찔렀다.
“이 두 명은 이렇게나 귀여운데……. 웬 못난이가 한 명 있네?”
울컥.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와락 눈을 뜬 수나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이익!”
“하하. 농담이야, 농담. 당연히 우리 수나가 최고로 예쁘지.”
“이이이익!”
“자자. 이제 그만 씻자. 착하지?”
김수현은 마구 생떼를 쓰는 수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내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는 마르도 들어 올리고 욕실로 모습을 감췄다.
깨끗이 씻기고 노란 옷과 치마를 입힌 후, 임한나가 정성스레 만든 토스트를 한 입 물었을 때는 막 아홉 시 십 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동그란 모자를 머리에 쓴 채 꾸벅 배꼽 인사하는 마르.
“우리 공주님들~. 오늘도 재밌게 놀고 와?”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뺨에 입을 맞추며 상냥한 미소로 배웅하는 임한나.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김수현.
누가 봐도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의 풍경이다.
유치하다고 투덜거리며 모자를 꾸기는 수나만 제외한다면.
김수현은 두 딸의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통학 버스도 막 도착한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마르, 수나 오라버님!”
어깨와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는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 어린이집 교사 복장이라고 보기는 상당히 신경을 쓴 여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갓 스물 넷은 됐을까.
옷차림처럼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꽃다운 나이의 싱그러움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김수현은 멋쩍게 웃었다.
“오라버님이 아니라 아버지 됩니다.”
“어머, 죄송해요. 너무 젊으셔서 볼 때마다 실수하게 되네요.”
생글생글 눈웃음친 여인은 호호 웃더니 쪼그려 앉았다.
“마르, 수나도 안녕?”
두 여아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넨다.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르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흥.”
반대로 가볍게 눈을 흘긴 수나는 본체만체하며 어린이집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떠들썩하던 버스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잠시 후 “오셨습니까! 누님!” 이라는, 앳되지만 우렁찬 합창이 일대에 울려 퍼졌다.
김수현은 머리에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계속 마르에게 집중하는 중이었지만.
“아이 참~. 마르야~. 선생님이 엄마, 라고 불러 달라고 했잖아~.”
“네, 네?”
“어제 그랬잖니. 선생님은 모두에게 엄마, 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응?”
“아, 아하하하…….”
교사는 유독 엄마라는 말을 강조했다.
어색하게 웃던 마르는 살금살금 달아나더니 버스 안으로 쏙 사라졌다.
여인은 잠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미소 지으며 굽혔던 다리를 폈다.
“마르는 참 부끄럼이 많은 것 같아요.”
“뭐 그렇죠.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아, 맞다.”
“?”
막 몸을 돌리려던 여인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조금 외람한 말씀이지만……. 수나 있잖아요.”
여인이 말끝을 흐리자, 김수현은 살짝 긴장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수나가 왜…….”
“그게요. 아, 어쩌지? 벌써 아홉 시 이십 분이 넘었는데.”
시계를 보던 교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몹시 안타깝다는 얼굴로 급히 스마트 폰을 꺼냈다.
매우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수십 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일단 너무 늦어서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개인 번호 좀 알려주시겠어요?”
“제 번호요? 어린이집 등록 명부에 기재돼 있지는 않습니까?”
“네! 샅샅이 뒤졌는데 이상하게 아버님 번호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어쨌든 애들 먼저 등원시키고, 나중에 시간 나면 제가 따로 연락 드릴게요. 중요한 이야기라서 꼭 들으셔야 해요.”
“아, 알겠습니다.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방금 조폭 인사(?)가 신경 쓰였던 탓에 김수현은 아무 의심 없이 스마트 폰을 받고 번호를 찍어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드디어!”
“예?”
“아, 아니에요. 아무튼, 꼭 연락 드릴게요. 꼭!”
“예, 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린이집 교사는 날아갈 듯한 얼굴로 굉장히 기뻐했다.
한편.
“……호.”
가장 뒷자리에 모셔져 턱을 괸 채 창문 밖을 지켜보던 수나는, 일련의 과정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작고 동글동글한 가방을 여는 순간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수나의 양팔을 덥석 붙잡았다.
마르가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수나의 눈썹이 치켜졌다.
“뭐야?”
“수, 수나야아. 그러면 안 돼.”
“내가 뭐. 전화 한 통화만 할 거야.”
“아, 안 돼!”
마르가 펄쩍 뛰었다.
“우리 선생님 착하고 좋으신 분이야!”
“웃기네. 너도 봤잖아. 방금 헛짓거리하는 거.”
“그, 그래도.”
“놔.”
“안 된다니까!”
“안 놔?”
“제발! 선생님도 가족이 있을 거야!”
“내 알 바냐.”
마르는 막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수나는 가볍게 제압했다.
기어코 딸기 모양으로 된 휴대 전화를 꺼내더니 숫자를 꾹 눌렀다.
이윽고 전화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실 수나 정도의 존재가 되면 인간을 상대로 질투 따위의 감정은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휴대 전화 액정에는 질투의 화신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 네. 한소영입니다.
“어. 난데.”
통화가 연결되자, 수나는 자못 거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 수나구나. 급한 일이니? 지금 회의 중이라서 좀 바쁜데.
“벌레가 꼬였어.”
– ……누구?
“우리 어린이집 교사. 알아?”
– 아, 그녀ㄴ……. 그 사람이 왜?
“오늘 보니까 꼬리 좀 치던데.”
수나는 조공으로 받은 사탕을 한 입 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아빠보고 오라버님이라고 부르질 않나.”
– 응?
“또 마르보고 엄마라 부르라 하질 않나.”
– 음……. 그것뿐이니?
“아! 아빠 번호도 땄어.”
– 뭐야?
전자음이 섞인 낮았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날 이용해서 상담하려는 척하면서 받아가던데. 아주 자연스러웠어.”
–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탁.
일을 끝낸 수나는 바로 휴대 전화를 닫았다.
이내 버스 밖에서 근심하는 낯빛으로 배웅하는 김수현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리고 제압당해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마르는…….
“여러분~. 이제 출발할 테니까 안전띠 꼭 매세요~!”
오늘따라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방방 뛰며 꺅꺅 기뻐하는 선생님을 보며 조용히 한숨지었다.
============================ 작품 후기 ============================
진짜로, 정말로, 레알 마드리드(?) 마지막인 비비앙 외전, 시작합니다.
아마 잔잔한 일상의 느낌으로 갈 것 같습니다.
네.
아마 초반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