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7
01056 9. 비비앙 외전(현대) =========================================================================
아침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조용했던 하늘은, 해가 저물자 먹구름이 끼며 조금씩 석음을 뿌리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기는 약간 늦은 시간이었으나, 주방에는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연달아 울리는 중이었다.
식탁에서 식사 중인 인원은 약 열댓 명.
시간대를 고려하면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워낙 직업군이 다양하니 아침 점심에는 마주치기도 어려워서, 최소한 저녁 식사만큼은 서로 얼굴 보며 먹자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불문율이라고 해도 강요하지는 않고, 정 바쁘면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있었다.
“한별이는?”
“대학 과제 때문에 못 온다던데.”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얼굴 보기가 힘들어.”
“좆 같다는데.”
이유정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던 정하연은 “뭐?” 라고 반문하며 턱을 젖혔다.
“아, 교수 말이야. 교수.”
숟가락을 물고 있던 이유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기껏 중간시험 끝났나 싶더니 글쎄, 기말시험 전까지 주마다 실험 보고서 제출하라고 했대. 그것도 조별 과제로.”
“아, 조별 과제.”
“난 걔가 그렇게 욕하는 거 처음 들었어. 교수 이 새끼를 죽이네 살리네! 아주 난리를 치던데?”
“알 것 같네.”
정하연은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정이 넌? 요즘 공부는 잘 돼?”
“나? 나야 뭐……. 체력 시험은 언제나 만점이지.”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러니까 공부는? 이론은? 필기시험은? 자격증은?”
“언니!”
이유정이 눈에 쌍심지를 켜자, 정하연이 키득키득 웃는다.
느긋한 식사 시간.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오직 꿈에서만 그렸었던 여유 있고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식탁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는 듯한 분위기라고 할까.
정하연이 웃는 와중 몰래 누군가를 힐끔거리는 게 그 방증이었다.
탁.
문득 숟가락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치고는 약간 큰 소리였다.
이제 식사를 끝낸 김수현이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있…….”
“자기. 실은 오늘 선물이 있어.”
그때 한소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김수현은 목젖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선물?”
언제부터인가 김수현과 한소영은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한소영이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응. 이번에 새로 나온 스마트 폰.”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를 건넸다.
잘 포장된 게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머리를 갸웃한 김수현은 주머니 속에서 폰을 꺼냈다.
“이것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원래 전자 기기는 신품 나오는 게 빠르잖아.”
“그렇기는 한데.”
“이왕 가져온 거 한 번 써봐. 그리고 그건 나한테…….”
하긴 일부러 가져온 성의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원래 쓰던 걸 넘기려던 김수현은 돌연히 멈칫했다.
동시에 한소영의 눈매도 조금이지만 날카로워졌다.
“아, 이거 번호 이동된 거야?”
“……응.”
“그럼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수나에 관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여기로 연락 주기로 했거든.”
“그거 내가 받을게.”
“어, 하지만…….”
“괜찮아. 선생님도 같은 여자가 더 편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뭔가 속는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에는 빼앗기듯이 넘겨주고 말았다.
한소영은 퍽 만족한 얼굴로 폰을 바스러지듯이 쥐었다.
잠깐 새로 받은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던 김수현은, 탁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잘 쓸 게…….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그러자 한소영이 주춤했다.
“이제 나도 슬슬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김수현이 단도직입으로 본론을 말하자, 한소영은 천연덕스레 반문했다.
그리고 바로 핸드백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돈이 부족해서 그래? 마침…….”
“아니야.”
김수현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막 준비했던 통장을 뭉텅이로 꺼내려던 한소영은 동작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일을 하고 싶다고.”
“…….”
“굳이 일이 아니어도 좋아. 뭐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
“……그 이야기, 저번에 끝난 거 아니었어?”
그러자 김수현이 절대로 아니라는 듯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집에만 있으려니까 너무 답답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오죽하면 홀 플레인이 그리워질 정도라고.”
“그럼 이번 주말에 바람이나 쐬러…….”
“말 돌리지 마. 놀러 가고 싶다고 투정부리는 거 아니니까. 기둥서방 생활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기둥서방이라니……. 우린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거야. 도대체 왜 일을 못 하게 하는 건데.”
“수현아…….”
눈을 내리뜬 한소영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그 웃기지도 않은 이유?”
“미안해. 우리가 더 잘할게요.”
“아니. 미안할 것도 없고, 이미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제발, 우리 그냥 이대로 살자. 응?”
“소영아. 나 이제…….”
김수현이 진지하게 칼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막 입 밖으로 쏟아지려던 말에 순간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
그렁그렁한 눈동자와 애처로운 눈빛.
한소영은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듯 얼굴을 서글프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김수현은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렸다.
한소영이 눈물을 보이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탓에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들이 모조리 헝클어지고 말았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여자의 눈물은 강력한 무기라고.
한동안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수현은, 이윽고 앞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숨결을 올려 뱉었다.
“다음에……. 얘기하자.”
결국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이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식탁 여기저기에서 숨을 터뜨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너무했나?”
한소영이 손에 쥔 인공 눈물을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한 낯빛을 회복했다.
약간 미안해하는 빛은 없잖아 있었지만.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소영 씨 말대로 우리가 괜히 이러는 것도 아니고.”
고연주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받았다.
“맞아요~. 솔직히 우리야말로 오죽~하면 이러겠느냐고요.”
내내 침묵을 지키던 제갈 해솔도 한 마디 거들었다.
“글쎄요. 그래도 저렇게나 원하는데, 한 번 믿어보는 것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유현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잘도 그러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뭐 우리가 딱히 수현 씨를 못 믿겠다는 건 아녜요. 단.”
“?”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알아서 접근해주는 여자들이 있다는 게 문제죠.”
“맞아. 이번에 그 교사만 봐도 그렇잖아?”
이유정도 얼른 찬동하고 나섰다.
“그 정도만 해도 말을 안 해요. 인터넷에는 뭔 팬클럽 카페까지 생겼다면서요?”
“SNS에 사진만 올렸는데 삼십 분만에 좋아요 오만 개를 돌파한 것도 있지.”
“전 오라버니가 카페 알바 한 달하고 팔백만 원 벌어오는 게 더 신기했어요.”
“어머. 한 달 아르바이트로 팔백만 원? 그게 가능해?”
“알고 보니 주변에 여고만 네 곳, 여대는 두 곳 있는 카페였거든요. 그러니 손님이 무지하게 몰렸을 거고, 눈치 빠른 사장이 오라버니를 파격적으로 대우해준 거죠.”
“이야, 그 사장 장사 좀 할 줄 아네.”
식탁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임한나, 차소림 등 천성이 모질지 못한 여인들은 쓰게 웃었지만, 어쨌든 대다수가 김수현의 사회 활동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하기야 이 인원 중에서 한 명이 더 늘어나는 걸 누가 반기겠냐마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튼,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회의를 시작하죠.”
한소영의 한 마디에 시끄럽던 주변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회의.
안현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어전 회의라고 부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수현의 아내만 참여할 자격이 주어지는 일종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다.
굳이 회의라는 거창한 명목까지 붙이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교사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고……. 혹시 따로 특기할만한 안건이 있나요?”
살쾡이처럼 눈을 빛내던 한소영이 시선을 돌렸다.
정하연은 수첩을 꺼내 읽으며 안경을 들어 올렸다.
“먼저 곧 수현 씨 생일이…….”
“패스. 그건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가서. 내일 수현 씨 부모님이 오실 거예요.”
“흠…….”
한소영은 침음을 흘렸다.
잠정적(?) 시부모의 방문은 그녀로서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우리 쪽에서는 누가 나가죠?”
“……일단, 게헨나 씨요.”
정하연은 일단이라는 말소리를 힘주어 냈다.
한소영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그러지?”
게헨나는 왜 그러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 꼭 나가야겠어요?”
“이번에는 내 순서 아니던가?”
“그렇기는 한데-. 상대는 인간이지만, 그 사람의 부모님이기도 해요. 말투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할 텐데.”
“하,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정말로?”
“뭘 우려하는지는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라.”
게헨나는 양손을 허리에 짚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일 만남을 대비해서 이미 특별 훈련까지 마쳤으니.”
“특별 훈련?”
“제갈 해솔의 도움을 좀 받았지.”
“……?”
전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두어 번 눈을 깜빡깜빡한 제갈 해솔은 헛기침을 했다.
“우선……. 국적은 어디로 하라고 했죠?”
“러시아.”
게헨나는 이것쯤이야 라는 듯이 대답했다.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
“이름은?”
“게헨냐이스키.”
“한국에 온 목적은?”
“봉사 활동.”
“두 유 노우?”
“김치?”
“만약 말을 실수했을 때는?”
“오우, 나 한쿡말 잘 모태욘.”
거기까지 한 순간 제갈 해솔은 느닷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이내 끅끅거리며 어깨를 심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한심한 눈으로 보던 한소영은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네요.”
“후후. 그러니까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무구하게 답하는 게헨나를 보며 유현아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외치려는 찰나였다.
와아아아!
돌연히 누군가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벽을 뚫고 전해졌다.
그 순간 임한나가 뭔가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차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나 잠깐만 일어날게요. 서둘러야겠다.”
“왜?”
“아, 비비앙 씨가 먹방할 시간이라서요. 음식 가져다줘야 해서.”
“먹방?”
임한나는 주방에서 거대한 음식 그릇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그 양을 확인한 고연주의 입이 벌어졌다.
“그, 그걸 다 먹는다고?”
“그럼요. 워낙 먹성이 좋잖아요.”
그렇게 말한 임한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떠들썩한 방문을 열어젖혔다.
– 아이고~! 포하트 님 금화 일백 개 감사합니다! 포하트 님 클래스 아주 오지고요!
그러자 방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잠깐 선명해졌다가, 곧 방문이 닫힘에 따라 도로 희미해졌다.
“그러고 보니……. 비비앙이 인터넷 방송을 한다고 했었나?”
잠깐의 침묵 후, 고연주가 말을 꺼냈다.
“네! 게임이랑 먹방 전문 방송이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안솔은 이미 잘 알고 있는지 바로 대답했다.
“방금 금화는 또 뭔 소리야?”
“아, 수신료라고 보시면 돼요. 시청자가 방송이 마음에 들면 금화를 결제해서 쏘거든요. 그렇게 받은 금화는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어요.”
“세상에……. 개인 방송을 돈까지 주면서 본다고?”
“그럼요. 우리 오라버니도 꼬박꼬박 보시는 걸요.”
“정말로?”
“네. 보면 스트레스가 쫙 풀린다고 해요.”
김수현도 본다는 말이 나오자, 다소 심드렁하던 한소영의 두 눈동자가 이채를 뗬다.
이윽고 음식 그릇을 들고 들어갔었던 임한나가 다시 방문을 열고 나오자.
– 와 또! 치녀 거미 님 금화 십팔 개 감사……? 야! 이 아이디 뭐야! 너 누구야!
낭랑한 목소리가 늦은 저녁 시간 때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비비앙 한글 패치 100% 완료.
이번 외전은 일상물 보듯이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