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59
01058 9. 비비앙 외전(현대) =========================================================================
“잘할 수 있지?”
“그렇다.”
“정말로 자신 있는 거지?”
“……그대여.”
화창한 봄날.
느긋이 도보를 거닐던 게헨나의 걸음이 뚝 멎었다.
바로 옆에 있는, 아까부터 내내 불안해하는 사내를 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이번이 여덟 번째 질문이다. 날 그렇게 못 믿느냐?”
약간 서운한 음성이었다.
“그게 아니라.”
김수현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서 그래, 중요한 자리라서.”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게헨나는 귀찮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오늘을 위해서 제갈 해솔과 많은 준비를 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대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한 게헨나는 사뭇 거만하게 턱을 치켰다.
깔끔한 단색 정장에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을 보던 김수현은, 탐탁잖은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는 건데…….”
“응? 뭐라고 했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가지. 아직 시간은 충분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십 분 먼저 기다리는 게 예의라지?”
게헨나는 한소영이 골라준 핸드백을 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기는 한데, 이미 도착하셨을걸? 어머니는 항상 약속한 시간보다 이십 분은 일찍 나오시거든.”
“뭐, 뭐라고?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응? 괜찮아. 너무 늦지만 않으면……. 게, 게헨나?”
“가자!”
막무가내로 끌려가던 김수현은 간신히 손을 들어 건너편 식당을 가리켰다.
“저, 저기라고!”
다음 순간 한식 간판이 김수현의 눈앞에 나타났다.
게헨나가 사 차선 도로를 순간적으로 뛰어넘은 것이다.
누구도 이상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순간 이동이었다.
“큰일이군.”
창에 비친 게헨나가 울상을 지었다.
“시작부터 꼬였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뭔.”
“그렇지 않느냐. 첫 만남부터 늦는 건방지고 버릇없는 암고양이로 생각할 테지.”
“누가?”
“좋다. 내 불찰이니 물 한 잔 뒤집어쓰는 것까지는 감수하겠다.”
“……내일부터 아침 드라마 금지.”
김수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게헨나가 항의하기도 전에 식당 문을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말한 대로 전망 좋은 자리에는 허름한 차림을 한 반백의 남성과 한껏 차려입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아들을 보며 손을 흔들던 중년 부부는 문득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오는 게헨나를 본 것이다.
게헨나는 확실히 여느 여인과 달랐다.
주눅이 들기는커녕, 걸음걸이는 기품이 넘치면서도 당당하다.
하긴.
게헨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그저 그런 신이 아니라 종미(終尾)의 불이라 불리는 구천(九天)급 신이다.
육십육 군단이 굴종하는 지옥의 겁화(劫火)이며 정점에 군림하는 지배자다.
그 정도의 존재가 남편의 부모를 만난다고 긴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잘못된 지식을 습득했을 뿐.
이윽고 게헨나가 김수현의 옆에 섰을 때, 자연스레 전해지는 위엄에 두 부부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 전에 말씀드렸던 사람이에요. 게헨나.”
“아…….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현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소개에 쭈뼛쭈뼛 서 있던 반백의 남성이 가까스로 인사했다.
“바, 반가워요. 게헨나 씨……?”
김수현의 모(母)도 겨우 인사를 마쳤다.
게헨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냐.”
…….
………….
……………….
……………………아니.
그래서 실수했다.
수천 년 동안 항상 지켰던 태도를 고작 며칠 만에 바꾸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게헨나가 실책을 깨달은 건 눈앞의 인간 남녀의 멍한 눈초리를 확인했을 때였다.
“……아.”
“이, 이 사람이 아직 우리 말이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하하.”
김수현이 선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
“그렇구나.”
적절한 변명은 됐는지 안경 낀 중년의 남성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고, 세상에.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넋을 잃었네요.”
여성도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맙습니다. 뿌인.”
게헨나도 서둘러 된소리를 내며 호응했다.
김수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비록 촌극으로 시작했지만, 고비를 넘긴 이후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러시아에서 봉사 활동차 왔다고 들었는데…….”
“크렇습니다.”
부모는 아들의 애인이 외국인이라는 걸 이해하려 했고.
“고생이 많네요.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나요?”
“예아.”
게헨나는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진행되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린 건 게헨나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화장실에 갔다가 오겠다며 나가자마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참 아름다운 아가씨구나.”
“그렇죠?”
“솔직히 말하면 놀랐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야.”
“그, 그래요?”
김수현은 흠칫했다.
“그래. 그런데 말이다.”
불현듯 물끄러미 아들을 응시하던 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전에 만나던 애랑은 어떻게 됐니?”
“예?”
“왜, 그 너한테 아까운 처자 있잖니. 소영 그룹 대표 이사라는.”
“하, 한소영이요?”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우물쭈물하며 젓가락만 깨작거리는 아들을 본 어머니는 쯧쯧 혀를 찼다.
“예상은 했다만……. 헤어졌구나.”
아니요.
안 헤어졌는데요.
김수현은 속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잘 됐어. 애초 사회적 지위가 너무 차이가 났고, 집안도 그래. 또 그 아가씨가 뭐가 아쉽다고 계속 사귀겠니? 미련 두지 말고 좋은 경험한 셈 쳐.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
졸지에 송충이가 된 김수현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구나.”
“소영이요?”
“아니. 꽃집 아가씨 말이다. 성격도 싹싹하니 참 참하고 좋았는데.”
“한나.”
“맞아. 그 애도 괜찮았어. 똑똑하고 영리한 애도 한 명 있었지?”
“해솔이?”
“걔 말고. 연구원이라는 애.”
“아, 하연이요.”
“아차, 그러고 보니 그 애는 요즘 어떻게 지낸다니? 가게 한다는 애.”
“연주는 뭐……. 잘 지내고 있죠.”
김수현은 잘 구워진 부추전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중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아들?”
“……예.”
“여자 눈물 나게 한 남자는 언젠가는 피눈물을 흘린단다.”
“…….”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어, 어머니. 왜 자꾸 그런 말씀을…….”
김수현은 볼멘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사실 약간 찔리기는 했다.
“네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수저를 놓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유현이 말이다.”
“형이요?”
“모르니?”
“형이 왜요?”
“말하기도 창피해. 글쎄, 얼마 전 나한테 양다리인 걸 들켰지 뭐니.”
“예?”
“그런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나중에 추궁하니까 네 명이 더 있다고 실토하더라. 정말로 기가 막혀서 원.”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내 아들이라지만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여섯 명을 동시에 만나? 말이 돼?”
해밀 클랜에 형을 둘러싼 암투가 있다는 건 김수현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문제는 김유현이 비밀을 들켰다는 점이었다.
하물며 추궁을 못 이겨 실토까지 했다고 한다.
평소 형의 말재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터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네가 큰아들보다는 낫지. 적어도 한 번에 한 명만 만나니.”
김수현은 아내가 몇 명인지 손으로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손가락 열 개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어쨌든 명심해. 아직 결혼할 나이는 아니니 별말은 안 한다만, 사랑은 외모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하는 거란다.”
“예.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만날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니만큼 김수현은 바로 긍정했다.
왜냐면 예전에 농담으로 ‘맞아요.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죠. 저도 가슴이 큰 여자가 좋아요.’ 라고 말했었다가, 어떻게 됐었는지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수긍하는 게 한 시라도 빠르게 잔소리에서 해방되는 지름길이었다.
“당신도 한 마디 하지 그래요? 가만히 있지만 말고.”
느닷없이 화살이 돌려졌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잠깐.
“흠……. 수현아.”
“예. 아버지.”
묵묵히 식사하던 부(父)는 짐짓 근엄한 기색을 비쳤다.
“네 어머니 말대로다. 방금 게헨나 씨라고 했나?”
“맞습니다.”
“이번이 몇 명째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되지 않나.”
“예…….”
“여러 여자를 만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한나라는 애 처음 소개받고 아직 일 년도 채 안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
엄한 꾸짖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한동안 뜸을 들이던 아버지는 문득 작은아들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햐, 부럽네.”
짝!
그 순간 차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년의 사내는 등으로 손을 돌리며 격한 신음을 터뜨렸다.
멋진 스매싱이었다.
자리로 돌아오던 게헨나가 보고 내심 감탄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