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61
01060 9. 비비앙 외전(현대) =========================================================================
“이 녀석! 이 못된 녀석!”
찰싹, 찰싹!
“아야! 아야!”
연달아 엉덩이를 맞자, 수나는 빽 울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곳곳에서 문이 열리며 여러 사람이 몰려나왔다.
“왜 그래요?”
“수, 수현? 무슨 일입니까?”
김수현은 할 수 없이 바동거리는 수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화난 기색은 여전했다.
“아앙-!”
“뚝 안 그쳐? 뭘 잘했다고 울어?”
“몰라! 아빠는 바보야!”
“너……!”
그러나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수나는 울면서 달려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에 이어서 으아아앙, 꺼이꺼이 울어 젖히는 소리가 넘실거렸다.
“하…….”
멍한 얼굴을 한 김수현은 가까이 있던 식탁 의자를 끌고 와 힘없이 주저앉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안솔은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어색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뭔 일이에요?”
“수나가 거짓말을 했다.”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던 게헨나가 담담히 말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필요한 걸 고르고 계산하려는데, 카트에 넣지도 않은 군것질거리가 잔뜩 숨겨져 있었다.”
“아……. 수나가 그런 거예요?”
“정황상 수나가 계획을 주도했고, 마르는 욕망과 협박에 못 이겨 공범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방금 엄청나게 억울해 보이던데…….”
“하도 잡아떼서 CCTV란 것으로도 확인했다. 나와 이이가 다른 곳을 볼 때마다 슬쩍슬쩍 집어넣더군.”
“CCTV까지…….”
안솔은 선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수현의 지극한 자식 사랑을 아는 만큼 그 정도의 일로 때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라면 말을 안 해.”
그때 담배만 뻑뻑 피우던 김수현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 당연히 사주지.”
“그, 그렇죠.”
“그런데 처음에는 딱 잡아떼더니 CCTV 보자마자 다 마르 잘못이라고, 마르가 협박해서 그랬다고 죄다 뒤집어씌우잖아. 말이 돼?”
“아하하하…….”
안솔은 이제 알겠다는 듯이 어설프게 웃었다.
마르가 협박을 했다?
아니.
지옥의 겁화를 뛰어넘는 십천(十天)급 존재가 고작 아기 요정의 위협에 굴복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수나가 확실히 잘못했네요. 그렇죠? 비비앙 언니……. 응?”
동의를 구하려던 안솔이 돌연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까지 같이 있었던 비비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언니?”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기둥 뒤에 기댄 채 가슴에 손을 얹은 여성이 한 명 보였다.
“하아……. 하아…….”
헐떡거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여인은 바로 비비앙이었다.
실제로 비비앙은 좀 전부터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뺨은 약한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듯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슴의 방망이질은 한층 도를 더해간다.
‘내가……. 뭘 본 거지……?’
비비앙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감았다.
방금 본 광경이 뇌리에 각인이라도 된 듯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지나간다.
이내 김수현이 억센 손바닥이 뭔가에 부딪히는 장면이 스치는 순간 눈은 도로 화들짝 떠지고 말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언제나 가지고 있었던 것.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질.
방송이라는 신선한 문물에 잠깐 잊고 있었던 본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본능은 온몸에 오싹오싹한 소름이 끼치게 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회음(會陰)에 찡한 울림이 진동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가슴의 떨림이 멈추질 않아……!’
비비앙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폭풍 같던 금요일 밤이 지나고, 토요일 주말의 아침이 밝았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허락도 없이 김수현의 방으로 들어간 비비앙은 뜻밖의 광경에 직면했다.
“이야, 와서 잘못했어요 사과할 줄도 알고. 우리 공주님, 많이 컸네~?”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두 부녀가 침대에 앉아서 서로 정답게 껴안고 있었다.
“그래. 먹고 싶었으면 사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아빠가 지금까지 수나가 갖고 싶다는 거 안 사준 적 있어?”
“아니. 없어.”
“그리고 마르한테 전부 뒤집어씌우면 어떡해. 잘못을 같이 했으니 같이 혼나야지. 아빠가 어제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아? 응?”
“…….”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김수현.
사탕을 문 채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시무룩한 낯으로 끄덕끄덕하는 수나.
“괜찮아.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지?”
“……응.”
어제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하룻밤 만에 화해한 모양이다.
잠시 후 통통한 볼에 뽀뽀를 받은 수나는 아빠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비비앙을 의식했는지 힐끗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김수현도 그제야 그녀를 보고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왜인지 깜짝 놀란 낯빛이었다.
“벌써 화해한 거야?”
비비앙이 말했다.
“뭐,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노크도 안 하고.”
어깨를 으쓱거린 김수현은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물었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비비앙은 매우 사무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응. 방송 관련해서 도움 좀 받을까 싶어서.”
“뭔, 뭔데?”
김수현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비앙은 밤새 준비한 각본을 침착히 읊기 시작했다.
장문의 설명을 들은 김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진행하는 실력 지향 코너에 벌칙이라는 요소를 섞으려 하는데, 내가 도우미 격으로 출현했으면 한다는 거지?”
“맞아. 별들의 전쟁이라는 게임 알지?”
“알다마다. 나도 하는데.”
“……뭐?”
그 순간 비비앙의 안면에 처음으로 의심이 빛이 서렸다.
김수현도 게임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디가 뭔데?”
“왜?”
“……보여 줄 수 있어?”
“안될 것 없지.”
김수현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차분히 스마트 폰을 꺼냈다.
실은 ‘치녀 거미 비비안’이라는 아이디는 부가 캐릭터에 불과했다.
본래 캐릭터는 따로 있다는 소리다.
즉 방금처럼 냄새를 맡은 비비앙의 의심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이윽고 전적 검색 사이트의 기록을 보여주자, 비비앙의 두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머, 머셔너리 로드? 이게 너라고?”
“아니, 아이디만 보면 감이 오지 않아?”
“말도 안 돼……. 십 강 중 한 명이 너라고?”
“그래 봤자 칠 등. 중하위권이야.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게임 잘하더라고. 특히 일 등에서 삼 등은 완전히 넘사벽이던데?”
별들의 전쟁은 실력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김수현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십 강은 게임을 이용하는 모든 사용자 중 최상위권에 자리 잡은 열 명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별들의 전쟁에서 칠 등이라는 성적은 비비앙에게 있어서 까마득한 하늘과 진배없었다.
“진짜야? 진짜로 네가 치터야?”
“치터라니. 실력이다.”
여담이지만, 치터(Cheater)는 일종의 별칭으로 김수현의 아이디인 ‘머셔너리 로드’를 비꼬는 말이었다.
별들의 전쟁의 랭커면 자연스레 프로게이머 제의나 방송 요구가 쇄도하기 마련인데, 어떤 요청에도 응하지 않아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러니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핵을 쓰니 실제로 나오지 못한다.’ 는 말을 종종 퍼뜨리고는 했다.
“지, 진짜라면 로그인해봐!”
“나 참. 알았어.”
김수현이 바로 게임에 접속해 인증하니 비비앙은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좋아!”
간신히 놀라움을 삼킨 비비앙이 불현듯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뼉을 세게 쳤다.
“잘됐다! 그럼 내용은 조금 변화해서 네가 날 가르치는 건 어때?”
“아하, 벌칙에서 가르치는 걸로 바꾸자고? 괜찮은데.”
김수현이 수긍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비비앙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내 스승이 되는 거지! 그리고 내가 게임을 하다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벌칙이라는 명목으로 날 혼내는 거야! 가령 정신적, 육체적으로 수치심을 준다거나, 아니면 신체 부위 중 일부를 체벌한다 거나……!”
“……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김수현의 얼굴을 본 비비앙은 순간적으로 입을 닫았다.
잠깐이지만 폭주한 걸 깨달았는지 순식간에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는 정말로 이러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떡해. 시청자가 원하는데. 요즘 인기는 점점 떨어지는데, 요즘 방송은 자극적인 코너가 아니면 호응을 못 얻는단 말이야.”
참고로 시청자들은 누구도 벌칙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순히 재미없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우스꽝스러운 연극,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아. 하지만 난 프로 방송인이야. 정말로 하기 싫어도 시청자가 원하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도 비비앙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모든 걸 시청자 탓으로 돌렸다.
“……그래?”
김수현도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한 걸까.
“제발, 방송 수입에서 반 떼줄 테니까. 응?”
비비앙은 사뭇 비장한 어조로 준비한 당근을 꺼냈다.
인기 방송인인 만큼 나름 파격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한소영한테서 한 달에 용돈으로만 수천만 원을 받는 김수현에게 있어서 돈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승낙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 게.”
“정말로?”
“알았다니까.”
“정말이지?”
비비앙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내일부터 바로 가능하지? 어차피 너 요즘 하는 일도 없으니까.”
“뭐?”
“아내들한테 돈 받으면서 생활하는 기둥서방이잖아?”
“…….”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잖아?”
“…………그래. 알았다.”
악의는 없다고 해도 정곡을 사정없이 찌르는 말이었다.
또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기는 했지만, 김수현의 목소리는 돌연히 심상찮게 낮아졌다.
그러나 비비앙은 기뻐하느라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으로 환호하며 방을 나왔다.
“예쓰!”
문을 닫고 나오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하기야 원하는 바를 이뤘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랴.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 비비앙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사실 그녀가 스스로 원한다손 쳐도 다짜고짜 찾아가 ‘나도 수나처럼 엉덩이 찰싹찰싹해줘!’ 라고 말할 배짱까지는 없었다.
아무리 비비앙이라고 해도 그것이 몹시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관건은 어떻게 하면 김수현이 의심하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느냐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방송과 안솔이 조언한 벌칙을 합하는 것.
방송을 위해서라고 하면 김수현도 별말 안 할 테고, 실제로도 이해하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수 년 동안 꿈에서만 그렸었던 상상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그뿐일까?
김수현이 랭커라는 점은 예상치도 못한 이득이었다.
이제껏 베일에 싸여 있던 치터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흥미를 느낀 시청자가 구름처럼 모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말인즉 실력도 상승하고, 방송 인기도 얻고, 수입도 많아지고, 뭣보다 김수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괴롭힘당하고!”
찰싹찰싹도 당하고.
“우헤헤헤헤헤.”
방정맞은 웃음이 터졌다.
촐랑촐랑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곧 나는 듯 방으로 들어간 비비앙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일 할 방송을 열심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비앙은 한창 장밋빛 꿈에 젖어 있었다.
홀로 남은 김수현이 씩 미소 짓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
한편으로는 약속한 합동 방송 기간이 끝난 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불쌍한 그녀는 아직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그러고 보니 선작이 5만이 넘었네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_(__)_
얼마 남지 않은 일상 외전이지만, 끝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