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63
01062 9. 비비앙 외전(현대) =========================================================================
“벌칙의 기준을 정확하게 세웠으면 하는데 말이야!”
“벌칙의 기준?”
“그러니까 최소한 어떤 경우에 벌칙을 받을지 정도는 정하자는 거야.”
“그냥 내가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김수현이 꼭 그래야 하냐는 얼굴로 반문했다.
비비앙은 건방지게도 검지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런 건 미리 정해두는 게 좋아.”
“왜?”
“기준이 흐리터분하면 나중에 반드시 분란이 생기거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야.”
“그런가? 뭐 마음대로 해.”
김수현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이었지만, 비비앙의 주장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차후 모호한 상황이 발생할 때 벌칙을 받네 마네 하는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기준을 일 데스로 잡는 게 어때?”
즉 경기 중 한 번 죽을 때마다 벌칙을 받겠다는 소리였다.
사실 약간 지나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김수현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일 데스 당 벌칙 한 번은……. 너무 과한데.”
“그 정도는 감수하려고. 실력 상승이 목적이니까.”
천연덕스레 말한 비비앙은 화면을 스리슬쩍 곁눈질했다.
“너희는 어때?”
시청자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치터 머셔너리 로드의 등장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벌칙도 받겠다고 했다.
하물며 스스로 가혹한 조건까지 걸지 않았는가.
시청자 대부분은 ‘손수 무덤을 파네 ㅋㅋㅋㅋ’ 라며 비웃었다.
한편으로는 거물을 초대한 만큼 이번 합동 방송에서 뽕을 뽑으려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몰래 반응을 확인한 비비앙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웠던 말들이 방송에서는 ‘방송을 위해서’ 라는 말로 적당히 포장되는 것이다.
“벌칙은 그때 가서 정하기로 하고……. 이제 코너를 진행해볼까?”
의자에 앉은 비비앙의 두 눈동자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내심 프로 방송인답다고 감탄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실제로 그녀는 평소 극도로 혐오하던 저격수들이 오늘은 꼭 출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었다.
시청자가 어마어마한 만큼 경기는 금세 잡혔다.
언제나처럼 거미 영웅 비비안을 선택한 비비앙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게임을 시작했다.
제발 저격해달라고 빌고 빌면서.
그러나.
“와, 장난 아닌데?”
“…….”
“퍼펙트게임이라니. 너도 꽤 하잖아?”
“…….”
결과는 압승.
거기다 김수현의 말대로 성적도 완벽했다.
비비앙은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경기를 앞장서서 승리로 이끌었다.
“내, 내가 원래 이 정도는 해!”
가까스로 선웃음을 지은 비비앙은 서둘러 두 번째 게임을 돌렸다.
그러나 경기가 끝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이번에도 한 번도 죽지 않고 이겼다.
엄밀히 말하면 전 판보다는 활약이 적었으나 팀 운이 좋았다.
같은 팀원이 매우 잘해서 버스를 탄 것이다.
“팀원을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
김수현은 별로 지적할 건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비비앙은 또 한 번 게임을 돌렸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렇게 다섯 번째 경기에 이르렀을 때 비비앙은 해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번째 게임까지 데스 전적은 총 0.
그리고 다섯 번째 경기가 시작된 지 이십 분이 지난 현재 성적은 또 0 데스.
원래 게임이라는 게 이렇다.
한 번 지기 시작하면 계속 패배하는 날이 있는 반면, 드물게도 연승가도를 달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 비비앙으로서는 오늘따라 잇따른 승리가 마냥 야속하기만 했다.
아니.
이기는 건 좋은데 어째서 한 번도 죽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일부러 죽어볼까?’ 라는 발칙한 생각도 했지만, 고의적인 데스는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시청자의 눈치는 굉장히 빠르다.
수만 명 중 한 명도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이니까.
그때였다.
“아~. 오늘 경기 한 번 참 잘 풀리네……. 어, 어어어어!?”
영혼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비비앙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언덕에 숨어 있던 상대편 영웅이 아무 생각 없이 필드를 돌아다니던 비비안을 노리고 불시에 기습한 것이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대응했으나 비비안은 교성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쓰러졌다.
호호코코(HoHokoko2) : 방금 뭐죠? 집중이 끊기신 것 같은데?
마로(TwoMaro) : 그러게요. 넋 놓고 있다가 죽은 건 처음 보네.
시청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올만한 말이었다.
트윙클리토리스(RhcbRhcb) : 그러네? 그럼 일부러 죽었다는 건가? 이건 좀 아닌 듯?
아헤가오(DoublePeace) : 와, 벌칙 받으려고 고의로……. 진짜로 치녀였어?
수간스캇골든피스팅(SMer) : 헐……. 비비앙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요 ㅠㅠ
요피(OpOpLove) : 닉부터 바꾸고 말해 미친놈들아;
잠깐 조용해졌던 채팅창이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벌칙을 받고 싶어서 고의로 죽었다.’ 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하던 비비앙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양팔을 격렬히 휘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야, 김수현! 방금은 실수였어, 실수! 그냥 오늘 게임이 좀 잘 풀려서, 멍 때리다가 죽은 거라고!”
“흠……. 뭐 그럴 수도 있는데, 어쨌든 데스는 데스잖아?”
“아니~! 방심한 거 인정은 하는데, 이건 실수라고, 실수! 이걸로 벌칙 받는 건 좀 아니지?”
“그래, 실수 맞아. 그런데 실수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
정론을 말한 김수현은 화면을 가리켰다.
채팅창을 돌아본 비비앙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좀 전까지 고의성을 의심하던 시청자들이 돌연히 ‘어쨌든 벌칙은 받아야 한다.’ 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빼는 모습을 보이니 반대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이, 이게 웬 떡이지!?’
갑자기 떨어진 떡에 비비앙은 웃음을 터뜨릴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이대로 순순히 수긍하면 고의로 죽었다는 논란이 도로 점화될 소지가 다분하다.
아무리 맹한 그녀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떡을 냉큼 먹기보다는 떡고물을 살살 뿌릴 필요가 있었다.
“아, 진짜! 이건 아니다. 이렇게 벌칙 받는 건 진짜로 아니잖아? 솔직히 이건 인정하자.”
Fellan(dkssudgktpdy) : ㅇㅇ 벌칙 받는 거 인정.
“아 몰라! 나 벌칙 안 받아! 아니, 못 받아! 인정 못 해!”
요피(OpOpLove) : 이 생떼는 또 뭐지? 십 강도 말했잖아. 실수라도 죽은 건 죽은 거라고.
비비앙이 거의 떼쓰듯 징징거리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궈졌다.
의도한 대로 고의로 죽었다는 논란이 쑥 들어간 것이다.
채팅창을 보는 체하던 비비앙은 돌연히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약간 화난 듯한 얼굴로 게임에 집중했다.
워낙 유리했던 만큼 경기는 금세 끝났다.
무섭게 집중한 비비앙은 이어지는 회전(會戰)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세를 몰아 적의 본진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채팅창에는 주야장천 벌칙을 받으라는 말이 우수수 올라오는 중이었다.
잠시 후 승리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 비비앙은 느닷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고개를 떨구더니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괸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 비비앙?”
어색하게 서 있던 김수현이 말문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벌칙을 받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러자 비비앙은 기다렸다는 듯이 왼쪽 눈을 힐끗 떴다.
“아니, 그러니까……!”
“억울한 건 알겠는데, 네가 한 말이 있잖아. 실수로 죽었다고 해도 데스는 데스다.”
벌컥 외치려던 비비앙은 문득 화면을 바라봤다.
잠깐 채팅을 확인하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벌칙 받으면 될 거 아냐! 젠장!”
비비앙은 어쩔 수 없다는 어조로 외쳤다.
“어휴. 오늘 게임도 잘 풀리고 느낌도 좋았는데……. 실수 하나 때문에 기분 잡치네…….”
그러면서도 분한 눈초리로 화면을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좋아. 벌칙은 받겠어. 하지만 미리 경고하는데, 이상한 거 말하기만 해봐.”
다음 순간 채팅창은 또다시 도배됐다.
벌칙을 시청자가 정하기로 한 만큼 각자 원하는 것도 천차만별이었다.
“날달걀 오십 개 먹기? 안 돼. 먹방도 전문으로 하는 방송인으로서 음식으로 장난치기는 싫어.”
“아줌마 파마? 야, 양심 좀 있어라. 고작 일 데스에 뭔…….”
“손바닥 맞기? 쫌! 나 경기해야 하잖아. 손 아프면 게임도 못 한다고!”
“이런 거 말고, 차라리 일 데스 당 팔굽혀펴기 하나는 어때?”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비비앙이 스리슬쩍 제안을 던졌다.
그러나 시청자의 반응은 거칠었다.
안 그래도 언제쯤 벌칙 받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날로 먹으려 하니 거세게 반발하는 것이다.
“투명 의자, 거미 흉내, 춤추기, 옷 벗기……. 넌 강퇴고. 종아리 맞기, 엉덩이 맞기……!”
하나하나 읽던 비비앙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깐만. 그냥 깔끔하게 투표로 정하자. 올라온 것 중 내가 몇 개 골라서 투표로 올릴 테니까, 너희가 투표해. 그리고 가장 많이 득표한 벌칙을 수행할 게. 어때?”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요구를 아우를 수 없다는 건 비비앙도 알고 시청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일 번에는 엉덩이 맞기, 이 번에는 팔굽혀펴기, 삼 번에는 노래 부르기, 사 번에는 투명 의자……. 좋아! 방금 올렸어.”
곧바로 항목을 개설한 비비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시간 제한은 일 분으로 할 게. 딱 일 분이야. 알겠지?”
그리고 쭉 기지개를 켜더니 무릎을 굽히며 방바닥에 천천히 엎드렸다.
카메라가 정면으로 비추는 방향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자세를 취했다.
“뭐 하는 거야?”
김수현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응? 아, 몸이 좀 찌뿌둥해서. 허리도 좀 아프고. 골반이 아주 굳었네, 굳었어.”
고개를 좌우로 꺾던 비비앙은, 문득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 탓에 둔부는 자연스레 위로 한껏 치켜졌다.
여담이지만, 오늘 비비앙은 상당히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상의는 어깨와 팔뚝이 훤히 노출되는 흰색 나시였고, 하의 역시 허벅지 살이 완전히 드러나는 짧고 얇은 돌핀 팬츠였다.
그렇게 입은 채로 작정하고 둔부를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아찔하고도 탱글탱글한 궁둥이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동안 같은 자세만 반복하던 비비앙은, 일 분이 지나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표 좀 볼까?”
긴장한 눈으로 화면을 확인하는 비비앙.
투표 결과는 뜻밖에도 한 항목에 몰렸다.
총 투표 인원 사만 명 중, 일 번 일 데스 당 엉덩이 한 대 맞기에 무려 96%가 표를 던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몰표였다.
……하긴.
몸을 푼다는 핑계로 대놓고 매력을 호소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려나.
입술을 실룩거리던 비비앙은 서둘러 입맛을 다셨다.
“엉덩이 맞기……. 뭐 그래도 살이 많은 부분이니까. 손바닥 맞는 것보다는 낫네. 이걸로 하자.”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쑥 내밀었다.
“뭐해?”
“……어?”
“안 때려?”
“회, 회초리는?”
“회초리?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손으로 때려.”
“?”
김수현은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비비앙을 바라봤다.
아무리 방송이라고 해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암암리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잘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러나 그녀의 얼굴빛은 무덤덤하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히 여기까지는 비비앙의 의도대로 흘렀다.
방송을 이용한다는 아이디어도 좋았고, 연기도 상당했고, 돌발 상황 대처도 적절했고, 진행도 괜찮았다.
하지만 비비앙이 미처 살피지 못하고 지나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수현이 제 3의 눈이라는 사기적인 고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EX 랭크로 진화한 제 3의 눈은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감정은 물론, 속마음이나 생각을 읽을 수도 있다.
김수현이 괜히 봉인해둔 게 아니었다.
“야아~. 괜찮으니까 때려~. 빨리 벌칙 끝내고 다음 경기하게~. 오늘 느낌 좋단 말이야~.”
빛을 발하는 두 눈동자가 흥얼거리듯이 말하는 비비앙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잠시 후.
“……호오.”
김수현의 입꼬리 한 쪽이 씩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