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3
00013 반으로 갈라지다. =========================================================================
박동걸의 제안에 안현은 갈등이 심한 듯 보였다. 아마 박동걸이 아닌 다른 사람이 팀을 만든다고 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현은 직감적으로 박동걸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말이 번지르르 해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둠 컴컴한 냄새를 맡은 것이다.
어찌됐든 명분은 박동걸이 가지고 있다. 말을 어떻게 했든 간에 결과적으론 쩌리 삼총사(안솔, 이신우, 이보림)중 두 명을 품었다.
안현이 갖고 있는 불안감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동생을 버릴 수 없지만 동생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이미 공터의 사건으로 답이 나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안현의 선택권은 없어졌다. 박동걸이 여지를 남겨둠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박동걸한테 유리하게 흘러간다면 안현, 안솔, 이유정이 남겨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리고 박동걸은 그게 제 무덤을 파는걸 모르고 있었다. 나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판이하다. 나는 사람들의 성향과 능력치를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을 판단했다. 하지만 박동걸은 그런 능력도,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나와 박동걸은 서로 원하는 팀이 대한 기준이 다르다. 나는 홀 플레인에 입성 후 도움이 될 동료들을 원했고 박동걸은 자신의 입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팀을 원한다.
즉 이 상황은 어쩌면 내게 호재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일단 어느 편에 더 힘이 실리는가는 나와 김한별의 선택에 달렸다. 나는 자리에 없으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김한별로 쏠리게 되었다. 그 동안 차분히 생각하던 그녀는 주변을 잠깐 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게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 망을 보고 계신 분도 데려와야 할거 같아요.”
이윽고 한참 동안 생각하고 흘러나온 말은 선택이 아니었다. 서로서로 긴장한 얼굴로 김한별의 선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동안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박동걸은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아. 그렇지.”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허락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 데려와. 오면서 그 놈한테도 대충 얘기해 주고 선택을 내리라고 해.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 너도 오면서 그만 단도리 하고. 아. 잠깐만.”
막 몸을 돌리던 김한별의 발을 박동걸의 말이 붙잡았다.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나 그 놈은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러니 오면서 서로 잘 좀 말해줘. 내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게. 뭐 어차피….”
말을 잇던 도중 안현을 흘끗 바라본 그는 뒤에 말을 의도적으로 흐렸다.
“아무튼 너희 둘은 환영한다고. 선택 잘 하길 바란다.”
박동걸의 연기는 한창 물이 올라 화룡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신우는 벌써부터 박동걸이 든든한지 김한별을 보며 작은 파이팅 신호를 보냈다. 일단 박동걸은 이미 이 판의 승자나 다름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는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시작은 꼬였는지 몰라도 역시 나이는 똥구멍으로 먹은 게 아닌 모양이다. 이신우와 이보림은 자신들이 미끼나 정액받이로 놀아날 수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목숨이라는 이름값 앞에 굴복했던가.
김한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개운하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박동걸을 방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는 일부러 자리에서 나온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판은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나와 그에 한해서 윈윈이 될지도 모른다.
박동걸은 주도권을 잡는데 거슬리는 안현과 이유정을 쳐냈고 나는 염두에 둔 네 명중 세 명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아까부터 살심이 솟을 정도로 걸리적거렸는데, 스스로 사라지는 것을 방해한다면 바보 아니겠는가. 인재들이 현란한 말솜씨에 말린 건 답답했지만 어차피 그건 개인들의 문제로 내가 상관할건 없었다. 이제 남은 한 명만 잘 끌어들인다면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풀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박자박.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뒤편에서 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왼팔에 석궁을 장착했다. 김한별만 보면 예전의 ‘그녀’가 떠올라 왠지 나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방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열심히 주변을 살피는 척을 하고 있자 곧이어 나를 발견했는지,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저기….”
“네?”
깜짝 놀란 얼굴로 몸을 돌리자 김한별은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왼팔을 주물럭거리며 팔이 아픈 표정을 짓곤 입을 열었다.
“울음 소리가 한두 번 들리긴 했는데 주변에는 아직 없는 것 같아요.”
“고생 많으셨어요. 의견 조율이 거의 끝나서 이제 그만 오셔야 할거 같아요.”
“그럼 지금 바로 가죠.”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예상대로 김한별은, 나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다시 몸을 돌리자 김한별은 주저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이상한 방향이요?”
“네. 어떻게 됐나면요….”
김한별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 동안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고 싶었지만 김한별은 매우 객관적인 관점으로 핵심적인 내용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좋든 싫든 어느 한쪽으로 얘기가 편향되기 마련인데, 나는 그녀에게 순수히 감탄했다.
“그래서 현재 이렇게 됐어요. 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얘기가 끝난 후 내가 어느 편에 설지 궁금했는지 김한별이 바로 물었다. 이미 마음을 정했지만 나는 고민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얘기가 될진 몰랐네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요.”
“저도 그래요.”
“그쪽은 그 아저씨의 말을 어떻게 생각해요?”
내 물음에 김한별은 잠시 내 눈을 보고는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네. 그 아저씨만 보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때는 아저씨가 한 말에 잘못된 점을 찾을 수는 없었어요.”
이신우와 이보림은 넘어갔다. 그들을 보며 김한별은 고민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녀가 직접 나를 데려오겠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 얘기는 하고 싶었지만 지금도 상당히 시간이 흘렀기에, 난 발걸음을 옮기며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일부분이나마 확인한 이상 돌아가면서 조미료만 치면 될 것이다.
서로간에 말은 없었지만 김한별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건 확실했다. 어느 정도 뜸을 들였다 싶을 즈음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아저씨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
“애초에 자신의 논리의 장점과 허점을 교묘하게 섞었어요. 그러니 틀린 말은 없을 수 밖에요. 장점으로 허점을 잘 포장해 자신의 말을 잔뜩 유리하게 만들었는데요.”
어떠한 대답도 없었지만 나는 더 설명을 해보라는 무언의 시선을 느꼈다. 박동걸이 제법 꾀를 부렸지만 난 김한별을 놓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고민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설명하기로 마음 먹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랑 솔직한 건 하나의 조건이 있어야 해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있는가. 그 아저씨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잘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아니요.”
김한별은 즉각 대답했다.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인상도 별로이고 행동은 팀의 화합을 깨뜨리고 있어요. 그의 불확실한 말을 믿고 팀에 들어가느니 그냥 기존에 있는 사람들하고 남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러니 저는 기존 사람들과 남겠어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김한별은 내 말을 곱씹는지 한창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분도 흐르지 않아 저기 멀리서 사람들이 보이자 그녀가 내 등 뒤로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는걸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들어간 두 사람이 걱정이네요.”
이 말은 김한별도 마음을 정했다는 소리나 진배 없었다. 나는 직구로 들어가는 게 아닌 최대한 완곡하게 돌려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박동걸 그 시발 놈이 이보림이랑 이신우 먹으려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가면 님도 이용당해요.”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나도 불신했을 것이다. 나름 머리 회전이 빠른 것 같아 보이니 조금만 찔러줘도 내 말의 의미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것이다.
이윽고 언덕 위로 두 패로 갈라진 사람들이 눈에 확실히 들어올 정도로 거리는 줄어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상황이랑 달라진 건 없었다.
한편에는 안현을 위시한 안솔과 이유정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박동걸을 내세운 이신우와 이보림이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로 올라온 순간 나와 김한별한테 쏠리는 여섯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
“지금 오는군. 아무튼 망 보느라 수고 많았다.”
벌써부터 뭐라도 된 마냥 구는 박동걸을 보며 무언가 아니꼬운 감정이 치솟았지만 나는 억지로 속을 억눌렀다. 안현의 묵묵한 눈동자. 안솔은 불안한 눈동자. 이유정은 긴장된 눈동자. 이신우의 떨리는 눈동자. 이보림의 힘없는 눈동자. 다양한 눈동자들에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그들한테 바로 들어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내 뒤를 따라오던 김한별의 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아무튼 오면서 대충 얘기는 들었지?”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힘들겠지만 네가 이해 좀 해라. 이것도 다 살자고 하는 거잖아.”
박동걸의 말이 끝나자 이유정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는걸 들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동걸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 팀으로 들어와. 우린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어. 너라면 그리고 뒤에 있는 아가씨도 환영하겠다.”
주변 공기를 감싼 긴장감이 최고로 오르고 모두가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손을 외면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권유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박동걸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김한별을 향해 물었다.
“…그럼 너는?”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물론 김한별 역시 그를 외면했다. 이내 그를 지나치는 우리 둘을 보며 박동걸은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오면서 저 여우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분명 후회할거다.”
“자기 목숨 귀한 줄 알면 남의 목숨도 귀한 줄 아시길 바랍니다.”
“헛소리 하고 있네. 기껏 생각해 줬더니만…. 뭐 마음대로 해. 나도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들일 생각 없어. 나중에 다시 팀에 끼워 달라고 애원만 하지 말라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신우야. 보림아. 그만 가자! 저런 위선에 가득 찬 녀석들과 함께 있다간 우리 목숨도 남아나질 않겠다.”
벌써 통성명도 했나. 이신우와 이보림을 억지로 붙잡고 떠나는 그를 보니 큰 짐을 던 기분이었다. 나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남은 사람들 앞에 섰다. 그들의 눈에는 안도감과 뜻 모를 호의 섞인 감정이 나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안현은 한숨을 푹 내쉬곤 내게 말을 걸었다.
“고생 하셨습니다. 보셨다시피…이렇게 되 버렸네요.”
“흥. 잘됐지 뭐. 기죽을 필요 없잖아요? 지들이 떠나고 싶어서 떠난 건데 멋대로 하게 놔둬요. 죽든 살든 알아서들 하겠지.”
이유정의 가시 돋친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떠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남겨진 게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고.
이 두 말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