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7
00017 반으로 갈라지다. =========================================================================
“유인. 저것들을 유인하는 거야.”
“네? 저 괴물들을 끌어들이자고요?”
비슷하지만, 핀트가 약간 어긋났다.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 멀뚱멀뚱 나를 보았지만, 김한별은 눈썹을 치켜 올린 게 대충 내 말을 알아 먹은 듯 보였다. 아무튼, 어느 정도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니.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한 명이 미끼가 돼서 저 괴물들을 끌고 가자는 소리야.”
난 잠시 말을 멈추고 숲 안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걸 따라 모두의 시선이 다시 숲 안으로 돌아가는걸 보며 말을 이었다.
“소란을 피우면 분명 괴물들이 미끼를 물려고 달려들겠지. 그 상태 그대로 어그로를 유지하면서 저 숲 안으로 유인해 가는 거지. 그리고 그 틈을 타 다른 사람들이 저 담을 넘으면 돼. 그러면 우리는 숲을 벗어날 수 있어.”
일부러 희망찬 어조로 숲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회의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걸 보면 확실히 타당성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작전이 성립되려면 결국 필수적으로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말하지 않다고 뻔하다. 한마디로 누가 미끼 역할을 할 것인가? 좀비들처럼 느릿하게만 걸어도 해볼만하다 여기겠지만 데드맨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뛰는 걸음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유인하는 사람은 아차하는 순간 포위되고 저것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모두 한동안 서로의 눈치만 보았지만, 역시나 머리 회전이 빠른 김한별이 핵심 문제를 짚었다.
“그러면 결국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누가 할 건데요?”
묵묵부답. 숲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 누구도 선뜻 나서기 망설여질 것이다. 그런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가벼운 한숨을 쉰 후 손을 들었다. 엄한 애 보내서 마음 졸이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심적으로 더 편할 것 같았다.
“얘기를 꺼낸 사람이 해야지. 내가 할게.”
“절대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오빠. 한별이 말이 맞아요. 차라리 숨어서 좀 더 기다려요. 응?”
김한별의 즉각 반대와 이유정의 설득. 어차피 이정도 반응은 예상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미리 준비해둔 생각을 말했다.
“계속 기다릴 순 없잖아. 저것들이 언제 우릴 발견할지도 모르고.”
“다른 방향으로 가보는 방법도 있어요.”
이번에도 김한별인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며 나는 반박했다.
“이동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곧 저녁이에요. 탈출하려면 그나마 지금 시간대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김한별에 나는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물론 아까 이유정의 반말에 불편한 얼굴을 했던걸 기억하고 있어서 김한별한테는 아직 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틈이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장소로 가도 지금 이곳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딱히 반박할 거리를 못 찾았는지 김한별은 무거운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속으로는 자신이 미끼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부분이 이들과 박동걸의 차이점 이었다.
박동걸은 이걸 위선이라고 불렀다. 지금 와서 말한다면 박동걸은 나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가식 떨지 말라며 바로 쏘아 붙였을 테지만 이들한테는 언제나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는 그런 형 또는 오빠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아마 박동걸이 나대는걸 자제했거나 쓸모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그냥 보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침묵이 내린 장소에 다시 말문을 틔운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러면요…. 저…. 수현이 오빠가 너무 위험 하잖아요.”
고개를 돌리자 안솔이 발개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날 걱정해준 건가? 기특한 마음에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팔불출로 보이는 안현이 있었기에 그냥 빙긋 웃어주는 걸로 만족했다. 나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는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
“숲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걷어찰 순 없잖아. 어차피 언젠가 이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시기가 좀 일찍 온 것 뿐이고.”
“그래도….”
“스물셋 밖에 안돼서 이런 얘기하는 건 우습지만, 여기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잖아. 이럴 때 안 나서면 또 언제 나서보겠어.”
넉살 좋게 말하자 안솔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안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뭔가 내부적으로 결심한 얼굴 이었다.
“형.”
“응.”
”아까 저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보니 평소에는 걸어 다니다가 사람을 발견하면 뛰는 것 같더라고요. 유인하다 잡힐 가능성도 있어요.”
“그렇긴 해도 빠른 걸음 수준으로 보이던데? 전력으로 달리면 잡히지 않을 자신 있어. 그냥 아침 점호 때마다 하던 구보 한다고 생각하면 돼.”
“설령 우리들이 빠져나가는데 성공해도…. 그…. 오, 오빠가…. 그 나중에는…. 어떻게 나오실 건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한별이 다시금 태클을 건다. 얘 갑자기 왜 이래? 그런데 방금 전에 오빠라고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대꾸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한별씨를 포함한 모두가 지금은 이 숲을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럼 저랑 같이해요 형. 형한테만 그런걸 맡길 순 없어요. 저도 같이 갈게요.”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 안현의 말이 끝나자 안솔은 눈이 동그래지며 그의 옷깃을 꾹 붙잡았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안현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안돼. 넌 애들이랑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
“왜요. 형 혼자서만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잖아요.”
“저 담을 넘어서도 저것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 모르는 경우를 대비해 한 명은 일행을 지켜야 해. 그리고 유인은 혼자서 하는 게 더 편하고.”
“그래도….”
“그리고 넌 동생도 있잖아.”
안솔을 들먹이니 안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안솔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고마움. 걱정스러움. 미안함. 원래의 나는 안솔 같은 애들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왠지 밉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입을 다물었던 안현의 고개가 간신히 끄덕여졌다.
“…그럼 알았어요. 부탁할게요 형.”
“그럼. 나도 살고 싶은데. 한번 믿어봐.”
“네. 믿을게요.”
“믿어도 돼.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지금 바로 행동할게. 다들 몸 숙여. 내가 어느 정도 유인했다 싶으면 현이 네가 바로 애들 끌고 달려가.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다시 돌아오는 바보짓도 하지 말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야 해. 알았지?”
여자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만 모두 착잡한 얼굴 이었다. 어쩌면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과 미끼 역할을 물었을 때 나서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떠오른걸 볼 수 있었다. 석궁을 장전하고 몸을 나서기 전 김한별과 이유정 그리고 안솔이 각각 한마디씩 하는걸 들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오빠…고마워요. 절대 죽지 말아요.”
“몸 조심하세요….”
그들의 진심 어린 걱정에 나는 힘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굿 럭.”
*
나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물론 일행이 숨어있는 곳에서 나왔지만 바로 소란을 피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 소리를 지른다면 재수 없을 경우 안쪽에 숨은 일행이 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재빠르게 주변을 살핀 나는 저기 오르막길 끝에 있는 돌덩이들이 눈에 걸렸다. 저 위로 올라간다면 바깥 상황도 볼 수 있고 데드맨들도 모두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은 전만큼 커다란 둘레를 가진 것들은 없었지만 혼자서 몸을 숨기며 이동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몸을 최대한 숙이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한다. 최대한으로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인고 그것들의 눈에 안 들키고 이동해야 했다. 기도비닉을 유지하는 건 많이 해봤기 때문에 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순간 통과 의례의 1회 차 플레이가 머리에 떠올랐다.
공터에서 박동걸과 이유정이 싸우고 그가 걷어찬 돌멩이로 데드맨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그때 나 혼자 살 궁리를 했고, 혼자 도망가 버렸다. 제대로 방향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이틀간 숲 안을 헤맸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웃음만 나온다.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는데.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숨을 줄이고 발소리를 죽인다. 그 상태로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몸을 착실하게 이동한다. 목표로 한 돌무덤은 썩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돌이 둥글게 깎인 만큼 데드맨들이 쉽게 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돌담 너머로 혹시라도 멀리서나마 마을 또는 건물이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략 스무 개의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동안 단 한번도 들키지 않았다. 어느새 돌무덤 앞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잠깐 살피고 신속하게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탁 트인 전망과 아래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돌담 너머를 바라보니 아쉽게도 마을이나 건물을 볼 수 없었지만 중앙으로 가면 갈수록 발견할 것들이니 큰 걱정은 없었다.
나는 내심 정면 돌파를 포기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 감지로 인한 판단은 예측을 빗나가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는 데드맨들을 보며 나는 서서히 돌무덤 맨 위에 설 수 있었다. 흘끗 일행이 숨어있는 지점을 보니 안현이 머리를 빠끔히 내미는 게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모두를 위해 확실한 미끼가 되야 한다. 나는 현과 가벼운 시선 교환을 한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목소리는 허공을 크게 울렸다. 효과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직방이었다. 아래서 눈에 보이는 데드맨들의 전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이윽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일단은 성공이지만 약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두 팔을 휘휘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도발하자 점점 숲 안에서 나오는 데드맨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저기 멀리 있는 오른편에 있는 데드맨들까지 끌어들이려면 돌무덤 위에서 어느 정도 버틸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들아아아아아! 나 여기 있다아아아! 여기를 보라고!”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발성으로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그와 동시에 괴물들이 대규모로 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걸 느꼈다. 가장 나와 가까이 있던 데드맨은 어느새 내가 있는 돌무덤에 도착해 어떻게든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소리는 더 지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먹잇감에 굶주려 있었는지 근방에 있는 모든 데드맨들을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걸 보며 담담히 한마디 툭 내뱉었다.
‘옛날 생각 나네.’
나는 점점 모여드는 괴물들을 보며 진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왼팔에 장착한 석궁을 들고 화살 세 자루를 꺼냈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석궁에는 하나를 시위에 걸고 두발을 장전시킬 수 있었다. 한번 장전하면 세 발을 쏠 수 있다.
바로 내 앞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데드맨의 미간을 겨누기 전 나는 다시 일행이 숨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