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77
00176 황홀경 =========================================================================
“오랜만의 호출이네. 무슨 일이야?”
테이블에 앉은 후, 비비앙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상용과 얘기를 먼저 꺼낼까 아니면 영약 연단에 관한 얘기를 먼저 꺼낼까 고민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레어 클래스 로 얘기를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매듭 지을 일들이 있어서 불렀어. 사용자 신상용에 관한 것도 있고, 연단에 관한 것도 있고.”
“아하. 그러면 저번에 얘기해 준 것들?”
“그래. 이제 신상용씨에 대해서는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잖아. 그 동안 꽤 가까이서 지켜 봤을 텐데. 네가 보기에 그 사용자 어떤 것 같아?”
“우웅.”
비비앙은 눈을 감고 고심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약 3분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반짝 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주고 싶어. 사람 됨됨이나 성품 면에서 보면 흠 잡을 데는 없는 것 같아. 거기에 성실하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상성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능력 상성이라면, 조화의 마방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와 비비앙은 계약으로 묶인 관계. 그런 만큼 그녀는 내 부탁을 열심히 수행 했을 것이고, 방금 전 한 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답을 말했을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나 또한 그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곧바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보면 너무 늦게 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레어 클래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면 최대한 빨리 그에게 를 지급 하고 그에 맞는 교육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좋아. 이만한 제자는 구하기 힘드니 애초에 바라던 바였거든. 히히. 신난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비비앙은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아마 그가 이 사실을 알면 또 얼마나 고맙다고 인사를 할지 벌써부터 쓴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챙겨주지 못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없잖아 있었는데, 이로서 조금이나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신상용씨 얘기는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고.”
말을 마친 나는 미리 준비해둔 것들을 비비앙의 앞으로 꺼내 놓았다. 80 이하 +4 체력 영약, 70 이하 +2 체력 영약, 비비앙의 영단, 상급 마족 벨페고르의 심장, 호렌스의 마정석. 연금술사들이 보면 하나같이 군침을 뚝뚝 흘릴만한 재료들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료를 확인한 비비앙도 침을 뚝뚝 까지는 아니지만, 졸졸 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는 흘리고 있었다.
“와.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
연신 감탄성을 내뱉는 비비앙을 보며, 나는 80 이하 +4 체력 영약을 들어 올렸다.
“이 영약을 복용한 사용자는, 체력 능력치를 소폭 상승시킬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그 상승폭을 더 늘리고 싶다는데 있지. 어때. 가능하겠어?”
“체력 영약과 이번에 새로 처치한 놈의 마정석을 추가 했구나. 으~음.”
어느새 천진난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연금술사로서의 비비앙은 항상 진지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재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끔씩 손을 요렇게 조렇게 움직이는걸 보니 지금쯤 머리 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초조한 마음은 들었지만, 빨리 대답하라고 윽박지르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진득하게 앉아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릴 뿐. 몇 분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다. 이윽고, 비로소 계산을 끝냈는지 비비앙은 고개를 들며 시선을 올렸다.
“그래 어때. 할 수 있겠어?”
“김수현. 혹시 내가 예전에 해줬던 말 기억해?”
이 정도의 재료를 이런 열악한 공방 환경 속에서 날리기 아깝다고 했던가. 그녀로서는 드물게 논리 정연한 말을 했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두 번 주억이자 비비앙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뮬을 떠난다고 했지? 언제 떠날 생각이야?”
“곧. 준비가 최대한 되는대로 빠르게 뮬을 떠날 건데. 그건 왜.”
“알겠어. 그럼 당분간 이 재료들은 내가 맡고 있을게. 따로 연구에 들어가봐야 할 것 같거든.”
“오호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주섬주섬 재료를 챙기는 그녀를 보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비앙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아. 아니, 솔직히 모르겠어. 신상용의 조화의 마방진이 없었다면 아마 실패 가능성이 더 높았을 거야. 일단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공방도 건설해야 하고,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연단 과정을 거쳐야 해.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도 어마어마하고. 아무튼 곧 떠날 뮬에서 만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 동안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있을게.”
“그 정도야. 그럼 부탁한다.”
“맡겨두셔. 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이름을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 보이겠어.”
“이야.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러다 실패하면….”
오늘따라 예쁜 말만 골라서 해서 그런지, 비비앙이 더욱 귀엽게 보였다. 막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보자 순간 속에서 못된 장난끼가 솟구쳐 올랐다. 해서, “무지 괴롭힐 줄 알아.” 라고 이으려는 찰나,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다물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왠지 이 말을 꺼내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실패하면? 나 벌줄 거야?”
그녀의 음성에는 묘한 톤이 섞여 있었다. 아니 괴롭히기는 했어도 벌을 준 적은 없었는데. 비비앙은 돌이킬 수 없을 것들을,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직감에 감사하며 차분히 말을 바꿀 수 있었다.
“…벌은 무슨. 네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성공하면 무척 기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나에게 있어 체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그런 만큼 성공하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소…원?”
“물론 아주 허무맹랑한 건 불가능해. 그러나 들어보고 합당하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소원을 들어줄게.”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하게 피어 오르는 한 줄기 불길을 볼 수 있었다.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해, 순간 말을 실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얼마 있다가 비비앙은 내게 한번 더 확답을 받은 후 몸을 돌려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에는, 알 수 없는 비장미가 감돌고 있었다.
*
에서 돌아온 이후 시간이 한층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어둑하게 깔린 땅거미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지금 시간대가 어두운 밤 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연주가 아침에 말했던 야심한 밤으로 볼 수 있는 시간대였다. 나는 입에 물고 있는 연초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숙하게 빨아 들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열 번. 그렇게 총 열 번을 빨아 들이자 어느새 서서히 연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애꿎은 땅을 향해 꽁초를 튕기고 나는 조용히 문을 열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일행들은 모두 잠들어 있겠지. 라이트 스톤이 꺼진 1층 로비는, 으레 보던 광경 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방으로 고개를 돌리니 미약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방 안에 있는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그대로 손을 올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둔탁한 소리가 두어 번 울리고, 곧이어 “들어와요.” 라고 말하는 고연주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렸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들어서자 아담한 책상 위에서 유려하게 깃펜을 놀리는 그녀의 손놀림을 볼 수 있었다.
“아. 잠시만 기다려요. 거의 다 썼으니까. 부랑자 말살 계획에 의해 도주한 부랑자들이 살짝 불안한 낌새를 보이고 있는 부분인데, 아직 확실치 않아서 들어온 정보를 종합하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정보를 말해주지 않았다기 보다는, 온전하지 않은 정보라서 나에게 말해줄 수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약 한달 후 있을 난을 벌써부터 눈치 챈 그녀의 정보력에 새삼 경이로운 감정이 들었다. 이래서 1회차 시절 가 고연주를 척살 1순위로 올려 놨었군.
고연주는 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기록하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가끔 주변에 흐트러진 다른 기록들과, 지도를 보더니 작성하던 기록을 찢고 다시 적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 끝났다. 겨우 다 적었네~.”
고연주는 깃펜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던진 후,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로 몸을 돌렸고, 작성한 기록들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 기록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가 재빠르게 빼는 바람에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고연주는 고개를 여러모로 꼬더니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이 기록을 지금 드리면, 왠지 받고 그냥 나가실 것 같네요.”
“글쎄요.”
내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녀는 곧 책상 위로 기록을 놓아두고는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손가락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을 내던 라이트 스톤은 일순간 빛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빛은 사라지고 방 안에는 어둠이 찾아 들었다.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나는 고연주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살며시 다가오는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제가 누누이 말씀 드렸잖아요. 사용자 김수현은 조금 쉴 필요가 있어요. 요즘 다시 슬슬 발동 걸리는 것 같은데요.”
어느 틈에 이렇게 근접하게 다가섰는지. 목 부근에 달콤한 숨결이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정면을 바라보자, 은 두 팔을 뻗어 곱게 매인 의 한 쪽을 잡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이 야심한 밤에 제가 수현씨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건가요?”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하자 화가 났는지 고연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여관 밖에서 연초를 태우면서 같이 태웠다고 생각 했던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속으로 자꾸만 한 명의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인물의 정체는 한소영이 아니었다. 바로 사용자 정하연 이었다.
나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첫 만남 때부터 고연주는 나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시해 왔고 유혹도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가 싫지 않았다. 홀 플레인에서 마음이 맞는 사용자들이 하룻밤을 보내는 건 아무런 일도 아닌데. 그녀에게는 이미 말도 다 해놨는데. 방문을 열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 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나는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눈을 뜨고 말았다. 시선을 아래로 숙이니 붉은색 허리띠가 스륵이 풀려나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완전히 풀린 허리띠는 한 쪽은 고연주의 손에 들린 상태로, 나머지 한 쪽은 땅바닥에 닿은 상태로 떨구어졌다.
의 앞섬이 열림과 동시에 고연주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며 내 가슴에 기대려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고연주는 내 반응에 놀랐는지 기대오려던 고개를 멈췄고, 멍한 얼굴로 내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럼에도 거두어지지 않는 시선과 불편한 침묵에, 나는 간신히 그녀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어둠 속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애를 쓰자 곧 숨길 수 없는 상처감에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문득 그 동안 그녀가 여태껏 나에게 했던 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 했다.
내가 지금 한 발자국 물러섰다는 것은, 일종의 거부 표시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홀 플레인에서 성관계에 대해 거부를 표하는 경우는 하나가 있다. 혹은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연주를 받아 들이고 싶은 마음과, 사용자 정하연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에서 어우러져 일어난 괴리감. 즉,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 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받아 들이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이윽고, 고연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사용자 정하연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미쳤나 봅니다. 수현이도 알고보면 의외로 순정파 라니까요. 하하하. 후기를 길게 쓰고 싶지만, 밤새 작업한 터라 너무 졸리네요. 한 숨 자고 오늘은 공부 좀 해야할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
PS. 고연주의 행복을 위하여.
『 리리플 』
1. 破天魔痕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하. 요즘 쿠로시온님이랑 치열하신것 같습니다.
2. 사람인생 : 부활 축하 드립니다. 어서 헤어짐의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시기를. 아. 그리고 도배는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껏 많은 부탁을 드렸는데, 이번에 또 도배를 하신다면…. 저도 조금은 화가 날것 같네요. 물론, 더는 도배를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함께 이용하는 코멘트란 인만큼, 도배는 자제 부탁 드립니다. ^^
3. 멜퓨리언 : 하하. 고맙습니다. 이상하게 고연주가 인기가 많네요. 제 눈에는 한별이가 가장 이쁜데 말이죠. 🙂
4. Groover : 하하하.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이죠. 😀
5. 고장난선풍기 : 정작 문제는 수현이한테 터졌지요. 하하하. 사랑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이고, 사랑을 잃는데는 익숙한 아이니까요.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