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18
00217 전조 =========================================================================
“2, 2차 타격이 온다! 피해라!”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 외침대로 피할 여유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허공을 가득히 메워오는 공격 마법들을 볼 수 있었다. 노란 번쩍임도, 이글거리는 불타오름도, 날카로운 바람소리도. 명백한 살기를 담고 찢어발길 듯 다가오는 마법들을 보자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시냇물처럼 흐르는 핏물에 미끄러져 연신 몸을 고꾸라뜨리고 말았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무릅쓰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동안에도. 온 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선제 타격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문득 까닭 없이 유현아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살짝 웨이브 진 연갈색 머리카락. 빙긋 웃고 있는 자애로워 보이는 얼굴. 흰 어깨를 훤히 노출한,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는듯한 하얀 발키리 코트. 상대편 사용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유현아.
항복을 종용한 유현아의 권고에 코웃음을 친 우리들은 곧바로 선제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군 마법사들의 선제 타격에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었다.
그 순간 그들의 군세를 감싸는 거대한 희뿌연 막이 전방으로 펼쳐졌다. 이윽고 그 막은 아군의 마법들을 막아내는 걸로 모자라, 모조리 튕겨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정확히 우리들을 향해서.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 정도의 대단위 방어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김수현! 일어나! 일어나라고!”
누군가의 외침이 다시금 내 몸을 강타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펑! 펑펑! 펑펑펑!
뭔가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듦과 함께, 어느새 내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타는듯한 기분이 들다가 어느 순간 땅바닥을 거세게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입으로 들어오는 찝찔한 피를 뱉을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
안솔의 말투는 비교적 침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급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차분히 속을 가다듬었다. 나도 솔이를 믿고 솔이도 나를 믿고 있다. 여기서 자꾸 캐물으며 어물쩍거리기보다는, 그녀 말대로 재빠르게 행동할 필요를 느꼈다.
다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었다.
“그래 알겠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 이 두 개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을까? 가령 한쪽을 먼저 간 다음에, 다른 한쪽을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죄송하다고 한 거에요. 지금 두 개를 선택하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일단은 빨리 하나를 고르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늦을 거에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안솔의 말을 지금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여지가 없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그녀가 가리킨 방향들을 응시했다. 앞쪽, 그리고 왼쪽. 이윽고 나는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왼쪽으로 가자.”
“네. 이대로 쭉 가시면 되요.”
안솔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층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마력 감지를 서서히 끌어올리기로 했다.
길은 낯설었다. 이스터 에그2로 이름을 붙여도 될 정도로 생소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급히 안솔을 데리고 막 좁은 길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전방으로 아무렇게나 쌓인 무거운 박스들과 살짝 낡은 컨테이너가 비죽 모습을 드러낸 찰나, 감지 끝자락에 뭔가 알 수 없는 기척이 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 기척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걸린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감지를 확장시키자, 곧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둘. 둘이다.’
두 명의 사용자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대로 나가면 둘에게 내 몸을 노출시킬 수 밖에 없고, 빙 돌아서 가면 그만큼 시간이 소비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 오른쪽 사이로 사잇길이 나 있는걸 발견할 수 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얼른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
“……!”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가던 도중, 뭔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 끝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최소한의 시야를 확보한 후, 바로 마력을 일으켜 안력과 청각을 동시에 돋웠다. 그리고….
“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 건데. 나는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
“너는 관심이 없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하! 토, 통과 의례에서 너한테 당했던 일을 잊었을 것 같아?”
“너….”
‘박환희잖아? 저 놈이 왜 여기에 있지?’
전방으로 트인 공간에는 두 명의 사용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용자였다. 그리고 박환희 앞으로는, 키가 조금 작아 보이는 사용자 한 명이 주눅든 자세로 서 있었다. 신장도 작고 체구도 왜소해 언뜻 보면 여자의 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한결. 아니, 한결아. 그때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진정하고, 잠시만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자, 자꾸 이러면….”
“…이러면?”
“네, 네 실체를 모두에게 까발리겠어. 그때 나랑 누나랑 너 때문에 겪었던 일을 모두에게 공표할거야.”
“큭. 뭐라고?”
백한결이라 불린 사용자가 발악하듯 외치자, 박환희는 미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는 백한결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백한결은 재빨리 몸을 빼려고 했지만, 낚아채듯 그의 어깨를 잡은 박환희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해봐.”
“뭐?”
“해보라고. 네가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그때 나와 너희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기억 안나?”
“그, 그건.”
백한결은 더듬거리는 소리를 냈다. 박환희는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표정을 풀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 답답한 친구야.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때 그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너희 둘을 그렇게…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래서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는 소리야? 그때 죽을뻔했던, 간신히 살아남고 배신감에 치를 떨던 우리 입장은 생각도 안하고?”
“그래. 화가 날 거야. 나라도 화가 나겠지. 이해해. 그래도 일단 사적인 감정은 집어넣어봐. 현실을 보자고. 지금 우리들은 지구, 현대와는 다른 아주 다른 세상에 와 있잖아.”
“됐어. 그 얘기는 지겹도록 들었어. 네 정신 나간 계획에 왜 나랑 누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지?”
백한결이 박환의를 향해 정신 나간 계획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풀렸던 그의 표정은 다시금 급격히 얼어 붙었다. 이윽고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백한결을 매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갔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 어찌됐든 여기 있으면 안전하잖아! 그냥 순순히 따르면 될 일을 왜 그렇게….”
“멍청아. 3개월, 3개월만 있으면 이 안전도 끝이야. 그때부터는 잠잘 곳도 없어지고, 밥도 먹여주지 않는다고. 우리들이 알아서 살아야 해. 그럼 클랜에 오퍼를 받지 못한 사용자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
“흥. 너한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텐데. 왜 그런걸 신경 쓰는 거지?”
“왜 해당이 없어. 통과 의례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해온 동료를 이대로 버리라고?”
“네, 네가 동료를 언급하니 되게 웃긴다. 그리고 너도 어차피 그 사람들이랑 거래를 했다며? 그런 주제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나 있어? 그, 그리고….”
백한결의 말에 박환희는 얼굴을 무섭도록 일그러뜨렸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백한결은 이내 서서히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박환희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지그시 응시하다가 곧 한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거듭 말하지만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그렇지만 네게 말해준 계획은 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아무것도 기반이 없으니까. 거래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살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나, 나는 그런 거 몰라. 좋아 좋다고. 네 계획에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는 좋다고 쳐. 그, 그럼 하고 싶은 사람들이랑만 하면 되잖아. 왜 애꿎은 나랑 유나 누나를 끌어 들이려고 하는 건데? 제발 부탁이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게. 그러니 우리한테 관심 좀 가지지 말아줘. 제발….”
백한결은 혼신의 힘을 다한 듯,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박환희는 곧바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백한결은 잡지 않았다. 이윽고 주저앉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박환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박환희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빛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네 힘이 필요해. 네 힘은,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 굉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아, 아니.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힘이라니?”
“시치미 떼지마. 유나씨가 이미 다 얘기한 상태라고. 네가 가진 힘으로, 우리는 돌파할 수 없었던 그곳을 너는 5일차 만에 통과했다고 들었어.”
“뭐, 뭐라고? 누나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설마 너희들 누나한테…!”
‘뭐라고?’
박환희의 말을 들은 순간 놀란 건 백한결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대략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둘의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1. 이름(Name) : 백한결(0년차)
2. 클래스(Class) : 신의 방패(Arousal Secret Aegis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천의 재능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18)
7. 신장 · 체중 : 173.7cm · 58.8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1. 되비침(Rank : D Zero)
1.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Rank : C Plus)
1. –
2. –
3. –
‘미친, 각성 시크릿 클래스? 아니, 신의 방패는 또 왜 지금 등장해?’
각성 시크릿 클래스. 1회 차에 단 두 번 등장한 직업. 그것을 본 순간 크게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간신히 입을 다물어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 그리고 사기적인 사용자 정보에 대한 놀라움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한꺼번에 밀고 들어왔지만, 나는 애초에 정신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안솔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감정들은 잠시 미뤄두고, 눈 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옳았다. 자꾸만 들뜨려는 마음을 다듬으며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네 여자친구한테 손끝 하나 건들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그녀 스스로 나를 찾아왔다고.”
“거, 거짓말 하지마. 누나가 그랬을 리 없어. 어째서 너 같은 놈한테….”
“한결아. 형이야. 그렇게 말하지마. 그리고 그건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잖아. 금방 들통날 일 가지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형은 무슨. 우릴 버리고 튄 주제에….”
그의 주장에 할 말이 없는지, 백한결은 침음하는 소리만 흘렸다. 박환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쭈그려 앉으며 백한결과 눈 높이를 맞췄다.
“한결아.”
“…….”
“네가 왜 그토록 스스로를 숨기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오죽 답답했으면 네 여자친구가 나한테 찾아왔겠어? 똑같은 일을 겪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나를 미워할 텐데 말이야. 왜 나한테 그 정보를 알려줬는지 잘 생각해봐.”
“그, 그럴 리 없어. 누나가, 누나가 그걸 너한테 말했을 리 없어….”
“널 위해서 말한 거야. 생각해 봐. 너도 지금까지 직접 보고 들었을 거 아니야. 네가 보기에 이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자기네들끼리도 대놓고 치고 받고 싸우는 사람들을? 지금이야 우리를 위해주는 척 하지만 수료 후에는 몇몇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하, 하지만.”
“그래. 네게 말한 대로 나는 거래를 했어. 하지만 그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어찌됐든 우리들은 아직 힘이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자기네들 입맛에 따라 여러 갈래로 찢기느니 나는 내 방법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 힘은 앞으로 우리들이 자리를 잡는데 굉장히 도움이 될 거야.”
우리가 아니라 너 자신이겠지. 나는 씹어먹듯이 내뱉고는 차분히 속을 진정시켰다. 여전히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초반에 완강히 거절하던 백한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움찔움찔 거리는 것을 보니 박환희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박환희 또한 백한결의 상태를 캐치했는지, 한층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야 저 표정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 알 수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 볼 정도였다.
곧이어, 그는 아래 주저앉은 사용자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곧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