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2
00022 함정의 도시. =========================================================================
잠깐의 해후를 나누고 나를 비롯한 모두는 중앙 거실에 모여 앉았다. 안솔이 보이지 않았지만 옆 방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는 게 아직도 정신을 잃은 상태인 모양이다.
모두가 있는 거실에는 뜻 모를 불안한 기운이 한껏 감돌고 있었다. 흡사 고요한 폭풍전야를 앞둔 기분. 아무래도 좋지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감동적인 재회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건 생각도 못했기에 내심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안현의 어색한 얼굴이 보이고 이유정과 김한별은 서로를 보며 씩씩 거리는 게 의견차로 인해 서로 갈등이 터진 것 같았다. 마지막에 김한별이 소리 지르는 게 얼핏 들리긴 했지만 자세한 일은 나중에 알아볼 생각 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힘 없는 얼굴을 한 안현 이었다.
“수현이 형.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네요. 형 덕분에 숲을 벗어난 건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핑계가 될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안현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당할 때는 당당하지만 굽힐 때는 굽힌다. 성향이 중립과 중용이라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안현의 정중한 사과에 나는 고개를 흔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너희들이 보이지 않아서…. 처음엔 조금 당황스럽긴 하더라.”
“죄송합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해도 돼. 너희들한테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런데 네 동생이 보이지 않네?”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야, 안현. 잠깐만. 그거 내가 말할게. 괜찮지 오빠?”
안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이유정이 재빠르게 말을 끊으며 나섰다. 어느새 나한테도 말을 놓아버린 그녀를 보며 참 붙임성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하면 차분한 김한별한테 듣고 싶었지만 지금 심기가 불편한지 미간이 모인 게 보였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오빠가 숲 안으로 그것들을 끌고 들어가고….”
안현도 동의한걸 확인한 이유정은 김한별을 흘끗 노려본 후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은 부족한 부분은 많았지만 그만큼 간단하고 명료했다. 애초에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만큼 추가로 설명을 요구할 부분은 없었다. 다만….
“허공에서 유령 같은 게 나타났다고?”
“응.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 마치 완벽한 투명이 아니라는 느낌? 대충 날개가 달려있는 것 같은 형체는 어느 정도 보였어. 이동하는 경로도 보이고. 그런데 현이 아무리 칼로 베도 도저히 쓰러지지를 않더라.”
이 부분은 조금 더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어 고개를 돌리자 안현은 눈을 감았다. 그때를 회상 하려는 모습 이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정이 말이랑 비슷해요. 있는 힘껏 베었는데 그냥 공기만 가르는 기분이 들었어요.”
공기만 가른다. 형체만 보이고 완벽한 투명이 아니다. 날개가 있었다. 세 개의 조건을 종합해본 나는 이내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레이스다. 불투명한 투명인간과 날개가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단박에 레이스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레이스는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는 괴물이다. 사람의 몸을 통과하면서 정신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구사하는데 안현이 그들의 공격을 십 수번을 버텼다고 하니 통과의례에서는 나름 조절을 해놓은 것 같았다.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 일행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레이스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피한 걸까? 나는 겸사겸사로 안솔을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그럼 그것들 때문에 네 동생이 다친 거야?”
내 물음에 안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현의 이야기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레이스들은 안현의 저항이 가장 격렬한걸 보고는 그를 집중해서 공격했다고 한다. 당연히 안현은 고통스러워 했고 종래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칼과 방패를 떨어뜨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를 위기에서 구한 건 안솔이었다.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그 부분은 안현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이유정도 김한별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냥 안솔이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그녀의 전신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자신들을 공격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직후 안솔은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전부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현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불안한 얼굴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솔이 괜찮은 거겠죠? 다시 일어날 수 있겠죠?”
“몸 상태는 어떤데.”
“숨은 고르게 쉬어요. 맥박도 정상이고요. 그런데 가끔 뭐가 아픈지 얼굴을 일그러뜨려요. 신음 소리도 간간히 흘리네요.”
마력 오버 드라이브. 설마 안솔이 벌써 마력을 발현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나는 처음 시작할 때 마력 수치가 낮아 고생을 정말로 많이 했었다. 또한 통과의례를 지나 홀 플레인에 입장 후 검기를 뽑아내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편이었다.
하지만 안솔은 시작부터 75란 마력 수치를 가지고 시작하니 다를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무의식의 세계라는 건 연구라는걸 할 수 없는 분야였으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지금 수련 되지 않은 육체로는 75 포인트의 마력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무리만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한번 봐야 알겠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마.”
“그, 그러면 지금 좀….”
급하게 입을 여는 안현을 보며 참 어지간하다라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한 부드러운 손길이 내 팔목을 착 붙잡았다. 왼쪽 팔목에 느껴지는 말랑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이유정이 나를 보고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야, 안현. 넌 방금 돌아온 오빠한테 그게 할 소리냐. 오빠. 배 안고파?”
“응? 그냥 참을만한데. 일단 안솔부터….”
“이미 우리가 돌아가면서 다 봤어. 오빠가 의사가 아닌 이상 나중에 봐도 되잖아. 일단 우리 얘기도 들었으니까 오빠 얘기도 해줘. 잠시 요기거리 만들어 올 테니까 그거 먹으면서. 응?”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럴까. 예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래도 챙겨준다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유정의 발언에 안현도 분위기가 조금 풀린 듯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은 이거 드세요. 아까 조금 마시다가 챙겨둔 거에요.”
“응? 아. 고마워요.”
김한별이 품 속에서 물을 꺼내 나에게 건네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유정은 김한별이 건네 물을 탁 치며 다시 그녀에게 되돌려 버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김한별이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무슨 짓이에요?”
“넌 네가 먹던 거 주니? 오빠한테는 새 걸로 드릴 거야. 그건 네가 마셔.”
“너희들 지금 무슨….”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유정은 냉큼 일어서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무언가 주섬주섬 챙기고 이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무언가를 만들기는 하는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떨떠름한 기분으로 안현과 김한별을 바라보자 안현은 어색한 얼굴을, 김한별은 차가운 얼굴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외의 사태였지만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애들은 다 먹었어?”
“…예 형. 저희들 먼저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서…. 하하.”
“아니야. 잘했어. 내가 언제 온다고…. 마냥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지.”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안현의 말에 대답하자 내 눈 앞에 새 생수 병이 탁 놓였다. 벌써 뚝딱 만들어 왔는지 내 앞에 접시를 얌전하게 내려 놓는데 이게 내가 아는 이유정이 맞는가 싶었다. 접시에는 크래커 비슷한 비스켓에 통조림 참치를 얹은 참치 크래커처럼 보였다. 나름대로 예쁘게 만든다고 노력한 티가 났다. 이유정은 손수 물병도 따주며 억지로 꾸민듯한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짜잔~! 이유정님이 만든 스페셜 크래커 등장이요!”
“오. 맛있어 보인다. 어디 나도 한입…. 읔!”
침을 꿀꺽 삼키고 얼른 손을 내뻗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저지했다. 안현이 벌개진 손자국을 쓰다듬으며 불만 어린 얼굴을 했으나 이유정의 도끼눈에 이내 작게 투덜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치사하다. 먹는 것 가지고 이러기냐.”
“오빠 먹일라고 만든 건데 네가 왜 먹어. 그리고 오빠도 아직 안 먹었는데 먼저 손대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체.”
“오빠. 먹어봐. 맛은 보장할게.”
“으, 응? 그래. 고맙다. 잘 먹으마.”
여전히 투덜거리는 안현과 흥 하며 고개를 팩 돌린 이유정을 보며 나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크래커 하나를 집어 들고 입으로 꿀꺽 삼키자 싸구려 참치와 비스킷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별미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물론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맛은 있었기 때문에 꼭꼭 씹어 먹었다.
다행히 초반보다 분위기는 많이 풀린 것 같았다. 크래커 하나를 더 집을 즈음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스무 마리가 넘는 데드맨들을 전부 조졌다고는 말할 수 없어 적당한 각색은 할 생각 이었다. 이유정한테 맛있다고 칭찬한 후 나는 바로 숲 안에서 어떻게 유인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 그럼 그때 물릴 뻔 했던 거에요?”
“최대한 S자를 그리면서 나무 사이로 도망가고 있었거든. 설마 나무를 지나가는데 바로 옆에서 튀어 나올 줄을 몰랐어. 아마 왼손이 조금만 더 옆으로 갔더라도 분명 물렸을 거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섬찟해.”
“대박…. 그럼 진짜 우리 오빠 못 볼 뻔 했던 거네.”
“큭큭. 형. 말도 마요. 이유정 얘 형 오기 전까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갑자기 칼을 들더니 빨리 오빠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아직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완전 찌를 듯이 설쳤다니까요?”
“너 죽는다? 그 정도로 오버하지 않았거든?”
“거봐. 인정하네. 결국 하긴 했다는 소리잖아.”
“이게 진짜!”
둘이서 아옹다옹 다투며 낄낄거리는 안현과 이유정을 보며 내심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차갑게 굳어 있는 김한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과는 다른 냉한 얼굴로 우리들을 응시하는 게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사늘한 공기 한줄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별일 아니겠다 싶었는데 김한별이 마지막에 소리 지른 말을 왠지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되는 무언의 직감이 들었다. 나는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안현과 따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