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21
00220 Many =========================================================================
‘뭔가 조금 이상한데.’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 흐름에서 뜻 모를 이상한 내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북녘 클랜의 교육 교관이 입실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교육 교관에게서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즈음 손이 부족했는데 지원을 와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 드린다 등의 의례적인 인사말이었다. 나 또한 웃으면서 화답을 해주긴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당연히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교육에 들어간 이후 나는 신규 사용자들의 얼굴을 철저히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박환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넘어가고, 그의 주변에 앉아있는 사용자들의 얼굴을 되새김질하는데 주력했다.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로 미루어보면 그의 계획에 동조하는 인원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백한결과 차유나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초반을 제외하고는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교육 중 가끔 서로 바라보며 빙긋 웃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교육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 감을 믿기로 했다. 아까 처음 느꼈던 묘하게 불쾌한 감정이 너무도 강렬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죄송하지만 부탁 드릴게 있습니다.”
“네? 네. 말씀하시죠.”
이론 교육 시간이 끝나고 잠시 휴식이 주어졌다. 그 와중에도 한창 제 3의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교육 교관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고유 능력을 비활성화시킨 후 고개를 돌리자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북녘 클랜원을 볼 수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못하고 있었네요. 저는 북부 일반 도시 파멜라의 대표 클랜, 북녘 소속 장윤호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간부라는 직책을 갖고 있죠. 갓 4년 차로 올라간 사용자 입니다.”
“아 네.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입니다. 0년 차 입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은데.’
나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장윤호는 어색한 미소만 흘리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하. 부탁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고…. 다음 시간에 교육을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이라면…?”
“시범 교육 때 나승혜씨가 제법 꼬아서 가르쳤거든요. 제법 난이도가 있다 보니 신규 사용자들이 실제로 연습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실전 교육에 들어가게 되면 한 명씩 붙잡고 개인 지도를 해야 하는 사용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정 그러면 부족한 사용자들만 따로 모아 보충 교육을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체 인원도 38명에 불과하니 별로 많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요.”
내 말에 장윤호는 과도하게 보일 정도로 손을 휘젓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게 말이죠. 이 교육이 끝나고 또 곧바로 수업 일정이 있다고 합니다. 황금 사자 클랜의 성유빈양이 주도하는 수업이라 무조건 참가시켜야 해서요. 그리고 본 교육과 연계되어 있는 만큼…. 그래서 웬만하면 보충 교육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실전 교육에 직접 참여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네요.”
“아아. 많은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도 아카데미를 수료하신 만큼, 신규 인원들이 마력 회로를 통제하는데 한두 마디 노하우라도 건네주시면 안될까요? 이론 교육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서 시간이 굉장히 빠듯합니다. 한 명이라도 덜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지랄하고 있군.’
지금껏 신규 인원들의 태도가 너무 풀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교관들도 그들 못지않은 물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구실도 있고 사정을 이해한다고 쳐도, 통제 교관. 그것도 0년 차 사용자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상당히 웃기는 일이었다.
아무튼 한두 마디 노하우 정도는 별 부담이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면 왼쪽부터 차례대로 돌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휴. 솔직히 저도 이 교육 방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효율이 좋다고 해도….”
장윤호는 이때다 싶어 나승혜의 교육론에 대해 실컷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왼쪽열의 사용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눈을 감은 채 양 손을 모으고 있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내부로 마력을 일으키고, 회로를 따라 인도하는 과정을 연습하는 모습이었다. 가끔 밝은 얼굴로 차유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보아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휴식 시간이 끝나고 이론 수업을 토대로 한 실전 교육이 시작되었다. 장윤호는 신규 인원들에게 직접 마력을 통제해보라고 주문하며, 잘 되지 않는 사용자들은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말을 이었다. 곧 그가 오른쪽 열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걸 보며 나는 천천히 왼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왼쪽부터 돌겠다고 굳이 밝힌 이유는, 당연히 백한결 때문이었다.
“잘되니? 뭐 잘 안 되는 거라도 있어?”
“네, 넷? 아, 아니요! 그, 그냥 그럭저럭….”
가까이 다가서 말을 걸자 백한결은 펄쩍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잠시 실소를 흘린 뒤, 그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흘끗 고개를 돌리자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 장윤호의 뒤태가 보였다.
“에, 에엣.”
“침착해. 배운 대로 마력을 일으키고, 차분히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이끌어봐.”
내 손길이 닿자 당황한 음을 내던 백한결이었지만 이내 주문에 따라 천천히 마력을 일으킴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이어진 마력의 흐름은, 숨기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만큼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다. 매끄럽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부분을 몇 개 짚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내부를 향해 부드럽게 마력을 침투시키며, 달달 떨리는 귓가에 속삭였다.
“저항하지 말고. 가만히 내가 인도하는 흐름에 마력을 맡겨보렴.”
“네, 네.”
별로 대단한걸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아마 회로의 복잡함 때문에 주춤하는 것 같으니, 머뭇대는 부분을 살짝 비틀어 조금 더 쉬운 방향으로 이끌어줄 생각이었다. 딱 지금 어려워하는 부분만 해결할 수 있도록.
‘마력이 참 선하긴 한데, 소심하네.’
예전 트랩 포인트에서 안솔의 마력을 안정시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그렇게 천천히, 섬세하게 회로를 타는 도중이었다.
‘이놈 봐라?’
갑작스레 속력이 붙기 시작한 흐름에 나는 눈이 가늘어짐을 느꼈다. 처음 한 바퀴를 돌 때까지만 해도 허겁지겁 따라오던 마력은 이내 두 바퀴가 시작되는 순간 조금씩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세 바퀴, 네 바퀴를 회전할수록 처음과는 180도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내 마력 밀어낼 듯 질주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한층 더 속도를 높여보았다.
그 와중 슬쩍 백한결의 얼굴을 살피자 우묵해진 얼굴로 굉장히 몰두해있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가일층 속도를 높인 내 흐름을 무리 없이 따라오는 마력을 느끼며 조금은 감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백한결의 진명인 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윽고 여덟 바퀴를 끝으로 마력을 거두어들이자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 해달라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그 순간에서 깨어나오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나름 괜찮았어.”
대놓고 칭찬하면 주위의 이목이 쏠릴 염려가 있기에 완곡히 에둘러 입을 열었다. 대신에, 사적인 칭찬의 뜻을 담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수고하렴. 다른 인원들도 봐줘야 하거든.”
“저, 저기 교관님 잠시만요! 혹시 모르는 게 생기면 다음에 또 여쭤봐도 될까요?”
“기회가 또 올지는 모르겠네. 난 교육이 아니라 생활, 통제 전담이거든. 오늘은 예외로 참가했지만 원래는 불가능해. 뭐, 교육 시간이 아니라면 몰라도….”
나는 여운을 띄우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얘가 바보가 아니라면 일전에 얘기했던, 내 숙소로 찾아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튼 이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영입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지며, 나는 차분히 몸을 돌려 다른 사용자를 향해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박환희로 추정되는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그날 지도한 보람이 있는지, 아니면 나와 자주 마주치게 돼서 그런지 몰라도(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일정을 조절했다.) 백한결은 확실하게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같은 0년 차 사용자와 시크릿 클래스 라는 점을 은근히 어필하며 마치 친형처럼 그를 돌봐주었다. 일단은 서서히 친밀도를 높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관과 신규 사용자로서 지켜야 할 선은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다. 무조건 내가 다가가기 보다는, 그쪽에서 스스로 다가오게끔 만들 필요도 있었다. 이 최소한의 거리는 내가 줄이는 게 아니라 그가 줄여야 할 몫이었다. 즉, 그가 나를 믿고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을 만큼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백한결을 향한 내 공략 방침이었다.
그렇게 영입 계획을 서서히 진행시키면서 새롭게 추가된 일들도 함께 신경 썼다. 지금까지는 통제를 주로 했지만, 생활 교관에 대한 업무 비율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신규 사용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숙소로 들어가려면, 교육에 많은 시간을 뺏기는 통제보다는 생활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는 박환희를 대상으로 잡지 않았다. 장윤호의 교육 시간에 박환희 주변에 앉은 사용자들의 얼굴을 외운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약간의 낌새만 눈치채고 있어 상세히 파헤치지 않았다고 해도, 놈은 무려 2주나 되는 시간 동안 내 눈을 피해 계획을 진행시켰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박환희보다는 주변의 인물들을 짚다 보면 분명 한번은 걸릴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눈치 채일 가능성이 더 적기도 하고.
그리고, 내 예상을 사실로 입증할 기회는 머지 않아 찾아왔다.
모든 교육 일과가 끝나고 개인 정비 시간이 주어졌을 때였다. 순찰을 목적으로 숙소를 돌던 도중, 낯익은 신규 사용자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그때 박환희의 주변에 앉았던 사용자중 한 명이었다. 나는 바로 순찰을 중지하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곧이어 그녀는 생활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한 명의 여성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끌려 나온 여성은 다름아닌 차유나였다. 둘은 생활관 앞에서 잠시 소곤거렸는데 차유나는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 같았다. 이윽고 모든 얘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한번 주억이더니,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전에 있었던 교육 시간에서 차유나가 박환희를 바라보는 눈길이 걸려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걸렸다 싶어 나 또한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밟던 도중 나는 묘한 기시감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어딘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주변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차유나가 걸음을 멈춘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내가 이스터 에그라 이름을 붙인 곳이었다.
‘이런 젠장.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기척을 죽이고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0년 차 사용자 주제에 작정하고 몸을 숨긴 나를 찾을 리는 없겠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무성한 나무 위를 소리 없이 타고 오른 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차유나와 그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남성을 볼 수 있었다. 그 남성의 정체는 역시나 박환희였다.
그는 환한 미소를 선보이며 차유나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재빨리 청각을 돋웠다.
“아. 유나 왔구나. 하하. 기다리고 있었어. 와줘서 고마워.”
“또 왜 부른 거야?”
“응? 아아. 너무 경계하지마. 이제는 한 배를 탄 사인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차유나는 사납게 눈을 치켜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막 다가서려다 주춤한 박환희를 보며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협력하고 한결이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와 한결이를 위해서지. 한 배를 탔건 뭐건 좋은데, 더 이상 다가오는 건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나 아직도 미움 받고 있구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뺨 한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 안 해?”
신랄한 그녀의 말에 박환희는 자신의 오른쪽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휴. 그건 그렇지. 미안해.”
“네가 말하니까 전혀 진실이 담겨있는 것 같지 않아. 애초에 그냥 말하면 될걸 굳이 이곳으로 불러낸 것도 그렇고.”
“아, 이상한 뜻이 있는 건 아냐. 아직은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되도록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어. 그리고….”
“그리고?”
차유나의 날카로운 반문에 박환희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조금 풀이 죽은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결이한테 더 불안을 안겨주기 싫었거든. 주변에서 내가 너랑 만났다가 한결이가 봐버리면 분명 걱정할 것 같아서.”
‘제법 혀 좀 굴리는데? 표정 연기도 일품이고.’
현재 박환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백한결과 대화했던 내용을 저울질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한층 흥미가 돋아 더욱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연기가 먹혀 들어갔는지, 차유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한결이가 유나 너한테 의지하는 면이 많잖아. 가뜩이나 나를 신뢰하지 않고 있는데, 오해할만한 여지를 주기 싫었어.”
“흐, 흥. 정말로 그랬다면 됐고. 아무튼 빨리 불러낸 용건이나 말해.”
겉으로는 여전히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날이 서 있던 목소리는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는 곧 풀이 죽은 얼굴에서 연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내가 너한테 계획의 대부분을 말해줬잖아.”
“그렇지. 먼저 듣고 판단하는 조건으로 한결이의 정보를 걸었으니까.”
“응. 실은 그 계획에 조금 문제점이 생겨서.”
“문제점…? 설마 한결이?”
박환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고, 이내 대단히 진심 어린 얼굴로 문제점을 토로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한결이에게도 계획을 얘기했는데, 자신을 믿지 못해 동조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직접 보고 파토 낸 만큼 이미 알고 있는 지루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내가 너한테 자기 정보를 얘기했다는 소리도 했어?”
“했지. 그런데 당최 믿으려 하지 않더라고. 누나가 절대 그럴 리 없다면서.”
“쯧. 이 바보 멍청이가. 왠지 요즘 들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응? 뭐가 이상해?”
박환희는 눈을 빛내며 재빠르게 물었다. 그러나 차유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별거 아냐. 그냥 교관 한 명 얘기를 자꾸….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거야?”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물론 내 잘못이 크긴 하지만 그렇게 격렬히 거부하는걸 보니 조금 충격이기도 하더라. 그만큼 미안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기도 하고. 정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휴우.”
진정 안타까운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는 박환희.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유나는 그 모습을 흘낏흘낏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말할까?”
“저,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꺄, 꺄악!”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박환희는 펄쩍 뛰어올라 차유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는 “앗 차.”한 얼굴로 허둥지둥 어깨를 짚은 손을 거두었다. 중요한 점은, 차유나는 움츠러들기만 했지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아!”
“미, 미안!”
“가, 갑자기 잡으면 어떡해…! 놀라서….”
“나,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기뻐서 그랬어. 나도 참. 하하하.”
‘만남이 이번 한번이 아닌 모양이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정말로 기쁜 듯 벙글벙글 웃는 박환희가 부담스러운지, 차유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목덜미는 약간이지만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전보다 더욱 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후. 고마워. 하지만 말은 내가 다시 해볼게.”
“뭐, 뭐? 한결이가 믿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잖아. 그 말까지 했는데도….”
“그래.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다시 신뢰를 회복시키고 싶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진심을 보여주면 한결이도 곧 알아줄 거야. 유나 너처럼 천성은 착한 녀석이니까. 그러니 내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겠어?”
“무, 무슨 소리를 갑자기. 뭐 마, 마음대로 해! 나중에 가서 도와달라고 울지나 말라고.”
“응. 걱정 마. 실망시키지 않을게.”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던 차유나는, 어깨가 잡혔던 시점부터 시시각각 무너지고 있었다. 박환희의 빤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이내 “할 말 없으면 갈 거야.” 라는 말만 남기고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그러나 차유나의 발걸음은 묘한 비틀거림을 담고 있었다.
“휴.”
이윽고 저 멀리 사라지는 차유나를 확인한 순간 강한 한숨 소리가 이스터 에그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방금 전 대화에서는 일절 볼 수 없었던 표정을 띄우고 있는 박환희를 볼 수 있었다.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간 그 표정은, 명백한 비열함을 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하하. 오늘 분량이 조금 많지요? 진도는 빼야 하는데, 이것저것 넣을 내용이 많다 보니 평소 분량보다 훨씬 초과해 버렸네요. 하하하. 아무튼 힘든 월요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힘을 너무 많이 썼는지 배가 너무 고파요. 아무래도 라면이라도 끓여 늦은 저녁을 먹어야겠습니다. 🙂
PS. 전개가 느리고 지루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처음 드렸던 말씀을 지킬 생각입니다. 필요 없는 부분은 빠르게 갈 수 있지만,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진행이 느리다고 욕을 먹더라도 천천히 갈 예정입니다.
많은 답답함을 느끼신다면 어느 정도 묵히셨다가, 독자 분들 개인이 만족할만한 분량이 쌓이셨을 때 한꺼번에 몰아서 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아마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이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 리리플 』
1. EyeSeeYou : 안솔바라기 EyeSeeYou님! 1등 축하 드려요~. 하하하. 위에 바로 2등은 안솔의 화신(?)님께서 하셨군요. 혹시 이게 첫 1등이신가요? 1등 코멘트로는 처음 뵙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
2. 불곰리즈 : 아 불곰리즈님 ㅋㅋㅋㅋ. 오랜만에 뵈어요. 그 동안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셨나요!
3. 破天魔痕 : 예. 저도 이상하게 렉 걸리더라고요. 등록 누르고 다른 사이트 맵을 누르면 로딩 화면만 떠요.
4. 엔조이플레이 : 서평 감사합니다. 인물들 능력치 하나하나 찾기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__)
5. Dicho : 그렇죠. 선과 욕망. 자기 합리화의 극치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6. 으라라랏 : 예. 완결은 꼭 볼 생각입니다. 일단 부 또는 장으로 나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전개 속도는 위에서 말씀 드렸는데, 제 본 페이스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많은 독자 분들의 코멘트와, 지인 작가 분들의 소중한 조언에 힘입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부분은 빠르게 가지만, 필요하다 여기는 부분은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는 더 이상 변함이 없을 겁니다. 🙂
7. 달리다쿰 : 네! 감사합니다! 전개가 느려서 답답하게 여기실 수도 있으니, 추후에 조금 많은 분량이 쌓였을 때 다시 들러주세요!
8. 석양s : 물론 석양s님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 다만, 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답을 드리기 보다는 차후 진행 내용으로 의문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9. 눈물강 : 성향에 관해서는 저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중립 또는 중용으로 바꾸는 게 나을까 싶었지요. 이 부분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고, 눈물강님의 의견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심안은 중간에 설정을 한번 변경시켰습니다.(105회) 눈물강님이 말씀하신 본질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힘드나,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으로 인해 묻혔다고 보시면 됩니다.
10. 으허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앞으로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언제나 열심히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