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25
00224 오해는 오해를 낳고 =========================================================================
“그러니까요. 소환의 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곳에서 깨어난 후, 천사 님들의 인도에 따라 통과 의례로 들어가게 됐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유나가 보였고, 그 외에 몇몇 사람들도 공터에 빙 둘러앉아 있었어요.”
백한결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녀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어요. 설명을 들었다고는 해도 다들 혼란스러워했고, 불안해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중에서 유달리 침착한 남자가 한 명 있었어요. 그는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중앙으로 나섰고, 순식간에 이목을 끌었죠. 그게 바로 박환희와의 첫만남이에요.”
박환희를 언급할 때 이를 까득 깨문 백한결은 이내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어지는 1일차, 2일차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별 것 없었다. 그저 박환희가 사람들을 이끌고, 숲을 탈출하고, 포인트를 발견하고,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그리고 그 와중 박환희의 리더십이 빛났다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2일차를 넘길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박환희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죠. 이 남자라면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와중에도 그 지옥 같던 곳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살고 싶다는, 그리고 살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어요. 그리고 그 희망의 중심에는 박환희가 있었고요. 그렇게 지옥 같은 이틀을 보내고 3일차를 맞이한 날이었어요.”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자 처음 공터 인원부터 시작해서 그 후로 총 세 번의 생존자 무리들을 마주쳤다고 한다. 그리고 박환희는 그 생존자들을 모조리 자기 팀으로 끌어들였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으로는 함께 힘을 합쳐 이곳에서 살아남자고 했을 것이고, 고유 능력인 카리스마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불협화음만 조절할 수 있다면 덩치를 불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일단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전투력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협화음은 둘째 치고서라도, 통과 의례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식량 부족 문제. 한두 팀이면 몰라도 네 팀이 합친 상태라면 한 포인트에 있는 식량으로는 하루는커녕 한두 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저희 팀 인원은 남성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어요. 식량은 최대한 아끼고 아꼈지만, 그나마 다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죠. 이상하게 2일차 동안 생존자는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그때까지 포인트는 딱 한번밖에 발견하지 못했고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3일차를 맞이한 날. 가지고 있던 식량이 전부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럼 식량을 구해야 했을 텐데.”
“네. 그때까지만 해도 안으로 진입할 때를 제외하고 최대한의 안전을 추구하던 박환희도 결국 멀리까지라도 식량을 구해야겠다는 말을 꺼냈어요. 그리고 식량을 구하러 나가는 지원자를 모집했지요. 하지만 밖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데 누가 선뜻 지원하고 싶었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놀라운 일?”
내 반문에 백한결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녀석이 말한 놀라운 일은, 다름아닌 박환희가 가장 먼저 지원자로 나섰다는 것이었다.
“식량 때문에 다들 불만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들 박환희를 신뢰하고 있었어요. 어쨌거나 그는 리더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그 희생 정신에 감동했는지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사람들은 한 명 두 명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와 유나 누나도 그 지원자들 중에 한 명이었고요.”
“식량을 모으러 나가는데 지원을 했다라.”
“네. 솔직히 저는 남자들 중에 많이 어린 편이었고 유나 누나는 몇 없는 여자였어요. 창피하지만 거의 깍두기 같은 존재였거든요. 눈치도 조금 본건 사실이었지만 뭐라도 돕고 싶었어요.”
백한결의 대처는 나름 적절했다고 할 수 있었다. 통과 의례 같은 생존이 중요시되는 곳에 대규모의 인원들이 모이면 언제가 됐든, 한번 정도는 어떤 불만이라도 터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불만의 화살은 팀에서 가장 기여도가 낮은 인원들에게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해서 그의 말에 집중했다.
박환희가 먼저 지원함으로써 식량을 탐색할만한 인원은 꾸릴 수 있었다. 거진 열명이 넘는 인원들은 그때까지 얻었던 무기들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식량을 얻으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히 반나절을 탐험한 끝에 새로운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많지는 않지만 하루는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백한결은 말했다.
“우리는 그 장소를 기억해놓기로 했어요. 2일차에 발견한 세이브 포인트는 하루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거든요. 몇몇 인원을 남겨 놀까도 생각했지만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들었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어요.”
“아아. 세이브 포인트. 용케 그런 규칙을 확인했네.”
“네. 그런 것들 모두 박환희가 세세하게 체크했었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되돌아가던 도중, 누군가 한 명이 의문을 제기했어요. 세이브 포인트의 안전은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식량을 구하기까지 반나절이 걸렸으니, 아침에 소비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기다리는 인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박환희는 그 말을 일리 있다고 여겼고,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방향을 틀기로 결정했어요.”
“방향을 틀었다면…. 흠.”
“갈 때는 산을 빙 돌아서 갔는데, 되돌아가는 길에는 그 산을 일직선으로 넘기로 했어요. 그러면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거든요.”
‘미쳤군. 아니, 애초에 숲을 겪어봤으면 웬만하면 그런 쪽은 피하고 싶었을 텐데?’
이런 내 의문에 답하듯 곧바로 백한결은 말을 이었다.
“물론 애초에 숲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들어가기 꺼려했어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 길이 또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조금 지쳐있는 상황이었어요. 또 나름대로 무장도 한 상태였고, 최악의 상황에는 식량도 있으니까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봐요. 결국 우리들은 산 안으로 진입했어요. 그리고 그건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죠.”
이때까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백한결은 드디어 말을 한번 멈췄다. 얼굴에는 침울한 빛이 가득한 게 아직 그때의 트라 우마를 떨치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아까 만들어주었던 음료를 한번 더 만들어주기로 했다. 이윽고 거품이 흘러 넘치는 컵을 건네주자, 백한결은 약간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괴물들이 모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왠 원숭이 같은 놈들이 우리를 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치 가지고 놀 듯 한 명씩 차례대로 낚아채가더라고요. 세 명이 연달아 괴물들에게 당해버렸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우리들은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도망치는 와중 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정말이지 끔찍했어요.”
“싸울 생각은 안 했어?”
“모르겠어요. 아니, 솔직히 못한 것 같아요. 맨 앞에 있던 박환희가 달리는 순간 그를 따라 정신 없이 달렸거든요. 그때 처음으로 그의 다급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죠. 그때 그는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욕 같기도 했어요. 그렇게 우리들은 계속 뛰었지만, 동료들은 한 명 한 명 없어져갔어요. 그 원숭이들한테 잡힌 사람들도 있고 급하게 뛰다가 넘어진 사람도 있었을 거에요. 그렇게 산의 절반을 넘자, 처음 열명으로 출발했던 인원은 결국에는 다섯 명밖에 남지 않게 됐어요.”
“그 중 세 명이 박환희랑 너, 그리고 여자친구야?”
“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나 유나 누나는 보호 명목으로 일행들의 중앙에 있어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려 5명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갔지만, 그 원숭이들은 끈질겼어요. 하지만 겨우 정상을 넘고 내리막길을 타는 순간 저희들도 어느 정도 속력이 붙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망키들을 따돌리기는 어려웠을 텐데. 걔들은 산을 정말 잘 타거든.”
망키라는 말에 백한결은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아.”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망키요? 아, 그 원숭이들. 네. 아까처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상황을 일어나지 않았지만 꾸준하게 거리를 줄이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체력이 약한 유나 누나는 계속해서 뒤쳐졌어요. 누나를 끌고 달리던 저는, 앞서 달리던 박환희를 간신히 쫓아갈 수 있었죠. 계속해서 늘어지는 누나 때문에 저는 같이 가자고, 도와달라고 소리쳤어요. 제 말을 들었는지 그는 서서히 달리는 속도를 늦추더라고요. 저는 역시 리더라고 생각하면서 정말로 고마운 마음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믿을 수 없는 일?”
내 반문에 백한결은 다시금 말을 멈췄다.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떠올리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서너 번 반복했을 즈음, 그는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네. 속도를 늦춰 제 옆으로 다가온 박환희는 발을 뻗어 한창 달리던 제 다리를 걸었어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말이에요.”
“뭐…라고?”
“저는 반사적으로 넘어지고 말았고, 덩달아 유나 누나도 함께 바닥에 부딪쳐서 구르고 말았죠. 당연히 망키들의 시선을 우리들에게 쏠렸어요. 그리고 그 틈을 타 박환희는 다시금 속력을 높여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가증스럽게도 우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잠시 시선이 쏠렸던 순간, 박환희는 곧바로 우리를 향해 팔을 내뻗었어요. 그리고 고민하는 표정을 내비치면서 몸을 돌려 달아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그때 저를 마지막으로 응시하던, 그 비웃는 눈동자를요.”
백한결은 말을 마치고 차분히 음료를 들이켰다. 그것을 연거푸 마시게 한 효과가 있는지 말을 하는 중요한 부분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꽤나 담담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분노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백한결을 보다가 이내 슬쩍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이것은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닌, 일종의 시험용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사늘한 목소리가 백한결에게 쏘아졌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어떤 거요?”
김한별은 예의 예리한 눈동자로 백한결을 주시하고 있었다. 간만에 과거 그녀의 성격이 부활한 듯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그러면 그 괴물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니? 넘어졌다면 뒤따라온 망키들에게 1순위로 표적이 되었을 텐데.”
“그, 그건….”
백한결의 시선은 김한별의 얼굴에서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름답게 솟아오른 가슴 위로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자 문양을 본 순간, 그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냥 천운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큭. 김한별은 믿을 수 없다는 건가? 뭐 나야 상관없지만.’
김한별은 백한결의 대답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고, 한별의 질문이 불안했는지 백한결도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뭔가 애원하는 어조가 섞여있었다. 마치 제발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김한별은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거든? 네 말이 거짓말일수도 있는 거니까.”
“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럼. 그 박환희란 신규 사용자를 불러서 삼자대면을 할 수 있겠어? 자신 있니?”
“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그만.”
‘얘 오늘따라 정말 왜이래?’
김한별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백한결을 싫어하는 것 같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둘의 말다툼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한별이에게 “입 조심해.” 라고,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신호를 받은 김한별은 미묘하게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백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울먹울먹한 눈동자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는 나와 김한별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지금 바로 다음 회 쓰도록 하겠습니다. (__)
225회에는 몇 KB를 넣든, 223회에 말씀 드린 부분을 맞출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후기, 리리플은 225회에 합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