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
00023 함정의 도시. =========================================================================
모임이 끝난 후 나는 안현의 인도를 받아 바로 안솔의 상태를 살폈다. 침구 하나를 깔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마에 손을 얹어 내부를 체크해보니 예상대로 안솔의 마력은 헝클어진 상태였다. 도를 넘지 않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정 작용으로 인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도움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안솔 간호하는 사람이 한 명 붙어 있는 게 낫겠다.”
“그건 제가 할게요.”
당연히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안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창문 너머로 눈을 돌리자 어느새 밖은 완연한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안현의 눈동자는 조금 전부터 이미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모두 상당한 심력을 소비했을 것이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내일 행동에 지장을 주면 곤란했다.
“피곤해 보인다. 일단 나가서 한숨 자고 있어. 얘는 내가 보고 있을게.”
“형은 안 주무세요?”
“나중에. 일단 여자애들은 오늘 푹 자게 놔두고 너랑 내가 교대하면서 안솔을 보자. 내가 나중에 적당히 깨울 테니까 그때 교대하자고.”
“아. 교대.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형 동생 좀 부탁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현은 비틀비틀 걸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건 남았지만 수면 욕구를 간신히 참고 있는 안현의 모습이 보였기에 다음에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 날 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트랩 포인트와 일행들의 태도에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생각도 정리할 참이었다. 다만 그전에 할 일은 해야겠지.
문이 꼭 닫힌걸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마력을 일으켰다. 잔잔한 물의 표면에 파문이 생기듯 이내 내 오른손에는 연한 주홍빛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 정 중앙에 걸치듯 놓은 후 바로 내부로 마력을 투사했다. 이왕 치료해주는 김에 조금 서비스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마력이 심하게 역류하거나 혈도를 따르는 회로가 꼬인 경우를 고치는 건 꽤나 애를 먹는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오버 드라이브한 마력을 진정시키고 헝클어진걸 풀어주는 건 손 쉬운 일이었다. 순수한 불의 속성을 띄운 내 마력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자 잠시 안솔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력은 개인이 가진 성향에 따라 띄는 속성이 달라진다. 지금 내가 느끼는 그녀의 마력 속성은 선하고 그만큼 하얀 빛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흘러 들어간 내 압도적인 마력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 불안해 했지만 나는 그것들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고, 그리고 감미롭게 솔의 마력들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도와주러 왔어. 착하지? 얌전히 있으렴. 달래는듯한 느낌으로 계속 솔의 마력을 보듬자 내가 도움을 주러 왔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이내 앞 다투어 내 마력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유연히 운용하며 마력들을 보듬어 주었다. 그러자 자기 먼저 쓰다듬어 달라는 듯 이리저리 비비는 그녀의 마력들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신을 훑으며 놀란 곳은 안정시키고 헝클어진 건 풀어준다. 진행이 거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그녀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얼굴도 편안해 보인다.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건가?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몸 전부를 훑고난 후 마력을 다시 거둬들이려고 하자 안솔의 마력들이 하나같이 들러붙은 것이다. 손을 떼려고 하자 그녀의 몸 내부 마력이 가지 말라고, 조금 더 보듬어 달라고 꾹꾹 잡아당기는걸 겨우 뿌리친 후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작업을 완료하니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금방 끝낼걸 세세하게 봐주고 활력까지 북돋아주다 보니 예상외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방 밖의 기척은 딱히 걸리는 건 없다. 아무래도 다들 골아 떨어진 모양이다. 양손을 올려 한껏 기지개를 편 후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나을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감았던 눈을 뜨고 말았다. 주변에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영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더니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유정은 단발 머리고 김한별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아니었으니 결국 안현인 셈이다.
“오늘 피곤했을 텐데. 더 자도 돼.”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만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걸 볼 수 있었다. 일분이란 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안현의 입이 서서히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아니에요. 영 걱정이 돼서 잠도 잘 안 오네요. 형. 우리 솔이 상태는 어때요?”
“많이 호전됐어. 내일이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저기 형, 그럼….”
안현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그가 말하는걸 기다렸다.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형. 형이랑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곤란해요.”
“얼마든지. 그럼 옥상으로 갈까?”
“네.”
보아하니 안현도 잠은 별로 못 잔 것 같았다.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도 많고 안솔 문제도 있고 하니 이래저래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은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는 이유정이 침구를 꼭 껴안은 상태로 자고 있었다. 김한별은 보이지 않는 게 다른 방에서 자는 것 같았다.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풀은 나는 조용히 안현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서 밤바람에 담긴 차가운 공기를 마시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칠흑의 도시를 보며 잠시 그렇게 말 없이 서 있었다. 먼저 말문을 연건 안현 이었다.
“형. 이 도시는 참 조용하네요.”
“그렇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내 말에 안현은 쓸쓸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뜻하는 바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참고 그가 속내를 털어 놓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형을 보면 정말로 대단한 거 같아요.”
“뭘. 똑같은 사람인데 대단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고요.”
안현은 연속으로 세 번이나 부정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심란함이 가득했고 무력감 또한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아직 어렴풋했기 때문에 일단 말을 더 들어볼 요량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오늘 형이 떠나고 난 이후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형이 있을 때는 우리들은 정말 서로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형은 아닐지 몰라도 저는 우리 다섯이라면 서로 힘을 합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런데 아니었어요. 형이 그러셨죠. 다른 애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런데 저는 애들을 잘 이끌 수 없었어요. 이상한 것들에 당해 쓰러지고 솔이 마저 위험에 처하고 말았잖아요. 그리고 형도 오늘 유정이랑 한별이 보면서 이상한 거 느꼈죠? 둘이 싸웠어요. 형을 구하러 가자, 가지 말자 때문에.”
안현은 길게 말을 늘어뜨리면서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싫었던 건…. 저는 그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는 거에요. 심지어 말리지도 못했죠. 고작 한다는 소리가 떠밀리듯, 내가 갈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게 전부였어요. 가슴이 너무 답답했어요.”
“…….”
“형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내일은 어떨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부담감에 몸부림치며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안현.”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는 안현을 막기 위해 말을 걸었지만 그는 다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그때 형이 나타났어요. 정말 기적 같이. 형을 보자마자 무슨 감정이 들었는지 아세요? 고마움? 아니에요. 미안함? 아니에요. 바로 안도감 이었어요. 형이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형이라면 뭔가 믿을 수 있겠지. 실제로 그렇잖아요. 형이 오자마자 분위기는 다시 괜찮아졌고 솔이의 상태도 호전됐어요. 형은 항상 침착하고 차분해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느낌? 우리들이랑 다른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다른 게 분명히 있어요.”
안현의 마지막 말에 순간 속이 뜨끔했지만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현을 보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한마디 해도 될까. 그렇게 길지는 않을 테니까.”
“길어도 되요. 경청할게요.”
홀가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안현은 놀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나, 이런 부담을 느끼는 것도 괜찮아. 오히려 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라고요?”
“생각해봐. 우리가 숲 안에서 어땠는지. 네가 그 트러블 메이커 같이 혼자서 모든걸 독단으로 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한 것도 아니고. 내가 대략적인 의견을 내면 유정이랑 한별씨가 섬세히 살피고 추가 의견을 냈지. 그리고 나와 너는 그 의견을 모아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을 택했고.”
“…….”
“우리는 모두가 너를 돕고 있다. 부담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 부담을 전부 맬 필요는 없어. 설령 일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너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현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어 올리고는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내 신호를 알아 들었는지 안현은 열려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네가 나를 대단하게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나도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겁 많은 동생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그렇고 항상 신속하게 추진력 있게 행동에 옮기니까. 안솔이 너한테 의지하는 것처럼 너도 나한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어. 나도, 유정이도, 한별씨도 너와 안솔한테 의지하는 게 있을 수도 있고. 다섯이 힘을 합해 이곳을 탈출한다. 네가 나한테 처음 했던 말이야. 그런데 그 다음 네가 한 말은 상당히 모순적 이었어. 서로 의지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짧게 말하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말하다 보니 조금 길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마지막 말을 잇기로 했다.
“부담이라는 이름의 짐은 우리가 나눠 들어주겠어. 그러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것. 다른 건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나머지는 우리들이 그만큼 너를 있는 힘껏 도와줄 거니까.”
천천히 내 말을 곱씹는 안현을 보며 밤바람을 맞았다. 오늘따라 유독 밤바람이 살랑거리는 게 간지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안현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옥상에 올라올 때 불안정한 눈동자가 아닌 처음 봤을 때의 우묵하고 무거운 눈동자였다. 그리고 안현은 마음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었는지 후련한 감정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