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3
00232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
줄기를 잇따라 진행되는 과정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원류(源流)는 바뀌지 않는다. 엇나간 줄기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결국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되돌아온다. 이 생각을 맹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처음 미래가 비틀렸을 때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고 행동한 것 같았다.
어쨌든 현재 내가 직면한 상황은 지금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고, 더 이상 지켜볼 여유도 없다는 것.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껏 충분히 기다렸으니 이제 슬슬 흐름에 맞춰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다만 그 움직임 사이로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여지는 두어야 한다.
13주차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단순히 갈등으로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양 클랜들의 대립은 격화되고 있었다. 동부 클랜에서 대응을 시작한 이후 남부 클랜은 곧바로 그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물론 단순 지지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동부 클랜과 힘을 합쳐 지속적으로 황금 사자 클랜의 지나침을 비판했고, 이미 탈퇴한 클랜원들을 이용해 남아있는 클랜원들과 비밀리에 접촉시켰다. 그리고 새로 탈퇴하는 인원이 나오는 즉시 관할 도시에 황금 사자를 성토하며 여론을 흔드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신태승의 비리 폭로를 전면으로 부정하기는 했지만, 뜻밖에도 황금 사자는 탈퇴하는 인원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에 대한 대처라고 해 봤자 피해자 코스프레의 고수 및 부각시키는 게 전부였다. 탈퇴한 인원을 자세히 살피면 대부분 하위 클랜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냥 탈퇴할 놈들은 탈퇴하라고 놔두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황금 사자는 처음 터뜨린 대모 살해사건을 동남부 클랜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일에 주력했다. 그와 동시에 그 동안 빼앗겼던 주도권을 차츰차츰 되찾는 일도 진행시켰다. 그 중심에는 사용자 아카데미가 있었으며 날이 갈수록 동남부 클랜 소속 교관들이 보류 처분을 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 결과 새로 생긴 공석들은 당연히 서북부 클랜 소속 인원들이 속속히 채우고 있었다.
서로 방어는 도외시하고 공격만 하는 꼴을 보자니 누구 말마따나 마치 진흙탕 개싸움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고연주가 바바라를 떠나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밥그릇만 챙기는 꼬락서니를 보면 없던 정도 떨어져나갈 것이다.
재밌게도 이 싸움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동남부 클랜에게 조금씩 우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황금 사자에서 탈퇴한 여성 사용자중 한 명이 성 상납 비리에 대해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나도 알고 있는 인물로, 서지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예전에 나와 같이 아카데미를 수료한 인원 중 한 명으로써 황금 사자 클랜의 오퍼를 받은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다. 서지윤은 가입 후 스카우트의 강압으로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도 비겁한 방법으로 계속 시달렸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시끌시끌하게 변했다. 아무리 성에 관해서 개방적인 홀 플레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서로 마음이 맞을 경우에 한하는 말이었지 강간, 겁탈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지금껏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는데 선도한 곳이 황금 사자 클랜인데, 오히려 내부에서 그런 일이 터졌다고 하자 일반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황금 사자도 이 사건은 가만히 있기 어려웠는지 다시금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서지윤과 스카우트는 서로 원해서 맺은 관계였으며,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니 괜한 구실을 붙여 탈퇴하는 비겁자라 몰아붙였다. 그러나 황금 사자에 우세하던 여론은 서지윤의 눈물 어린 호소로 다시금 평행을 맞춰가는 중이었다.
그 이후로 비록 하위 클랜원들이라고 하지만 황금 사자를 탈퇴하는 인원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초반에 17명을 탈퇴한 것을 시작으로 어느새 총 30명을 훌쩍 넘어 40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 남은 황금 사자의 총 1/10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물론 강철 산맥 원정의 실패와 클랜 로드의 부재 그리고 대모의 살해로 황금 사자의 미래에 회의를 느낀 인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동안 클랜 내부가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반증해주는 사례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밖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지만, 사용자 아카데미는 조용했다. 아니, 겉으로 조용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느덧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 감사를 모두 마친 서북부 클랜들에게는 혐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아카데미 복귀가 속속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감사를 거절하는 동남부 클랜들에게는 보류가 유지되고 잇따라 처분이 내려지고 있었다.
동남부 클랜은 보류 처분에 대해서는 초반 제법 잘 참는 듯 보였지만, 결국에는 성질 급한 김덕필이 난동을 피우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황금 사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폭발해, 자신들이 왜 내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항의했다. 리버스 클랜은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은 아니었지만 평소 강도 높게 황금 사자를 비방해온 이유로 감사 대상에 포함된 상태였다.
그러나 똑같은 말만 연신 되풀이하는 황금 사자에 김덕필 또한 보류 처분을 피할 수 없었고, 그는 결국 악담과 함께 아카데미로 들어온 리버스 클랜원 전부를 이끌고 사용자 아카데미를 나가버리고 말았다.
황금 사자는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그들을 잡지 않았다. 다만 이때다 싶어 “찔리는 게 있다.” 또는 “애초에 교관 자격이 없는 사용자였다.” 라는 등 리버스 클랜을 집중 조명 및 대대적으로 규탄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황금 사자는 보류 처분을 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종래에는 거의 7할을 점유하고 있던 동남부 클랜 소속 교육 교관 직이 어느새 세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남아있는 인원이라고 해도 10강 중 2명인 서진우, 연혜림과 한(韓) 클랜 로드인 성현민이 전부였다. 하지만 세 명 또한 곧 보류 처분이 내려질 거라는 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교육 교관으로 나서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나는 백한결을 최우선으로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전에 머셔너리 가입 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뒀지만 아직 박환희와 차유나의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낙 귀가 얇은 녀석이니 내가 없는 동안 여자친구의 말에 흔들렸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솔직히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주변이 하도 시끄럽다 보니 예전처럼 신경 써주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마침 당일 잡혀있는 교육 중 통제 지원으로 만날 수 있었기에, 수업이 끝난 후 그와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력 재능 계열 교육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백한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교육이 끝난 후 나는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강의실을 나가는 신규 사용자 한 명을 붙잡았다. 그리고 백한결에 관한 근황을 물어보니, 뜻밖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 찌질 이요?”
“찌질 이?”
“쿡쿡. 네. 걔 되게 유명해요. 맨날 여성 숙소 앞에서 기다리다가 여자친구가 만나주지 않아서 완전 폐인이 다 됐다는데요? 그게 뭔 꼴이람.”
“여자친구라고? 혹시 둘이서 무슨 일 있었니?”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애인이랑 몇 번 다투는 건 본적이 있는데 애초에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녀석이라서 말이죠. 솔직히 걔, 주변에서도 이미 포기한 상태에요. 도대체 아카데미가 끝나고 어떻게 하려는지…. 쯧쯧.”
“…그래 알았다.”
신규 인원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분명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폐인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관심을 두지 못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때였다. 잠시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있자,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야. 머셔너리 로드. 오늘도 통제 지원을 나와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하.”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리자, 빙글빙글 웃고 있는 장윤호가 보였다. 그의 얼굴은 이전과는 달리 활짝 웃음꽃이 핀 상태였다. 지금껏 눈치만 보고 살다가, 동남부 교관들이 보류 처분을 받고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살맛 나는 모양이었다.
“저는 이번 교육을 끝으로 3일 동안 쉬게 됐습니다. 오늘 이후로 잡힌 교육이 없거든요. 머셔너리 로드는 어떻습니까?”
“정신 교육 일정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아이고. 아쉽네요. 오늘 북부 클랜 소속들끼리 모여서 거하게 한잔하기로 했는데 말입니다. 오늘 부로 13주차 교육이 끝나고 주말 휴식이 오니 다들 밤새 달릴 모양입니다.”
“정규 교육은 끝나겠죠.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13주차부터 주말에 추가 교육을 실시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그러네요. 제 실수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괜찮습니다. 주말 교육은 황금 사자와 서부 소속 클랜원들이 맡기로 했으니, 우리들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아차. 주말에는 시간이 좀 나시나요? 머셔너리 로드에 궁금해하는 동료들도 많은데…. 어떻습니까. 같이 한잔하시죠?”
장윤호는 아무래도 내가 참가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주말에도 지원이 잡혀있어서요.”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실제로 토요일 오전, 오후로 빽빽하게 잡혀있었다.) 내 완곡한 거절에 장윤호는 아쉬운 얼굴로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주말 통제 지원이 끝나고 바로 가보는 게 좋겠군.’
지금 중요한 건 모임에 참가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장윤호의 말대로 오늘이 지나면 13주차의 정규 교육이 종료된다. 그렇다면 주말에 일정이 잡힌 오후 추가 교육 지원을 마친 후 곧바로 백한결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마 그가 폐인이 된 이유에는 필시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 이유가 내 생각과 맞기를 바라며, 나는 긴 한숨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
모든 클랜이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공통으로 공감하는 게 딱 한가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교육 강도가 이전에 비해 무척이나 낮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니 누굴 탓하겠냐 만은 지금 와서 겨루기를 부활시키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해서 특별 교육을 대체해서 들어온 게 추가 교육이었다. 취지는 신규 사용자들의 수준을 회복하는데 있었지만, 솔직히 내 눈에는 어떻게든 교육 주기를 맞추려는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전, 오후에 빡빡하게 잡혀있던 통제 지원을 끝내고, 나는 미리 사둔 저녁거리와 함께 곧바로 남성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에 도착하자 모두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휑한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생활 교관일 적 기억을 더듬어 2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백한결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 도착하자 조용한 침묵만이 나를 맞아주었다. 설마 이놈이 없는 건가 싶어 문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자 한쪽 구석태기에 둥그런 침낭이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낭 속에 백한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결아.”
“…….”
“한결아? 한결아!”
“…….”
침낭 위로 올린 손에는 분명 묵직함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흔들어봐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침낭을 벗겼고 이내 눈을 꼭 감은 채 쓰러져있는 백한결을 볼 수 있었다.
‘미친놈들. 이지경이 되도록 애를 놔둬?’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나는 바로 침낭에서 한결을 끌어냈다.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핼쑥하게 변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더구나 군데군데 보이는 눈물 자국을 보자 한층 더 분노가 샘솟았다. 어떻게 발견한 인데….
코에 손을 대보니 다행히 숨은 미약하게 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심장에 손을 얹었고 천천히 마력을 투하시켰다. 기운이 약해진 내부를 보듬으며 나는 아리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걸까?
‘정말로 차유나가 배신이라도 한 건가.’
그렇게 한동안 내부를 다듬어주자 조금씩이지만 백한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친김에 마력을 퍼부으며 활력을 북돋워주었고 끊임없이 옆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재빠른 내부 조치가 유효했는지, 곧이어 백한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드는걸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옆에 내가 있음을 확인했는지 바싹 마른 입술로 입을 열었다.
“형…?”
“그래. 한결아.”
“형…? 형…?”
“그래 그래. 형이야. 형이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형…! 혀엉, 혀어엉, 어어어어엉….”
백한결은 처음에는 잔뜩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이고 확실히 인식하는 순간, 나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예전의 똘망하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건조한 울음 소리만이 흘러나와 방안을 구슬프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서글퍼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백한결은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 초반부에는 독자 분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끼실 만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NTR 장면입니다.) 해당 장면을 원하지 않으시는 독자 분들께서는 초반부를 빠르게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