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4
00233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
“죄, 송해, 요! 요, 용서, 해주세요!”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게 아니라고.”
“아흑! 거, 걱정하지 말아요! 수료하는 날에는! 분명히! 데리고! 올 테니까! 아흐흑!”
“차유나. 너 네 말에 책임질 수 있어? 요즘 들어 그 놈 동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차유나는 팔 다리를 짚고 몸 전체를 길게 뻗은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따라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찰랑거렸다. 잠시 쉬던 박환희가 연이어 허리를 움직이자, 그녀의 비명이 허공으로 뾰족이 솟아올랐다. 차유나는 간신히 숨을 진정시킨 후 앞뒤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 머셔너리, 클랜으로, 같이, 가자고, 들었어요.”
남자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허,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앞으로 계속 그런 말 할 거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잘했어.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로 헤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박환희는 다시금 허리를 돌진시켰다. 차유나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거, 걱정하지 마세요. 한결이는, 분명 저를, 따라올 거에요. 그 애가, 저를, 배신할 리, 없어요.”
“너무 자신이 넘치는데. 아무래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유나야. 아무래도 우리 관계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아, 아니에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수, 수료 전까지는 꼭…. 아앙!”
“큭큭. 과연 한결이가 이런 네 모습을 보고도 너를 신뢰할지 궁금해지는데.”
박환희는 조소를 흘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차유나의 반응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의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살과 살이 맞부딪칠 때마다 천박한 교성을 지르는 한 마리 암캐에 불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단지 한결이를 위해서….”
“워워. 그래 알았어. 네가 이러는 거는 어디까지나 한결이를 위해서니까. 그러니까 그냥 순종적으로 만들어서 조용히 내 품으로 데려오면 돼. 이제 피하는 것도 적당히 하고. 알아들어?”
“네, 네! 알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박환희는 킥킥 웃으며 차유나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히 어려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의 극치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용두질을 하던 두 남녀는 이내 남자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여성이 축 늘어지는 것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숨죽여 지켜보던 여성, 아니 여성처럼 보이는 남성 한 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눈 앞의 광경을 지켜보는 내내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성의 몸이 늘어진 순간 그와 동시에 쓰러지며 혼이 나간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그저 들어올린 오른팔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저었고, 핏기가 사라진 입술은 오직 달싹이기만 할 뿐이었다.
*
나는 한동안 백한결을 진정시키는데 진땀을 빼야만 했다. 계속해서 마력으로 내부를 더듬어 진정시켜주고, 혹시 몰라 가져온 심신안정 효과를 지닌 간식들을 억지로 먹이자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보라는 내 다독임에 그의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해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백한결의 말은 일종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간략히 설명하면, 백한결은 계속해서 내 말대로 차유나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어렵사리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꺼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차유나와 계속 접촉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여성 숙소에 출입 금지 처분까지 받았다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라도 차유나가 나올까 여성 숙소 앞을 서성이던 백한결은 그녀가 홀로 숙소를 빠져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턱대고 다가서면 또 자신을 피할 까봐 그는 조용히 차유나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그녀는 인적이 뜸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나무와 수풀이 그득한 곳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나는 반사적으로 이스터 에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박환희와 차유나의 밀회를 한번 목격한적이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백한결 또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박환희와 함께 서 있는 차유나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내가 이전부터 짐작했던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졌다.
백한결은 차유나가 배신한 과정을 똑똑히 설명하지 못했다. 너무나 감정이 북받치는지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들렸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예전에 둘을 본 이후로 그런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한결은 가슴에 담아뒀던 모든 말을 모두 털어내자 잠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 이었다. 그는 곧 내 앞으로 쓰러지며 다시금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믿고 의지하던 여자친구의 배신을, 그것도 우연치 않게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자 충격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게 분명했다.
“한결아 울지마. 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누나가, 누나가 너무 불쌍해요…. 어엉….”
“하. 차유나가 불쌍하다고? 뭐가 불쌍해?”
“그렇게 당하면서도 박환희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모습이…. 흑, 믿을 수 없어요…. 그렇게 다정하고 강인하던 누나가…. 도대체 왜…. 왜애애애애!”
백한결의 혼란스러워하는 태도를 보는 순간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나 또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재빨리 억누르며, 지긋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나에게나, 한결이에게나.’
백한결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잘된 일이었다. 솔직히 차유나는 나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한결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여지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몰라도 내 클랜으로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후. 한결아.”
나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실컷 울었는지 백한결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끅끅 흐느끼는 소리는 여전히 나오고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흐느끼는 목소리도 점차 사그라질 즈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기대오는 백한결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너를 혼자 놔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아, 아니에요…. 끅. 실은…. 형을 찾아갈까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 되게 바쁘신 것 같아서….”
‘아. 오그라든다.’
하지만 현재 눈 앞에 있는 사용자는 무려 였다. 백한결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오그라듦 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자꾸만 우그러드는 손가락을 억지로 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한결은 눈을 감았다가 이내 처음보다는 약간이나마 진정된, 그러나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응.”
“저는 누나한테 버림받은 걸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네가 보고 들은 광경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클랜으로 들어오면 돼. 물론 곧바로 이 말을 내뱉을 정도로 개념 없지는 않다. 최대한 너를 위한다는, 완곡하게 에두르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어떻게 말할까 잠시 동안 고민하고 있자 문득 1층에서 여러 인원들이 올라오는 기척이 걸렸다. 아마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돼.”
“지금의 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요. 그리고 최소한의 조언은 구할 수 있잖아요…. 모르겠어요….”
백한결은 현재 가장 의지하던 상대를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젖은 상태일 것이다. 그의 심리 상태를 헤아리며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이후로 차유나와 접촉한적이 있니?”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 이후로 어떻게 숙소에 돌아왔는지도 생각이 안나요. 그냥 하루하루 울면서….”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 생각에는 차유나와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럼 그 후로는요?”
“그걸 네가 판단하라는 소리야. 박환희, 차유나에 관해서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전에 너에게 해줬던 말들 기억나니? 숙소에서, 그리고 밖에서.”
“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백한결은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였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후 나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빠르게 내 손을 잡았고, 상처 입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어디 가냐는 눈빛을 뿌렸다. 하지만 잡은 손을 부드럽게 걷어내며 나는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가, 가지 말아요. 형 가지 말아주세요. 저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않아.”
“그럼…!”
“한결아.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혼자서 잘 생각해봐. 지금 네 여자친구가 정말로 너를 위해서 이러는지, 아닌지. 지금껏 그녀와 지내왔던 추억은 모두 지우고 현실만 놓고 판단하는 거야.”
“…….”
“너도 지금 속으로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겠지.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백한결의 몸이 움찔한걸 잡을 수 있었다. 신규 인원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백한결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복도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쯤에서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다음주에 아카데미 교육이 끝이 난단다. 그 후로 오퍼를 받은 사용자는 클랜에서 데려가고 받지 못한 사용자는 홀로 밖을 나서게 되지.”
“네, 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 네 앞에 설 생각이다. 네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다 죽어가는 게 아닌,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을 결정한 너를 봤으면 좋겠구나.”
준비했던 말을 꺼내자 잠깐이지만 백한결의 눈망울이 흔들리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여운을 남겨두었으니 이제는 걸려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형, 형! 잠시만요. 제발, 제발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형은, 형은 도대체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시는 거에요? 따지고 보면 형이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곧바로 걸려들었다. 나는 예전에 김한별과 대화를 나눌 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때 백한결은 방문 밖에서 우리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네가 시크릿 클래스니까. 는 아닌 것 같고. 예전에 한별이한테 뭐라고 말했더라.’
잠시 머리를 긁적인 후, 나는 애꿎은 허공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글쎄. 솔직히 털어놓으면 나도 너랑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거든. 그래서 방금 전 네 얘기에 공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혀, 형도요? 정말이요?”
“응. 그리고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전에 통과 의례를 거쳤을 때 너랑 굉장히 비슷한 애가 한 명 있었거든. 물론 지금도 같이 있지만 잠시라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애였어. 아무튼 너를 보니까 그 애가 떠오른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나는 일부러 어색한 척 얼버무렸다. 그런 내 모습이 신선한지 백한결의 표정에서 조금씩 생동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왕 내친김에 나는 한가지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신규 사용자들이 오니까 이만 나가볼게. 말을 더 못 들어줘서 미안해. 하지만 네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고 힘냈으면 좋겠다.”
“형.”
“아. 그건 두고 가도록 하마. 그거 먹고 건강 좀 챙기렴. 그리고 이번 주 교육을 빠진 만큼 주말 추가 교육은 꼭 참여하고. 원래의 너로 돌아와. 지금 여기서 혼자서 궁상 떤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백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오물거렸지만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연한 미소를 보여준 후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신규 인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도 있거니와 그의 눈동자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백한결이 남자라는 사실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신규 사용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려오는 나를 흘끗 흘끗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들은 모조리 무시한 채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다, 걷는다, 그리고 걷는다.
실은 아까 백한결과 대화를 하던 도중 까닭 없이 속이 끓어올랐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가만히 이유를 생각하자 문득 백한결이 놀란 얼굴로 내게 반문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형, 형도요?’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까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은 이유가, 나는 진심으로 그의 내면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사랑하고, 동경하고, 아끼던 여성을 잃은 경험은 나 또한 분명히 있었다.
교관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떠올랐다. 박다연, 한소영. 박다연은 벨페고르에게 당해 마족의 아이를 임신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한소영은….
“젠장.”
잊고 싶었던 더러운 기억들을 떠올리자 내부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정들이 가득히 차오른다. 아까 부글거리며 솟아오른 감정이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명백한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교관 숙소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비틀었다. 갑작스레 주체 못할 정도로 살심이 끓어올라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을 마지막으로 그 동안 잘 억눌러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백한결의 말이 뭔가 내 내부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았다.
‘벨페고르는 죽었어. 벨페고르는 죽었어. 벨페고르는 죽었어.’
나는 벨페고르를 죽였을 때를 끈임 없이 상기하며 내부를 가다듬었다.
어느덧 주변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어둑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둘러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그대로 그늘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명상을 시작했다. 살기를 풀풀 날리면서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자 어느새 완연히 어둠으로 물든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간만에 치솟은 살기라 그런지 진정시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바꾸기 위해서 돌아왔는데 아직 예전의 기억들에 괴로워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구나.’
고작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내 처지에 전신으로 무력한 자괴감이 찾아 들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지를 한두 번 툭툭 털은 다음, 교관 숙소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이번 주가 13주차. 다음주면 정규 교육이 종료된다. 그리고 100일째 되는 날 아카데미가 끝나니까….’
양 클랜의 대립이 이번 주에 끝날 리가 없다. 그리고 14주에 무엇을 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끝물이나 다름없으니, 설령 움직인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를 대처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웬만한 일은 이번 주 안으로 끝내놔야 한다는 소리였다.
다행히 내일은 일요일. 토요일 오전, 오후 교육에 모두 통제 지원을 나간만큼 일요일은 교관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쯤 보류 처분을 받아 가만히 처박혀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일 움직일 계획을 점검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자 곧 본관이 보였고, 걸음 속도를 한층 높여 빠르게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헤어질, 어쩌면 파괴되어 영영 보지 못할 복도를 꺾어 돌자 이제는 익숙한 교관 숙소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백한결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내일 그들을 만난 후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동안 바쁘게 움직인 보람은 있어.’
나는 문 손잡이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숙소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행이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미처 내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막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오빠.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그, 그래도 숙소에는 들어오실 거…죠?’
새벽에 대모 살해에 관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김한별이 나에게 했던 말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오늘일 줄 몰랐고, 솔직히 그냥 흘려 넘긴 것도 없잖아 있었다.
숙소 안에서는 테이블을 두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김한별이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술을 마시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차림이 보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살짝 충격적일 정도로, 김한별은 자신의 나신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고 있는 야한 옷을 걸친 상태였다. 그리고 방 내부를 감도는 뭔지 모를 야릇한 분위기도 떠돌고 있었다. 평소의 김한별을 생각하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숙소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얼 떨떨히 그녀를 불러보았다.
“한별…아?”
“아. 오빠. 드디어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김한별은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윽고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자, 연한 홍조가 피어 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밤늦게 들어오지 않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고, 곧 테이블 아래로 손짓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 빈 의자가 있었는데, 가까이 와서 앉으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미약한 불안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별의 행동 어딘가에 뭔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에 한 발짝 들어가는 대신,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과 감지를 활성화시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먼저 NTR 장면에 심한 불쾌감을 느끼셨을 독자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실은 원래 중간 과정을 더 쓸 생각이었습니다. 차유나가 박환희에게 넘어가는 부분을 추가시키고 싶었는데 어느 독자 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장르 문학은 독자 분들의 감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NTR은 저 또한 굉장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 그 분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해서 그 동안 깔아 놓은 장면들로 이만 마무리를 짓고 곧바로 결과만 올리기로 했고요. 굳이 이 장면을 집어넣은 이유를 하나 더 말씀 드리자면 더 이상 애 키우기를 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차후 서서히 변해가는 백한결의 행동을 보시면 납득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꾸벅.
하. 그리고 아카데미 부분이 원래 토요일 2연참, 일요일 2연참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쓰다 보니 안될 것 같더군요. 앞으로 남은 양이 분량 좀 높이면 3회, 아니면 4회 정도는 필요합니다. 즉 주말 중 하루는, 아니 어쩌면 이틀 모두 3연참을 해야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 하….
괜찮습니다. 오늘 레드불 반, 핫식스 반, 박카스 절반 섞어 섭취한 상태입니다. 이거 의외로 효과 좋아요. 여러분들에게도 추천 드립니다!(농담입니다. 정말 이대로 드셨다가는 정신적 공황을 겪으실 수 있습니다. 저처럼요. 히힣헤헿.) 아무튼 한번 약속 드린 건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얼른 아카데미를 끝내고 싶으니, 곧 죽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무조건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이시여! 제게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PS. 고장난선풍기님이 또 팬 아트를 업데이트 해주셨습니다! 뜰에 오시면 김수현, 그리고 예쁜 김한별과 이유정의 모습을 보실 수 있어요!(아카데미 끝낸 후 차차 작품 설정으로 업데이트 할게요!) 고장난선풍기님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김한별 두 번째 버전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ㅜ.ㅠ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암 쏘 쏘리 벗 알러뷰 입니다!(?!) 아마 한별이 일만 정리하면 빠르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병행이 가능하거든요. 지금껏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2. 현오 : 감사합니다. 확실히 학점은 좋은데, 정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닙니다. 그냥 혼자서 다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
3. 페라나도 : 소중한 조언 감사합니다. 리리플은 독자 분들과 조금 더 원활한 소통을 하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독자는 리리플 보다는 이야기내용을 더 좋아합니다.’ 라는 말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NTR은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첨언했습니다. ㅜ.ㅠ)
4. 시룡 : 시룡님 닉네임을 보니까 당룡님이 문득 생각나네요. ㅜ.ㅠ 하하하. 아카데미는 일요일에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_(__)_
5. 결빙화 : 다음 회에 해답이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눈치 빠르신 독자 몇몇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채신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ㅋㅁㅋ
6. 초혀니 : Yes. 정확히 보셨습니다. 원래는 되지 않는 경우지만, 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흐름을 정확히 짚으셨네요. 아마 다음 회에 나름의 이유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
7. Goksd : 실은 Goksd님이 가장 정답입니다. 네, 맞습니다. 주인공 보정은 위대합니다! 위대하죠! 아하하하!(퍽퍽!)
8. Astrain : Of Course. 그 부분에 대한 약속은 확실하게 지킵니다. 제가 이것을 한번이라도 어기면 그날로 10연참 들어가겠습니다.
9. 잠든괭이 : 헐. 헐…. 헐……. 헐………. 아껴놨던 이유중 하나가! ;ㅅ;…. 흑흑흑흑….
10. 輝雅 : 그 부분에 대한 설명도 주말 안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수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0년 차인데, 당하겠어요? 관록을 보여줘야죠.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이건 진리입니다.)
코멘트는 항상 전부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리리플에 없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신 부분은 쪽지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