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5
00234 백한결 그리고 김한별 =========================================================================
‘천장.’
위로 시선을 올리지는 않는다. 내가 알아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이미 제 3의 눈과 감지로 뭐가 있는지 정도는 파악한 상태였다.
나는 담담히 한별을 응시했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시종일관 유혹적인 눈길을 던지는 그녀를 보자 참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모두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오빠. 나 오늘 오빠 엄청 기다렸어요.”
한별이 살포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를 잡았다. 그녀는 옆쪽으로 빼주려고 했지만 내가 의자를 강하게 끌어당김으로써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순간 한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바로 풀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앉은 후 지긋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한별은 계속해서 어색한 표정,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일찍 좀 들어와주지. 너무해요.”
“…….”
“오빠. 나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혹시 나 혼자 마셨다고 화난 거에요? 알았어요. 한잔 따라드릴게요.”
“…….”
한별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잔을 건넸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그녀는 머쓱히 웃으며 홀로 잔을 따르더니 이내 내 앞에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나는 그 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너.”
“네?”
“도대체 왜 이렇게 됐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다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총명하고 날카롭던 한별이는 어디 가고 당장이라도 부서질듯한 유리조각만 남았을까? 나는 그녀가 따라준 술을 검사한 후 한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안타까운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후…. 그래. 이런 자리는 갑자기 왜 마련한 거야?”
“그냥~. 아카데미도 곧 끝나잖아요. 아쉬워서요. 그 동안 못한 얘기도 나누고 싶고…. 왜요? 저는 이러면 안돼요?”
“뭐가 아쉬운데?”
“오빠를…. 더 보지 못하는 거요.”
한별의 말투가 잠시 원래대로 됐다가 되돌아감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고 그대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보이는 호소 짙은 눈빛이 내 행동을 가련히 붙잡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호호. 저도 여자라고요.”
“한별아.”
“네. 아 잠시만요. 술을 잔뜩 마셔서 그런지 너무 덥네요.”
한별은 살살 눈웃음치며 한 손을 어깨위로 올렸다. 안 그래도 이미 노출이 심한 옷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걸치고 있던 끈을 풀자 한쪽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고, 그녀의 소담스러운 가슴 또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서 더 진행하려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걸 확인한 순간 나는 결국 참지 못했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네?”
내가 말을 꺼내자 조금씩 움직이던 한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이윽고 마치 인형이 고개를 돌리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하나씩 끊어 말하며 내 의지를 강조했다. 그러자 한별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옷을 벗기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애꿎은 테이블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한별의 얼굴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시선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한별의 옆모습만 보던 중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드는걸 볼 수 있었다.
조용한 침묵만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
“…….”
한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한별의 숨이 점점 거칠어진다. 한별의 입술이 달싹달싹 움직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벗겨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한별아.”
“오빠….”
“굳이 술에 취한척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결정타였다. 마지막으로 주저하던 모습을 보이던 한별은, 그 순간 “흑.”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흑…. 흑…. 흑….”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너진 한별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과연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만일 그녀가 선을 넘는다면 나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흐느끼던 김한별이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더니 옆에 놓인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술병에 장식된 자그마한 수정 하나를 떼어낸 그녀는 몸을 일으켰고,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울음이 조금 섞이긴 했지만 간드러진 게 아닌 본래의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나는 가만히 품속으로 넣어 연초를 꺼낸 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점화 석으로 불을 붙이는 순간, 한별의 주문이 완성된 소리가 들렸다.
“Penetrate(꿰뚫어라.). Blossom Of Crystal(수정의 꽃.).”
흘끗 고개를 올리자 한별의 손바닥 위에 놓인 수정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걸 볼 수 있었다. 수정은 이내 휘황찬란한 빛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꽃 모양을 이루었고, 이윽고 중앙에서 끝이 뾰족한 빛 하나가 거침없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쏘아지는 방향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쩡! 파사사사!
영상 기록 수정이 깨지고 파편이 이리저리 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쥐고 있던 점화 석을 위로 던진 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거센 불길이 휘감아 들었다. 피어 오른 불길은 비처럼 쏟아지던 파편을 모두 태워버렸다. 이윽고 제 역할을 마친 점화 석은 다시 내 손으로 곱게 안착했다.
“하아.”
한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어느새 가면을 벗은 원래의 표정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눈동자는 총명하게 빛나고 어딘가 모를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흡사 통과 의례에서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한별은 잠시 동안 허공으로 흩날리는 불씨들을 보다가 비로소 나와 시선을 맞췄다. 뭔가를 결심한 눈빛. 아까처럼 거북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는 사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황금 사자에서 오빠를 노리고 있어요.”
“자리에 앉아. 그리고 자세하게 말해봐.”
이미 예상하고 있어 담담히 대답하자 한별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의자에 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중간에 단 한번도 끊지 않고 한별의 얘기를 들었다. 황금 사자에서 한별이를 이용해 나를 옭아매려 한 사실은 이미 대충 눈치채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최후의 방법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한별의 말투를 들어보니 분명 좋지 않은 의도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끝낸 후 한별은 후련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다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몸을 가렸다. 나는 그녀가 옷을 걸칠 여유도 줄 겸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한별은 곧 본래 입던 로브를 꺼내 걸쳐 입었다. 이윽고 다시 나를 마주보며 앉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일어난 궁금증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한별아.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그래. 고맙긴 한데. 이걸 왜 나한테 얘기해준 거야? 넌 황금 사자 클랜원이잖아? 그리고 중간까지 그들의 말을 따라 행동했고.”
“…….”
내 질문에 한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제로 천장에 영상 기록 수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한번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고, 한술 더 떠 클랜 내부의 계획을 폭로해주기까지 했다.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1. 이름(Name) : 김한별(0년 차)
2.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Secret Jewe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바바라
4. 소속 단체(Clan) : 황금 사자
5.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0.5cm · 43.8kg
8. 성향 : 무기력 · 상처(Lethargy · Scar)
‘고르게 키우긴 했네. 애들 보다 성장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데 무기력? 상처? 이건 또 뭐야?’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한테 더는 이러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한별의 능력치와 성향에 대해 생각할 즈음 기어들어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용자 정보를 끄고 고개를 올리자 이제는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별이 눈에 보였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계속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의 진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 네 덕분에 나는 위험을 대비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럼 수료 후 나는 바바라를 떠나겠지. 그러면 앞으로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잘 모르겠어요.”
“다 모르겠다고 하면 어떡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야?”
“…….”
순간 내가 너무 몰아붙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한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슬픔으로 물든 얼굴로 내 말을 묵묵히 받아 넘기고 있었다.
톡톡. 나는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로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고, 그것은 불편한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생각해봤자 머릿속만 복잡해지고 가슴만 답답해진다. 나는 결국 모든 생각을 멈추고 제 3의 눈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그녀와의 대화였다.
해서, 나는 하나씩 차분하게 질문을 던져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어색한 분위기를 살짝 풀 필요가 있었다.
“너랑은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은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최대한으로 답변해줬음 좋겠다.”
“…네.”
간신히, 미약한 대답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실은 가장 궁금했던 첫 번째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너. 도대체 그런 명령을 받으면서까지 황금 사자에 남아있는 이유가 뭐야?”
“…….”
“사실상 그렇잖아.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고 해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있으니까. 설마 네가 당하는걸 즐기는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그런 취향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곳을, 황금 사자를 탈퇴할 수 없어요.”
비로소 입을 연 한별은, 낮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섞여있었다.
*
주점에 도착한 후 나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통제 지원이 없는 일요일이라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서서히 끝이 다가오면서 출입도 자유롭게 풀리고 있었기에, 부담 없이 외출할 수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어차피 내가 손님이 아니라 초대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금 기다리는 건 상관없었다. 텅 빈 3층에 홀로 있자 곧 웨이트리스 한 명이 사뿐사뿐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오셨어요?”
“아니요. 곧 두 명 더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럼 주문은 그때 하시겠어요?”
“그냥 지금 하도록 하죠. 여기서 자신 있는 거 전부 가져와주세요. 물론 주류도 포함해서요.”
“네?”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 하나를 던져주었다. 웨이트리스는 허공을 가르는 주머니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주머니 안을 살짝 열어보더니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내가 주문을 취소할세라 빠른 발 놀림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오늘 새벽 늦게까지 한별이와 대화를 했기 때문에 전신이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려고 했지만 김한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나는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천천히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