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7
00236 비틀린 신념 =========================================================================
13주차에 워낙 빡빡하게 진행해서 그런지 14주차는 굉장히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교육을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의 모든 정규 교육의 종료가 선언됐다. 이제 남은 공식 일정은 내일 오전으로 일정이 잡힌 수료식뿐이었다.
“오빠. 아 하세요.”
“아.”
“맛있어요?”
“응. 맛있어.”
“어머! 머셔너리 로드? 이곳은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식당이라고요!”
내 옆에 앉은 한별이가 먹여주는 음식을 삼키자 높은 하이 톤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성유빈을 볼 수 있었다.
“켈록. 켈록켈록.”
“오빠. 물 드세요.”
“내, 내가 마실게. 이리 줘.”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는지 성유빈은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아이참. 농담이에요.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실 필요는 없는데~.”
“하하. 실례했습니다.”
“농담이라니까요 정말.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친해진 거에요? 그러니까 꼭 둘이 사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서, 성유빈 간부님!”
“얘는 딱딱하게 간부님은 무슨. 언니라고 불러 언니.”
성유빈의 시선을 회피하는 척 하며 한별을 훔쳐보자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 없으면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말라고 했는데 다행히 내 말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칫. 눈빛들을 보니까 방해꾼 취급을 당하는 것 같네요. 알았어요. 이미 사라져줄게요.”
“아. 유빈씨. 잠시만요.”
“네?”
“어젯밤 북부 클랜원들의 모임에 참여했는데 말입니다. 이번 원정으로 바바라에 빈 땅이 몇 개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에 관한 자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성유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아.’ 하는 얼굴과 함께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네 있어요. 제가 관련 자료는 한별이 편으로 상세하게 보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내일이 수료식이니까 미리미리 준비하려고요.” 라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이윽고 성유빈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식당을 나서는걸 확인하는 순간 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한별이 고개를 들었다.
“푸.”
그 동안 어렵사리 숨을 참고 있었는지 한별은 풍선을 부는듯한 숨소리를 흘렸다. 눈을 깜빡이고 비비는 그녀에게서 수저를 빼앗은 후 나는 다시금 식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을 스윽 둘러본 한별은 이내 내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속삭였다.
“그런데 북부 모임에 참가했다는 말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의심 많은 여자잖아. 여러 상황을 드러내서 믿게 만들어야지. 혹시 자료 주면 군말 말고 받아와.”
“네. 아마 오늘 바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방금 가기 전에 저한테 호출 신호를 보냈거든요.”
한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리 액션이 과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가.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마침 잘됐네. 나도 식사 후 한결이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나중에 숙소에서 만나면 되겠다.”
“그럼 먼저 일어나볼게요.”
“그래.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 한별은 곧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후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내일이 기대된다.’
홀로 남은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미트볼을 휘젓다가 하나를 푹 꼽아 들었다.
서진우, 성현민과 한번 자리를 마련한 이후로 한별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의 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그 동안 절망과 상처 속에서만 살다가 희망이란 불빛이 내려오니 다시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때 모인 자리에서, 우리들은 세세한 계획을 정할 수 있었다. 한별은 수료식 날 터뜨릴 탈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황금 사자에서 허튼 움직임을 보이지 않도록 남은 날 동안 연기를 하기로 했다. 한별과 동침한 척,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과 친하게 지내는 척. 말 그대로 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이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 동안 잘 참았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나는 꽂은 미트볼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
원래 조금 일찍 숙소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한결이를 만나고 얘기를 듣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녀석 덕분에 내일 수료식에 대한 설렘이 한층 더 높아지고 말았다.
가뿐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오자 침대에 걸터앉아 내 교관복장을 개고 있는 한별이 보였다.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한별은 곁눈질을 하며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과 마력 감지를 활성화시켰다.
‘천장에 둘. 사선 배치. 바닥에 둘. 사선 배치. 합치면 사각 배치. 미친놈들인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침대에 누웠다. 막 교관복장을 정리한 한별은 이내 두툼한 기록을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까 식당에서 말씀하신 거에요. 성유빈 간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오 그래. 고맙다고 전해드려.”
나는 잠시 동안 기록을 열심히 살폈다. 내 말을 멋대로 해석했는지(실은 그럴만한 여지를 주기는 했지만.) 클랜 하우스를 짓거나 매입할만한 상품들을 소개해주는 기록이었다. 그래도 신경은 써준 듯 생각보다 가격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대도시 값이 어디 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한동안 기록을 읽는 도중 한별의 움직임이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지금 아래위로 사각 배치된 수정구는 영상 기록용이 아니다. 통신 영상 기록용이라는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음성,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양방향용이라는 소리였다. 지금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나와 한별의 정사를 기대하는 관음증 환자에게 간단히 애도를 올린 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참 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그러네요.”
“이대로 자기는 좀 아쉽다.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을래?”
“너무 늦지 않았어요? 내일 수료식도 있는데 그냥 주무세요.”
“그러지 말고 나가자. 가끔 야외에서 노는 것도 좋잖아.”
한별이는 스스럼없이 대답하며 알아서 꿍 짝을 맞춰주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빼는척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우리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한별은 방금 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어?”
“성유빈이 아무래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가 봐요. 그래도 거의 믿고는 있어요.”
“년이었군.”
“네?”
“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금 전 걸었던 길을 다시 되짚으며 숙소 밖으로 이동했다. 이왕 이렇게 나온 이상 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으니 정말로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잠시 동안 나와 한별은 조용히 걷기만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바로 이스터 에그였다. 정나미가 떨어진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애착이 가는 곳 이었다.
이윽고 여러 길을 따라 수풀을 헤쳐 이스터 에그로 도착한 순간 한별의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별도 이곳은 간만에 오는지 신선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로 흘러 들었다.
“오빠.”
“응.”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천만에. 그리고 아직 하루 남았지만 미리 축하할게.”
“네….”
뒤에서 뭔가 우물쭈물 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두 번 심호흡을 하다가, 툭 던지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네.”
“해봐 그럼. 지금 아니면 영영 못할지도 모르잖아. 예전에 오두막 앞에서처럼 하면 돼.”
살짝 맞닿은 등에 한별이 움찔하는 게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정말 해도 되요?”
“응.”
“그럼 절대 화내지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줘요.”
“뭐야 그게?”
“왜냐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오빠 입장에서는 전혀 공감되지 않으실 거니까요. 그리고 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이러는 걸까. 어쨌든 아카데미 마지막 날이다.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실컷 하도록 놔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픈 호기심도 있었다. 나는 담담히 “해봐.” 라고 대답해주었다.
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에 있던 시절 기억나세요?”
“아아.”
“제가 그때 오빠를 떠나갔다고 생각하시나요?”
“…….”
“당시 제 속마음은요. 그때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군가를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 누군가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상이 나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윽고 한별의 목소리는 마치 노랫가락처럼 아름답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아요. 그 상황을 제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건. 그래도 한번쯤은 알아봐주기를 기대했어요. 한번쯤은 찾아와주기를 기다렸어요.”
“…….”
“특별 취급을 원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최소한 다른 애들이 받은 관심 정도만. 아니, 그래. 믿어도 돼. 이 한마디와 함께 그 누군가가 저를 억지로라도 끌고 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죠. 그럼 못이기는 척 끌려갔을 거예요.”
“뭔….”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냐고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끝난 일이었고, 한별이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미리 연막을 쳐 논 상태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백한결 알지? 걔한테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군거야?”
“부럽고 질투 났으니까요. 제가 오빠한테 받지 못하던 관심을 그 애는 한껏 받고 있었잖아요. 마치 그 애들처럼.”
‘얘도 애 같은 면이 있구나.’
한별의 고백에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뭐라고 대꾸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발끈하며 하나씩 받아 쳤겠지만, 이 말을 하느라 큰 용기를 냈을 한별을 생각하니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 무지 창피해하고 있겠지.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고연주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야외 플레이를 1회 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최소한 조루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잘 들었다. 약속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 아무튼 서운했던 기억은 모두 잊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부터 새 마음으로 새 출발도 해야지.”
“아직도 걱정이 들어요. 과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 그래도 사람 하기 나름이니까. 아무튼 이만 들어가자.”
과거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다시 걸으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내 팔을 와락 붙잡는 한별의 손길이 느껴졌다.
“오빠. 아직 더 남았어요.”
“너도 참….”
“죄송해요.”
“……?”
갑작스레 들려온, 예상치 못한 한별의 사과에 나는 발걸음을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환한 달빛 속에서 나를 아련하게 응시하는 한별이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찬연한 입술이 살며시 열리는걸 볼 수 있었다.
“오빠. 잘못했어요.”
“한별아.”
“잘못…했어요.”
“너.”
“오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아요. 그래도 오빠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때 오빠를 잘못 생각했던걸 떨어져있던 내내 꼭 사과 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어요. 오빠. 정말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한별의 목소리는 간만에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한 줄기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한별을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말았다. 곧이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어깨로 이동하고, 살짝 끌어당기자 한별은 마치 자석처럼 내게 안겨 들었다.
내 품에 안긴 한별의 신체는 가냘펐다. 아니, 가냘픈 정도가 아니라 깡말랐다고 볼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안쓰러운 마음에 잠시 동안 그녀의 등을 두드린 후, 조용히 얼굴을 묻고 있는 한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
“…….”
“그냥. 그때 서로가 가려던 길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뿐이지, 네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애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내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한별이는 황금 사자를 선택했고, 나는 내 자신을 선택했다. 지금 와서 그 선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서로 맞지 않아 떠나갔을 뿐. 아마 내가 그때의 김한별이었다면 나 또한 황금 사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해요….”
한별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귓가를 스친다. 이스터 에그를 비추는 달빛과 바람이 스쳐 살랑 이는 풀빛 들판 위에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한 명의 여성을 안은 채, 그렇게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갔다.
*
사용자 아카데미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일찍 깨기는 했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수료식이 상당히 지루하기도 하거니와 일찍 가봤자 귀찮을 일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나와는 달리 일찍 나가버린, 비어있는 한별의 침대가 보였다. 잠시 어젯밤 그녀와의 일을 회상하다가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겨 입었다. 교관복장을 벗어 던지고 간만에 본 장비들을 착용하니 감회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대충 이 정도면 끝났겠다고 느껴질 즈음 나는 대강당을 목표로 천천히 이동했다. 목표 지점으로 가는 도중 무척 많은 사용자들을 볼 수 있었다. 간간이 동남부 소속 문양도 보였지만, 대다수가 서북부 클랜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황금 사자에서 또 뭔가 야료를 부린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이 새롭게 맞이할 홀 플레인 이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위험하고, 어지럽습니다. 수많은 단체, 즉 클랜들은 서로가….”
대강당으로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자, 무대 위로 진귀한 광경이 펼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신규 사용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부로 신규라는 단어는 졸업했습니다. 홀 플레인 에서 당당히 개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버리지 않는, 약하다고 외면 받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약자들의 편에 설 수 있는 단체를….”
확실히 수료식은 끝났다. 그러나 수료식이 끝난 이후 박환희가 무대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황금 사자를 비롯한 우호 클랜들은 다들 미묘하게 웃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수 동남부 교관들은 다들 한방 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신규 사용자들의 대표인 저를 포함한 217명의 인원은 어느 클랜에도 들어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우리들은 중립을 지키는 입장에서 따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로 입을 모았습니다. 좋지 않게 보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북 대륙의 발전에 기여할 테니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연설이 끝났는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환희는 무대에서 걸어 내려오며 꾸벅 고개를 숙였고, 박수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신규 인원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충 알겠군.’
박환희는 분명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그건 대외적인 명분을 위함일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예전에 들었던 대로 다른 클랜과 거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의 주위로 걸어가 축하해주는 몇몇 SSUN 클랜 소속 사용자들만 보니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체로, 서쪽 도시로 가서 터를 잡기로 한 것이다.
박환희는 주위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 없는 듯 보였지만 이내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인파를 헤치고 손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로 환영하고, 반갑다는 태도였다.
곧이어 그가 마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역시나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차유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묵묵하게 걷는 백한결도 볼 수 있었다.
‘형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음을 정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물러나기에는 너무 분해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니 입가에 연한 미소가 걸쳐져 있다. 그러나 그 미소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현재로서는 나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 또한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