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38
00237 비틀린 신념 =========================================================================
대강당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드디어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는 기쁨도 있겠거니와, 박환희의 연설에 다들 기분이 고양됐는지 떠들썩한 정도가 아니었다. 황금 사자와 우호 클랜들은 신나게 날뛰는 신규 인원들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되려 몇 명은 그 사이로 들어가 함께 축하해주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동남부 교관들이 생각나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에 봤던 광경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도 신규 사용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수십에 불과했다. 이윽고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클랜원들을 인솔하며 밖으로 이동하는 서진우를 볼 수 있었다. 슬슬 클랜에서 마중 나온 인원들과 함께, 황금 사자를 탈퇴할 인원들과 합류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얼른 뒤따라가야 한다고 느꼈지만, 일단은 백한결의 끝마무리를 지켜보는 게 우선이었다.
“어때. 환희 오빠. 내 말이 맞지? 우리 한결이, 결국에는 다시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래 정말 고맙다. 유나도 고맙고, 한결이도 고맙다. 하하하!”
“…….”
박환희와 차유나가 반가운 해후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백한결은 묵묵한 태도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 백한결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녀석은 현실 도피 경향과 의존적인 성격은 있지만, 지금껏 내가 보아온 그의 행동에 비추어보면 정상인의 범주에 있었다.
박환희가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자 백한결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곧 둘이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하자, 차유나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악수를 마친 후 백한결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형. 연설 감동적이었어.”
“오. 드디어 다시 형이라고 불러주는구나.”
“그래. 그리고 축하해.”
“축하? 하하하. 그래. 아무튼 다시 나를 믿고 돌아와준걸 환영한다. 잠시 길이 갈라지기는 했지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축하해줘서 고맙다.”
“응? 무슨 소리야? 내가 축하한다는 소리는 그런 의미가 아닌데?”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박환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변은 여전한 소음으로 시끌시끌했다. 박환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자, 비로소 백한결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지금껏 참고 참아온 모든 울분을 담아 토해내는 하나의 비명이라 봐도 좋았다.
“유나 누나랑 사귀는 거 축하한다고!”
백한결의 목소리는 컸지만, 대강당 전체에 일어나는 소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환희의 주위에 있는 사용자들에게는 확실히 들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환희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재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한결아. 그게 무슨 소리야? 유나는 네 여자친구잖아? 내가 왜….”
“말은 똑바로 하자고. 차유나는 내 전 여자친구잖아? 그리고 지금은 형 여자친구고.”
“유, 유나가 내 여자친구라고?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유나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래? 그럼 둘이서 왜 몸을 섞은 거야?”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대로 뜬금없는 폭로였다. 하지만 침묵이 찾아온 순간을 노린 효과는 더없이 확실했다. 비록 일부에 불과했지만 얼어붙었던 정적 위로 조용한 술렁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유나의 반응이 궁금해 자세히 살펴보자,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멎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다가, 곧이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하지만 백한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누나가 숙소에서 나오는걸 보고 몰래 뒤따라간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날 수풀 안에서 누나랑 박환희랑 서로 섹스 하는걸….”
“백한결! 헛소리하지 마라!”
“한결아! 아니야! 오해야!”
웅성웅성.
“뭐, 뭐야 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아. 그 찌질 이잖아 찌질 이. 맨날 숙소 앞에서 여자친구 기다린다는 애.”
“뭐야. 그럼 진짜 그랬다는 소리야?”
“야. 설마 환희가 그럴 리 없잖아.”
그래도 그 동안 박환희가 쌓아 올린 인맥이 제법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박환희와 차유나가 연달아 부정하자, 곧 분위기는 백한결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곧이어 죽일듯한 눈빛으로 박환희를 노려보던 백한결은, 이번엔 차유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동안 누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 한결이. 한결아. 진정하고, 착하지? 응? 일단 누나 말 좀 들어봐. 누나잖아. 누나가 다 설명해줄 수 있어.”
“처음에는 무조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자책감에 몸부림쳤지. 그래 누나니까. 누나가 나를 버릴 리 없으니까. 설령 그랬다고 해도 나한테 뭔가 잘못된 게 있을 거니까.”
“하, 한결아. 제발 누나 말 좀….”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 누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직시하라고. 있는 상황 그대로만 놓고 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백한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는걸 보니 아직 모든 감정을 정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부릅뜬 눈과 함께 그는 씹어먹을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밉더라. 누나가 미워지더라. 박환희와 차유나라는 인간이 증오스러울 정도로 원망하는 감정이 일어나더라. 그래.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이건 모두 누나 잘못이야.”
“즈, 증오스럽다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흑!”
“백한결. 마지막 경고다. 헛소리도 정도껏 해라. 더 이상 멋대로 지껄인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차유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박환희는 부드러운 말투를 버렸다. 그를 둘러싼 사용자들도 모두 백한결을 비난하며, 적당히 좀 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해라. 오해라고? 오해라고?! 거짓말하지마! 차라리 정말로 내가 싫어서 버리고 갔으면 이해는 돼. 그런데 아니잖아. 그 놈이랑 붙어먹으면서 나 이용해먹으려고 한 거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엉엉!”
“끝까지 거짓말을 하겠다 이 말이네. 그럼 대답해봐. 그때 몸 섞으면서 박환희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 저놈 품에 안겨서, 헉헉거리면서, 나 꼭 데려온다고 하면서, 환희 오빠 사랑해요 라고 속삭였잖아!”
“아니야! 그래도 환희 오빠를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나는 어디까지나 널 위해서…!”
“차유나!”
차유나도 결국은 참지 못했는지 폭발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앗 차 싶었는지 박환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얼떨결에 다른 말을 인정해버린 셈이었다. 설마 이것을 노렸다면, 대단하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번엔 대규모 침묵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찾아 든 정적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슬금슬금 대강당 전체를 점령한 상태였다. 어느새 모두가 세 명을 주목하고 있었다. 박환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차유나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박환희와 백한결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냈는지 백한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크게 내쉬며, 후련함이 담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아. 날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마. 가증스러우니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니 속은 시원하다. 아. 아니다. 아직 하나 남았어.”
“…….”
“나는 이만 꺼져줄게. 그러니까 잘 살아.”
“한결아! 기다려! 한결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였다. 백한결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차유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백한결의 앞으로 뭔가 희뿌연 막이 번쩍이는걸 볼 수 있었다.
“아아악!”
쿠당탕탕!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던 차유나는 곧 막에 부딪쳐 반대 방향으로 튕겼다. 거세게 나동그라지는 그녀를 보며, 소란을 정리하려 달려오던 SSUN 클랜원이 멈칫하고 말았다. 아무런 준비도, 주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 사용자가 나름 수준 있는 주문인 반사 능력을 사용하자 놀란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라는 생각에, 이만 구경은 멈추기로 했다.
“한결아.”
“혀, 형. 이건….”
“괜찮아.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동안 고생했고, 수고했어. 그리고 여기는 공석이잖니. 형이 아니라 클랜 로드라고 불러야지.”
“네, 네! 클랜 로드님!”
백한결은 나를 향해 미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나는 차분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박환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이제 더 찌푸려질 곳도 없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원래는 민폐 덩어리를 떼어내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여있던 강당은 어느새 불쾌한 소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박환희는 백한결이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시크릿 클래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에게 쏠리던 주목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에, 완전하게 자신 아래로 두기 전까지 숨기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반사 주문은 사용자 아카데미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방금 일과 관련해서, 의도적으로 숨긴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마 꽤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씨발…. 병신 같은 년….”
“어?”
“후. 지금 바로 사람들 끌어 모아. 바로 나갈 거니까.”
“어, 어.”
이곳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박환희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신규 인원들은 모두 떨떠름한 얼굴로 느릿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화, 환희 오빠? 아, 아니 한결아?”
“그럼 우리도 갈까?”
“네. 클랜 로드님.”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한결의 손을 잡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둘을 번갈아 부르짖는 차유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박환희도, 내 옆을 따라오는 백한결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만 불쌍하게 됐군. 쯧쯧.’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은지 한결의 걸음 속도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추며, 나는 강당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하나의 판은 정리했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어 마음이 다급했다.
이윽고 우리 둘이 입구에 다다를 무렵. 뒤쪽에서 누군가가 울부짖는 비명이 구슬피 울려 퍼졌다.
*
두 번째 판이 벌어지는 곳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강당을 나서고 정문 쪽으로 걸어가자, 서로 일렬로 늘어선 채 대치하고 있는 두 개의 무리가 보였다. 비록 한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밀리지 않는 치열한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 들었다.
황금 사자 클랜원들 사이로 김한별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었다. 그리고 나와 마주보는 방향으로, 조성호를 앞세운 동남부 클랜원들도 눈에 보인다. 그들의 뒤로는 황금 사자 클랜 복장을 입은 클랜원 여럿이 있었다. 얼추 세어봐도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었다.
첫 번째 판을 정리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려서 그런지, 도영록과 조성호는 이미 서로 한창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튼 당신들의 행태에는 이제 질렸습니다. 이번에 왜 이렇게 신규 사용자들의 영입이 없나 싶었는데 보아하니 또 개수작을 부리셨더라고 요.”
“너야말로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이번에 신규 사용자들은 그들의 스스로의 뜻으로 일어난 사용자들이야. 그네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뜻을 존중해줘야지. 안 그런가?”
“참 구변 하나는 좋으십니다. 평소 황금 사자의 여론 조작이 누구 손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 뜻을 존중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이분들 또한 당신의 행동이 그릇됐다고 여기고 스스로 탈퇴 선언을 한 사용자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웃기는군. 그거야말로 네놈 말마따나 개수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 아무튼 마음대로 짖으라고. 이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백한결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살벌한 풍경에 깜짝 놀랐는지 내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그들과의 거리를 거의 줄였을 무렵, 묵묵히 서 있던 황금 사자 클랜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사용자 도영록. 우리들은 당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요. 솔직히 무리한 원정 감행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실망만 안겨주고 있군요. 이제는 당신의 진심으로 대모님의 죽음을 애도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걸 인정하시고 깔끔하게 입장을 발표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 클랜원인거 같은데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군. 아무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데 누가 대본을 주기라도 했나 봐? 큭큭. 말이야 옳은 말로, 황금 사자가 잘 나갈 때는 철썩 달라붙어 있던 연놈들이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기도 안 차는구나. 차라리 너희들이야말로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 상황이 조금 힘들어지니 살살 눈치만 보다가 이 때를 틈타 탈퇴하려고 한다! 이게 너희들의 진정한 속마음 아닌가!”
“끝까지 실망만을 안겨주시는군요. 성 상납 비리부터 정이 떨어졌었는데, 이젠 일말의 미련도 없어졌네요.”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하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지. 어쨌든 자네 같은 비겁한 사용자들은 우리 클랜에 필요 없고, 오히려 나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야. 굳이 붙잡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여기서 알짱대지 말고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네.”
“하. 좋아요. 그럼 저를 비롯한 클랜원 19명은 이 시간 부로 황금 사자 클랜을 탈퇴하겠어요.”
“아아.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참고로 다시 기어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도영록의 말이 꽤나 속을 긁었는지, 뒤에 있던 인원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꺼번에 클랜 복장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동안 묵묵히 서 있던 한별은 다른 인원들과 맞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윽고 황금 사자가 그려진 로브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그녀는 그 틈에서 빠져 나와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쪽을 가로질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자연스레 여러 사용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성유빈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한별! 너, 너 지금 뭐해?”
“저도. 황금 사자를 탈퇴하겠어요. 참고로 방금 말한 19명중에는 저도 들어가 있어요.”
“뭐, 뭐? 미쳤어? 너 지금 장난해? 빨리 안 돌아와!”
“장난 아니에요. 명단 확인해보세요.”
김한별은 차갑게 대꾸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합류할 생각으로 황금 사자 옆을 지나칠 즈음,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성유빈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머셔너리 로드!”
“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아니, 지금 어디 가시는 거죠?”
“네?”
되려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하자, 성유빈이 눈이 번뜩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수료식 끝났으니까 돌아가라고 하던데요. 음성 증폭으로 들었어요. 아. 그래도 한 명은 스카우트 했습니다. 하하.”
나는 한결이의 손을 들어올리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 순간 성유빈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걸 볼 수 있었다. 제법 머리는 똑똑한 듯 보이니,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된 줄은 곧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호…. 호호…. 호호호…. 김한별! 이 씨발년이 이렇게 뒤통수를 쳐? 야. 네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되지, 응?”
“뒤통수라니요? 말씀이 심하시네요. 그리고 뭐가 안되나요.”
“아가리 찢기 전에 다물어. 네가 감히 나를 농락해? 흑사자! 뭐해? 지금 당장 저년 잡아와!”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하던 성유빈은 이내 한별을 가리키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일전에 본 기억이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용자들이 앞쪽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동남부 클랜쪽에서도, 두 명의 사용자가 걸어 나와 김한별을 마중했다. 그 둘의 정체는 바로 서진우와 연혜림이었다.
흑 사자들은 발걸음을 멈칫한 후 성유빈을 바라보았다. 그 틈을 타, 그들 사이로 쏙 들어가는 한별을 보며 그녀는 죽겠다는 양 발만 동동 굴렀다.
“김한별! 너, 너 설마 가입할 때 작성한 계약서를 잊은 건 아니겠지?”
“걱정 마요. 청구하세요.”
“뭐? 뭐라고?”
“다 갚을게요. 떼어먹을 생각 없으니까 청구하시라고요.”
“어머. 진짜 찌질 하다. 어떻게 클랜에 가입시키면서 계약서를 작성해?”
한별이 차갑게 받아 치자 나승혜가 기다린 듯이 빈정거렸다. 그녀는 일전에 1순위로 보류 처분을 받았는데, 그때의 일을 심히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던 것 같았다.
“그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도영록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성유빈을 강하게 쏘아보다가, 고개를 들어 한별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년.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그저 조용히 탈퇴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냥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 마음대로. 넌 안 돼. 너는 경우가 다르지.”
“아 잠시. 아까는 시원하게 보내주신다는 분이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셨습니까.”
성현민이 타이밍 좋게 앞으로 나서며 도영록을 지적했다. 그는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성현민은 콧방귀로 대응했다. 이윽고 황금 사자를 지나쳐 내가 합류하자마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클랜원들은 잡지 않으시면서 굳이 사용자 김한별씨만 잡는 건 이상하게 생각되는데요. 혹시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그 이유라도 알고 계십니까?”
“음. 글쎄요.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그런데.”
잠시 말을 멈췄지만, 이내 흑 사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흑 사자들이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나선다면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여러 사용자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들을 비웃는 이들을 보자 도영록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았는지 콧김을 세게 뿜고 있었다.
대치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영록은 실시간으로 표정 변화를 보여주며 우리 전체를 찬찬히 훑고 있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도영록의 떨어진 입 사이로 분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연놈들 데리고. 썩 꺼져라.”
“킥. 결국에는 또 웅크리겠다는 거구만.”
“지금 당장 꺼지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들은 다시는 바바라에 발을 붙일 생각도 하지 마라. 오늘 부로 출입 금지 처분을 내릴 생각이니까.”
“킥킥. 어차피 당분간은 그럴 생각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
“아. 아닙니다. 그럼 다시 뵙는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 하시기를. 말씀대로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자. 다들 이 냄새 나는 곳에서 떠납시다.”
조성호도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이쯤이면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확실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드디어 대치 상황이 해소되고 우리들은 몸을 돌려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찰싹!” 거리는, 누군가 뺨을 맞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도적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정문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렇게 막 정문을 나서려는 찰나 문득 예전 안솔이 내게 해줬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싫어어….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아…. 같이 가아…. 어어엉….’
‘그러고 보니 부랑자들 중에는 동성 연애자가 꽤 있다던데.’
앞으로 박환희가 어떻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기어코 서쪽으로 간다면 그의 앞날을 잠시 애도하기로 했다. 부디 그의 항문이 남아나기를 바라며, 나는 마침내 아카데미 정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자유로운 해방의 바람이 전신을 휘감아 드는 게 느껴졌다.
*
한별은 나오자마자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인파에(태반이 스카우트였지만.) 둘러 쌓였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찾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났다. 나는 그 동안 가까이 지낸 인원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성현민을 비롯한 몇몇 사용자들은 나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클랜을 너무 오래 비워뒀다는 말에 그들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추후에 한번 도시에 들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곳을 빠르게 빠져 나왔다.
겉으로는 꽤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백한결의 눈동자에는 연신 복잡한 기색이 얽히고 있었다. 이따금 입을 오물거리는 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이내 다시 한숨을 쉬기도 했다. 당장은 그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천천히 기다려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을 지나고 거리를 따라 걷자, 어느새 워프 게이트가 눈 앞에 보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내 뒤를 열심히 따라오는 한결이를 보자 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클랜원들의 얼굴도 연이어 떠올랐다. 이제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연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순간이었다.
“저, 클랜 로드님!”
빠르게 워프 게이트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한결의 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백한결을 쳐다보자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요. 무서운 누나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무서운 누나? 누구…. 푸훗.”
‘실은 광장에서부터 알고 있었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멀리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한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거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저기….”
“늦었네.”
“이, 인사 좀 하느라 요.”
“나한테도 인사하러 온 거야?”
짓궂게 물어보자 한별은 머뭇거리는 태도와 함께 발로 바닥만 긁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워프 게이트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내가 일부러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금방 따라붙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오, 오빠.”
“남부 도시 모니카. 3명입니다.”
“오빠…!”
“일단 들어가자. 들어간 다음 얘기하자꾸나.”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활성화된 포탈 안으로 몸을 묻었다. 시원한 마력의 흐름이 내 전신을 뒤덮는 찰나,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그러고 보니 연혜림이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 작품 후기 ============================
일단 올립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가니까 힘이 달려서…. 조금만 쉬다가, 후기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20:42)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자정 업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눈도 너무 아프고 졸리고 몸이 피로해서요. 이번 주 주말 업데이트 분량을 보니 85KB네요.(내 8회 연재 분! 으아아앙!)
대신 아주 쉬는 게 아니라 설문 조사도 새로 바꾸고, 캐릭터 설정도 업데이트 하는 등등 여러 가지를 손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강의가 있어서, 오늘도 밤을 새면 진짜로 페이스가 흐트러질 것 같아요. 뭔가 좀 짬도 나야 리리플도 하고 그럴텐데…. 원래 연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독자 분들의 하해와 같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