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4
00024 함정의 도시. =========================================================================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안현과 이야기를 나눈 후, 방으로 돌아와 불침번 및 간호 교대를 할 수 있었다. 괜찮다고, 더 자도 된다고 말해도 한사코 등을 떠미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눈이라도 잠깐 붙일 요량으로 거실 한구석에 누웠는데 아무래도 푹 잠든 모양이다. 나는 약간 반성하기로 했다.
지금은 거리낄게 없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물론 내가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성이 차는 인물이었다. 이미 10년 동안 습관이 돼서 푹 자고, 배부르게 먹는 건 일부러 멀리하는 편 이었다. 슬슬 페이스 좀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주변에 인기척이 들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의외로 인물이 내 잠자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바로 안솔이었다.
“앗!”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흔들던 안솔은 이내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눈을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데. 나는 너의 적이 아니란다. 그러니 해치지 않아요, 라는 의미를 담뿍 담은 목소리로 부드러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몸은 좀 괜찮아?”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 말에 허둥거리면서도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저 아이만 보면 스스로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한없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행동을 보던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태도로 미적이더니 이내 나를 향해 모기만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 오빠.”
“응.”
“죄송해요….”
“응?”
얘는 또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어제나 오늘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안솔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 얘기를 들어서….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다고….”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정도로 그녀가 한 말은 앞뒤가 생략되어 있었다. 그걸 집어 치우고서라도 안솔이 말을 더듬는걸 보며 나는 문득 이 아이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다른 사람한테 말도 더듬으면서 홀 플레인의 비일상적인 사람들이랑 생활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이 아이가 나중에 여성 사용자들의 대표나 다름없는 그림자 여왕이나 처형의 공주와 동급으로 올라서는 광휘의 사제가 된다고? 참 머나먼 얘기로구먼.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굉장히 잘했는걸. 나도 들었는데 모두의 목숨을 구했다면서?”
“아, 아뇨! 그건 저도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면 또 한껏 풀이 죽을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칭찬은 확실히 들었는지 이내 그녀의 표정에 화색이 돌더니 헤실 거리는 얼굴로 손을 방방 젓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난다는 소리고 결론은 말 그대로 천연 타입이었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순수하고 천연으로 키운 건지 정말로 궁금했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현 오라버니. 일어나셨으면 식사 하세요.”
“?”
“왜요? 오라버니? 왜 그렇게 의문이 가득 찬 눈길로 소녀를 보시는 거죠?”
“?”
“왜 그렇게 보시…. 제길, 알았어. 원래대로 할게. 어제 우리들 대신 솔이 간호하고 불침번 섰다고 안현이 말해주더라. 고마워서 아침 만들었어. 나머지는 이미 다 먹은 상태니까 걱정 말고.”
“음. 확실한 이유정이군.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자 그녀는 열 받은 얼굴로 내 앞에 접시를 탁 내려 놓았다. 메뉴는 어제와 똑같은 참치 크래커. 메뉴가 똑같다고 만들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니 라고 놀리고 싶었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사늘한 눈길에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손을 내밀어 크래커 하나를 베어 물었다. 이유정과 안솔은 가만히 앉아 내가 먹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막 크래커 하나를 꼭꼭 씹고 있던 나는 불만스런 얼굴로 먹던걸 내려 놓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이유정은 더 먹으라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고 안솔은 뭐가 그리 좋은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전히 헤실 거리는 중 이었다. 오늘 얘들이 단체로 돌은 건가.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로 보이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먹는 방법이 신기해서.”
“방법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라. 흠. 그렇게 이상하게 먹었나? 그냥 평소에 먹던 방법으로…. 무심하게 생각하던 나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아차 하고 말았다.
“안현은 그냥 몇 번 씹고 꿀떡 삼키던데 오빠는 완전 반대잖아. 얌생이처럼 약간만 뜯어 먹더라. 그것도 최대한 천천히 잘게 잘게 씹은 후 조금씩 삼키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렇게 먹는 건데?”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정의 눈썰미는 예상외로 날카로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예전에 요정의 숲에서 요정들한테 쫓길 때 식량이 부족했던 때가 있었다. 남은 식량을 쪼개고 쪼개 하루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만 먹었는데 그때 이런 식습관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캐러밴을 꾸리거나 원정대에 참가하는 등 전투에 임할 때는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평소에 절대로 배부르게 먹지 않는다. 포만감은 예민한 감각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위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슬쩍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냥 평소 버릇인데. 먹을 때는 먹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조금 적게 먹는 편이거든. 그나저나 나머지 둘은 안보이네. 다들 어디 갔어?”
“안현이랑 김한별? 안현은 혼자서 주변 둘러본다고 나갔고 김한별은 옥상으로 올라간 것 같던데.”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지 순순히 대답하는 이유정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안솔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직 어색함이 어린 얼굴로 다시 헤실 헤실 웃는다. 도대체 얘 오늘 왜 이러는 건데.
나는 안솔이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어린애는 처음 낯선 이를 보면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가서면 애들은 싫다는 의사를 보이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애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게 한다. 그러면 궁금증이 일어난 아이는 아장아장 다가와 호기심을 표현하는데 바로 그때가 애들과 친해질 수 있는 적합한 시기였다.
잠시 안솔에 대한 고찰…. 아니 그냥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이유정이 만들어준 크래커를 하나 더 씹으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24:00를 기준으로 하루를 카운트 한다고 하면 오늘이 바로 트랩 포인트에 들어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즉 오늘 24:00까지가 안전한 날이라는 소리였다. 모두 말은 없었지만 이곳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할 얘기도 있고.”
“무슨 얘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같은 거?”
“비슷해.”
“무슨 얘긴데. 오빠. 나랑 솔이한테 먼저 말해봐.”
양 무릎을 모은 상태서 두 팔을 둥글게 벌려 감은 형태로 앉은 이유정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솔도 앞으로의 얘기가 나오자 놀랐는지 살짝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이 말을 하면 반발이 클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면 승부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말하기 어렵다고 해도 어차피 다들 알아야 하는 사실 이었다.
“오늘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예상대로 둘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
“잠깐 순찰 좀 다녀 왔어요. 형 말대로 섬찟할 정도로 조용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안현의 첫마디는 도시가 수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는 소리였다. 할 얘기가 있다는 내 말에 거실에는 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모여 있었다. 김한별은 바람을 쐬며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평소처럼 차가우면서 차분한 얼굴을 회복한 것 같았다. 나는 모두의 얼굴을 살핀 후 바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지금 이 통과 의례로 불리는 장소로 오기 전 천사들한테 들은 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글쎄. 나는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날개 달린 년이랑 대판 싸우느라 들은 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정을 보자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일단 저 녀석은 젖혀두고 나는 안현과 김한별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하나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주의 사항을 읽긴 했는데 너무 여러 가지가 많아서…. 물이나 식량은 주지 않으니 알아서 찾는 것, 이 공간에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을 의미하니 조심할 것, 생존 조건은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는 것과…. 에 또 뭐더라.”
“7일 동안 버티는 것이죠.”
안현의 말을 김한별이 보완하며 받았다. 그리고 그 말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말 이었다.
“바로 그거에요. 7일 동안 버틴다. 한별씨, 혹시 그 조항에 붙어있는 다른 사항 기억 안 나나요?”
내 물음에 김한별은 잠시 이유 모를 불만 어린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억나요. 한 장소에 절대로 안주하지 말라고 천사한테 직접 들은 것 같아요. 7일 동안 계속 도망 다니든지 아니면 중앙으로 가라고 했죠.”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고는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이유정이 재빠르게 들고 일어나 선수를 쳐버렸다.
“하지만 오빠. 여기는 안전하잖아? 먹을 것도 많고, 잠도 잘 잤고, 집도 있고. 다들 어제 기억 안나? 숲 안에서 나오자마자 죽을 만큼 고생했잖아.”
“그건 그러네. 형. 정말, 굳이 이곳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 천사들 말을 꼭 다 믿을 필요는 없잖아요.”
곧이어 안현까지 그녀의 말을 지원하며 나에게 묻자 이유정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모양 이었다. 나는 둘의 시선을 받아 넘기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모두들 지금 당장이 편하다고 너무 안일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한번 반대로 생각을 해봐.”
“반대로?”
“그래. 지금 현이가 주변을 돌고 왔으니 알겠지만 지금 이 도시는 너무나 조용해. 숲에 있을 때는 긴장의 연속 이었고 나와서도 너희들은 습격을 받았지. 밖으로 나가면 아마 또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바로 말을 이었다.
“천사들은 우리들한테 그런 행동을 원하지 않아. 실제로 경고도 했고. 7일 동안 살아 남거나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고 절대 안주하지 말 것. 천사들이 원하는걸 잘 파악해야 돼. 통과 의례의 뜻과 지금 우리의 상황을 종합하면 뜻에 어긋나게 돼버려.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이상하잖아? 밖이랑 비하면 시설도 편하고 먹을 것도 많고 괴물들도 없고. 난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더 머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러니까 오빠는 결국 감이 안 좋으니 떠나자는 거잖아.”
“예감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알아. 하지만 정말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건 사실이라고. 이런 장소는 딱 쉴 만큼만 쉬고 챙길 만큼만 챙기고 떠나는 게 가장 효율성이 높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나는 오늘 안으로 떠났으면 좋겠다.”
설득하고 있기는 해도 솔직히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다. 위험이 직면한 상황과 안전한 상황은 설득 성공률이 판이하게 다르다. 더구나 이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논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예측 또는 예감에 의지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홀 플레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하나 같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는 게 떠나기 싫은 듯 보였다. 물론 보스 몬스터 따위 내가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천사들이 마련해준 장소인 만큼 이들에게 정석적인 코스를 밟게 하고 싶었다. 지금 편하면 편할수록 홀 플레인에서 고생할게 뻔하니까. 안현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하고는 이내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의견이 다른 것 같으니…. 다수결로 해요.”
“다수결?”
“네. 다만 이 다수결에는 두 가지 조건을 걸 거에요.”
“어떤 조건인데요?”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는 흥미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다수결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 같았다. 김한별 또한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반문하자 안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조건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어. 먼저 첫 번째. 한 사람당 찬성, 반대, 기권 중 하나를 선택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이 그 권리를 선택한 이유를 꼭 말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불평 불만 없이 그 결정에 따를 것.”
안현의 말에 이유정은 이곳에 남는다 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성 찬성! 나는 이의 없음. 다수결이라, 다수결 좋네. 지금 바로 하자. 나 먼저 한다?”
“하긴. 이런 건 빠르게 하는 게 좋지. 수현이 형은 일단 찬성 한 표도 돌려 놓을게요. 이유는 이미 말씀 하셨으니까요.”
“이의 없음.”
“그러면…. 혹시 다른 의견 가진 사람 있나요? 없으면 이대로 할게요.”
김한별과 안솔 그리고 내가 동의하자 안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그녀의 입이 열리고 모두가 그녀가 하려는 말을 주목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