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49
00248 부수입 =========================================================================
동쪽 성문을 나서는 우리들을 향해 거주민 경비병들이 힘차게 경례를 올려붙인다. 그 모습을 보자 새삼스레 모니카와 뮬, 두 도시의 차이가 느껴졌다.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갑옷만 봐도 뮬의 후줄근함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절로 고개를 끄덕여지게 하였다.
넓게 펼쳐진 광활한 녹색 대지 사이로 난 잘 닦여진 길들은, 저기 멀리서 우뚝이 박혀있는 이정표와 함께 여러 갈래로 보기 좋게 나뉘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분명 도시 외부임에도 불구하고 성벽 또는 주위에 세워진 아름드리 나무들 아래로, 많은 수의 사용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 보인다.
“와하하! 효과가 정말 장난 아니었다니까? 내가 오늘 꽃 데리고 러브 하우스로 돌아가는데. 아주 맥을 못 추더라고! 아주 그냥 내 팔에 꼭 붙어서는….”
“와 씨발, 부럽다. 너 그런데 돈이 어디서 나서 정력 증가 물약을 사 마셨냐. 그거 좀 비쌀 텐데.”
“킥킥. 형님이 얼마 전 원정에서 한 건 했다는 거 아니냐. 숲 속에서 운 좋게 고블린 부락을 발견했거든. 거기서 금화랑 장신구 좀 챙겼지.”
“고블린 부락? 아직도 남아있었어? 이야, 완전 날로 먹었구먼.”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뮬에 비하면 이곳은 공원이 아닐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공원에 산책,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부락이라고 해도 대박이 아닌 이상 2, 300골드를 넘기는 힘들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중 한 명의 등을 보고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클랜 문양이 있는 걸로 보아 제법 실력 있는 전투 사용자들인 모양이다. 클랜에 들 수 있을 정도라면 일반 고블린들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아마 공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인 듯싶었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말들이었기에, 이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나는 곧장 지도를 들어 대강 방향을 가늠한 다음 맨 왼쪽에서 두 번째로 나있는 길로 원정대를 이끌었다. 일단 최소 오늘 하루는 아무리 걸어봤자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0%에 수렴하기 때문에, 급속 행군을 하더라도 최대한 진도를 뺄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급속 행군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뒤처지지 않도록 신경 써서 따라와주세요.”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높일 것을 주문한 후, 나는 느긋하게 걷던 걸음의 템포를 서서히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걸음 속도에 비례해 대지를 구르는 발소리들의 주기도 점점 짧아지는걸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우리들은 거의 말도 나누지 않은 채 행군에 집중했다. 애들에게 맞춰주는 게 아닌, 내 능력치들에 맞춰 속력을 조절해서 그런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아니 우리들은 거의 가벼운 달리기 수준으로 한없이 걷고 걸었다.
약 여섯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 동안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급속 행군을 유지해서 그런지, 뒤에서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출발할 때만해도 구름 속에 숨어있던 해는 어느새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따가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 속에 클랜원들의 땀 내음이 섞여 들어올 즈음, 이쯤이면 됐다 싶어 조금씩 걸음을 늦추어주기로 했다.
내가 행군을 멈추고 휴식을 선언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현재 우리들이 멈춘 곳은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이 솟아오른 곳, 즉 언덕이 듬성듬성 올라와있는 삼림의 초입이었다. 그 중 하나의 언덕위로 올라서자 빽빽하게 모인, 키 큰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
먼저 위에 올라서 주변을 살피는 동안, 곧 땀으로 젖은 머리를 찰랑이는 클랜원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걸 볼 수 있었다. 순간 아래서 들리는 찰박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내리자,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있는 곳에, 고연주가 발을 담근 채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고는 양 손을 흔들었다.
“학, 학.”
“하앙, 하앙.”
“학, 야. 너 무슨, 숨 차는 소리가, 그러냐. 꼭, 헐떡이는, 소리 같잖아, 학.”
“하앙, 시끄러워. 힘들어, 죽겠는데. 왜, 꼴리냐? 하앙.”
안현과 이유정이 서로 투덜거리며 언덕에 오른다. 작정하고 달린 거라 따라올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근접계열이기도 하거니와 그 동안의 단련이 헛되지는 않은 듯싶었다.
이윽고 둘이 천천히 심호흡을 할 즈음, 아래쪽에서 조금 쉬다 왔는지 안솔, 백한결, 김한별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서 숨은 골랐는지 호흡은 괜찮아 보였지만, 세 명 모두 체력이 약한 클래스들이라 얼굴이 하얗게들 질려있었다.
안현은 연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다가, 곧 괜찮아졌는지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형. 이번 행군 속도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알고 있어. 그래도 당분간은 이 속도를 유지할거야.”
“헐. 무, 물론 저나 이유정은 괜찮겠지만 말이죠. 다른 클랜원들이 따라올 수 있을까요?”
“다른 클랜원들?”
안현의 말에 흘끗 시선을 던지자, 세 명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따라갈 수 있으니 괜찮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자, 안현은 멀뚱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이곳이 위험 지역이거나 미개척 지역이었다면 체력 관리에 신경 쓰며 행군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한 체력은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모니카는 안정화가 굉장히 잘 되어있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저 안정 지역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내가 이리도 서두르는 이유를, 클랜원들은 아마도 먼저 들어간 사용자들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각의 협곡에 있는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클랜원들에게 10분뒤 출발이라고 말해준 후(여기서 누군가의 소리 없는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그대로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팍!
이리저리 흩어진 나뭇잎을 지르밟고 굽힌 무릎을 세우자, 고연주가 여전히 물에 발을 담근 채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요.”
“네.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대로 왔어요. 정말 대단해요. 이 속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흔적을 쫓다니.”
“대충 가늠했을 뿐입니다. 그림자 여왕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호호.”
살짝 띄워주자 고연주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리고 발을 거둬 신발을 신고는, 펄쩍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윽고 그녀가 착지한 곳은, 아주 살짝 이기는 했지만 한쪽 방향을 가리키는 풀들이 듬성듬성 돋아난 곳이었다.
고연주는 가볍게 쓱, 땅을 훑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여울가녘은 10명. 그리고 1차 구조대는 14명으로 구성되어있었네요. 멍청이들.”
“다른 흔적은 없나요?”
“있어요. 하지만 방향이 이리저리 비틀려있네요. 이스탄텔 로우에서 얘기해준 시기와 맞춰 생각해보면 제가 보고 있는 흔적들이 맞을 거예요.”
“그럼 일단은 이 방향을 따라 삼림을 나서고, 다시 흔적을 찾아야겠군요.”
나는 시선을 동쪽 방향으로 돌렸다. 지도에 나온 거리에 따르면 지금부터 대략 하루 정도는 걸려야 벗어날 수 있겠지만, 현재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반나절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삼림을 벗어난다면, 그나마 덜 안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통곡의 평야가 나온다.
속으로 이런저런 주판을 튕기고 있자, 언덕 위에 있던 클랜원들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아래서 쉬고 있으라 했는데, 어차피 내려올 거면 왜 따라 올라온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려온 클랜원들을 정렬시켰다.
“안현 선두. 안솔, 백한결 중앙. 김한별은 둘 바로 뒤로. 이유정은 후방으로. 고연주? 키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신속하게 진이 잡히는 순간, 곧장 급속 행군을 재개했다. 출발한다는 소리와 함께.
*
어느새 해는 저물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거울 같은 달이 떠오른다. 어둑한 땅거미가 대지를 점령하려고 그러는지 달빛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꼬박 하루의 대부분을 급속 행군한 덕분에, 울창한 삼림을 벗어나 통곡의 평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야간 행군도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오늘 걸어온 거리가 충분하기도 했고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백한결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한결. 확실히 뭔가 있는 놈이었다. 아직 익숙지 않은 만큼 한두 번은 낙오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이를 악물며 아무런 불평 않고 따라왔다. 그 점이 나를 조금이나마 감탄하게 만들었다.
야영 장소를 고르는 데는 딱히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평야 한복판에 있는 만큼 거기서 거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원정용 마정석을 사방에 깔아 야영 준비를 마친 후, 우리들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한 고연주 덕분에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자 급격히 졸음이 쏟아지는지 안솔과 백한결은 사이 좋게 고개를 꺼뜨렸다. 누가 누가 가장 체력이 낮을까 대결을 시킨다면 둘이 1, 2순위를 다툴 것인 만큼, 약간의 배려를 해주어 불침번의 마지막 순서로 돌려주기로 했다.
타닥, 타닥.
혹시라도 화재가 날 우려가 있어, 풀들을 제거하고 약간 파둔 구덩이 안의 나뭇가지 사이로 은근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안솔, 백한결은 각기 침낭 안에 쏙 들어가 색색 숨을 내쉰 지 오래였다. 고연주와 이유정은 다음 불침번 차례이기 때문에, 방금 전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깊은 밤. 오직 나, 안현, 김한별만이 아무 말도 없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물끄러미 모닥불만 보던 안현이 고개를 들었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게요. 회의에서 형이 환각의 협곡에….”
아아아아아아….
그때, 평야의 바람을 타고 누군가 통곡하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막 말을 이으려던 안현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눈만 빼꼼 내밀던 한별이도. 둘 모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움찔한 모양새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달의 모양을 확인하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
“아, 아니. 방금 전 분명 울부짖는 소리가….”
“아까 말해줬잖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통곡의 평원이라고.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
“으으. 귀신이에요? 귀신은 싫은데.”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고 하려다가, 한별의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이는걸 보고 그냥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안현은 엄살이 아닌 듯,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씨. 괜히 신경 쓰이네.”
“별거 아니라니까. 원래 이런 곳이야. 통곡의 평원은 굉장히 넓은 지역이거든. 아. 어떻게 보면 이곳의 특성은 굉장히 재밌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
“어떤 특성이 있는데요?”
“아주 가끔씩 그냥 까닭 없는 통곡이 평원 전체로 메아리 친다는 거지. 하하.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이곳은 그래도 꽤나 안정화가 진척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마 한번 울리면, 적어도 몇 시간은 잠잠 할거다.”
“아 그래요? 그러면 뭐….”
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런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곧바로 또 한번의 통곡이 야영지 주변을 아련하게 울린다.
‘어라. 두 번?’
“…….”
“…….”
안현과 김한별의 시선이 내게로 모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잠시 생각할 즈음, 푹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누군가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난 사람은 고연주였다. 그녀는 막 잠이 들려다 깨서 짜증이 났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 방금 소리 들었어요?”
“들었습니다.”
“몇 번 들었나요?”
“두 번입니다.”
고연주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 그러나 두 번이라고 대답한 순간, 그녀는 튕기듯 일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 그대로, 고연주는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가끔씩 들리는 한번은 아무 이상 없는 거고. 두 번째 통곡은…. 아 뭐였더라.”
“통곡의 평야 어딘가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신호죠. 위험 경고입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현과 김한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네들에게도 일어나라는 신호를 주며, 허리춤에 맨 일월신검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어느 때보다 확실한 통곡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비단 나만 들은 게 아니었다. 지금 깨어있는 모두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가고 있었다.
“세 번째네요. 이건….”
확실하게 잠이 깼는지, 고연주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되돌아와있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매듭지어주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입니다. 안현, 김한별. 지금 자고 있는 사람들 모두 깨워라.”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리리플을 못해드려서 정말 죄송했는데, 많은 독자 분들이 이해해주셔서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_(__)_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끝나면 간간이 연참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