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5
00025 함정의 도시. =========================================================================
“당연히 나는 반대. 숲이랑 여기랑 비교하면 바로 답은 나오잖아? 괜히 불확실한 오빠의 예측에 목숨을 내놓긴 싫어. 굳이 이 도시를 나가면서 어제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건 아니라고 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이유정은 반대표를 던졌고, 이로서 찬성과 반대는 각각 한 표씩 나온 상황이었다. 입 안에 조금 텁텁했지만 일단 가만히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유정의 다음 순서는 김한별 이었다. 최소 김한별이 찬성표를 던진다면 희망을 노려볼 수 있어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평소의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딱히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 나름의 판단으로 이분을 본 결과 결코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 되지는 않아요. 실제로 지금껏 항상 좋은 판단을 내려 주셨으니까요. 말씀하신걸 증명할 수 있는 사례는 충분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근거로서의 기능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찬성, 반대를 고를 수 없어요. 그러니 기권 할게요.”
김한별은 기권을 선택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유정은 이미 우리가 남을 거라는걸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나는 생각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를 대비하기로 했다. 까짓 거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고 해도 때려 잡으면 그만이다. 들키지 않게 잡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남은 사람은 안현과 안솔이었다. 안현은 잠시 동생을 쓱 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솔아.”
“응?”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안현의 말에 안솔은 일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손가락을 접기도, 피기도 하는 게 지금까지 나온 표를 세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랑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이내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이 발개지면서 바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그러면서 계속 흘끔흘끔 나를 곁눈질하는 것을 보니, 혹시 어디 아프나 생각이 들었다.
“솔이는 당연히 반대지~? 그렇지? 여기가 안전하고 편하잖아. 밖으로 나가면 또 무서운 괴물들이 왕~! 하고 몰려와요!”
어느새 이유정은 안솔을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안솔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유정이 과장한 얼굴로 겁을 주자 볼은 빵빵, 입을 삐죽삐죽 거리며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 눈치를 살짝 보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수현이 오빠 말에 찬성할래요.”
오호라.
“그럼! 당연히 찬성~! 응? 뭐라고? 찬성한다고?”
이유정이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찬성의 말을 듣자 바로 표정이 변하며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안솔은 잽싸게 안현의 품 안으로 숨어버렸다. 안현도, 김한별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솔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한동안 입만 오물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네. 찬성해요.”
“왜! 도대체 왜!”
“히잉….”
흉신악살의 얼굴로 씨근거리는 이유정을 물리친 안현은 겁먹은 안솔을 달래며 부드러운 말로 이유를 물었다.
“솔아. 왜 찬성하는지 모두한테 말씀 드려야지.”
“응…. 그게…. 그냥이요. 그냥 그런 예감이 들어서요. 왜냐하면…”
예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안현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짧은 순간 이었지만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야! 고작 예감으로 그러는 게 어딨어….”
“조용히 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안현의 얼굴은 보통 진지한 게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한 얼굴로 안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솔은 그런 그의 시선을 못 느꼈는지 멀뚱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예전에는 그냥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오늘 자는데 꿈에 수현이 오빠가 나왔어요.”
“잠시만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솔아. 계속 끝까지 얘기해봐.”
“우리가 이 방에서 다들 자고 있는데 커다란 괴물이 나타났어요. 마치 에일리언 같은 괴물이요. 그 괴물은 우리들이 있는 건물에 정확히 와서요….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어요. 꼼짝없이 그렇게 다들 죽는가 싶었는데, 아니 확실하게 죽은걸 본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꿈 내용이 변했어요.”
“어떻게 변했는데.”
“태엽을 감는 것처럼 꿈이 처음으로 돌아가더니 갑자기 수현이 오빠가 나왔어요. 그리고 그 괴물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수현이 오빠는 자신이 이 괴물을 막을 테니 우리 모두한테 도망가라고 했어요. 저는 오빠 품에 안겨서 정신 없이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게 문득 오빠 걱정이 돼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꿈이 끝났어요.”
“다른 건 기억 안나니?”
“맨 마지막에 끔찍한 괴성? 비명? 아무튼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일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과거로 되돌아온 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모르는 분야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 이었다.
그녀의 능력 수치는 마력 75 포인트 그리고 행운 100 포인트. 내 마력 포인트인 96 포인트는 그냥 그런 포인트가 아니다. 당장 홀 플레인에 들어가서도 마법사로 손꼽히는 능력치란 말이다. 그런 내가 제 3의 눈의 힘을 빌어도 과거를 단 1초만 보는 것도 겨우 허락될 정도인데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꿈의 힘을 빌어 과거, 미래를 본 것이다.
물론 나와 안솔간의 엄연한 차이점은 있었다. 나는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볼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순간에 힘을 발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이 간섭에 의한 건지 실제로 일어난 건지 확신할 수 없고, 무작위로 발현 되는 모양 이었다. 아마 극한에 다다른 행운 포인트 덕분에 꽤나 잘 들어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나는 초기에 품었던 의문 중 하나가 풀리는 것 같았다. 1회 차 사용자 시절 때 이들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이들은 그때 어떤 이유로 모여서 이 도시에 왔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틀을 초과해 보스 몬스터에게 당하고 만 것 같았다. 아마 안솔은 그때 그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일 것이다.
“하아….”
앞쪽으로 안현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얘기를 마친 안솔은 불안한 눈으로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안현은 거실 바닥을 손가락으로 딱딱 부딪치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심란함에 찬 얼굴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수현이 형 의견에 찬성합니다.”
“너는 또 왜? 너도 나가기 싫다며…! 지금 동생 편드는 거야?”
이유정이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바로 태클을 걸었다. 안현은 미안한 얼굴로 잠시 이유정을 보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편드는 거 아냐. 조금 웃긴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슬쩍 고개를 숙인 안현은 자기 품에 안겨있는 안솔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난 솔이랑 19년 넘게 살아왔어. 그리고 이런저런 일도 많이 있었고. 그때마다 느꼈는데, 얘가 감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당연하지. 행운 100 포인트로 직감이나 천리안을 얻으면 미래 예지도 가능한데. 물론 랭크가 어느 정도 받쳐주긴 해야 하지만.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고 있자 이유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 놈의 감, 감, 감. 지긋지긋해.”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확실해. 실제로 솔이가 불안하다고 느끼면 그때는 꼭 안 좋은 일이 일어났어. 꿈으로 얘기를 듣는 건 드문 편 이지만…. 아무튼 찬성 3표, 반대 1표, 기권 1표로 떠나는 걸로 결정하겠어. 애초에 약조한대로 모두 결론을 따랐으면 한다. 다들 일어나. 바로 행동하자.”
“지금 바로 떠나려고?”
“솔이가 그런 꿈을 꾼 이상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게 편해. 다들 최소한 필요한 것들만 챙기자고. 형. 형은 혹시 모르니까 망 좀 봐주세요.”
“Ok. 그러고 있을게. 다 끝나면 불러.”
어제와는 다른 안현의 모습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석궁을 왼팔에 장착한 후 나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
미묘하긴 하지만 안현은 확실하게 변했다. 오늘 아침에 혼자서 순찰을 돌고 온 것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어제 나와 나눈 몇 마디로 바로 내면의 심경을 완벽하게 변하게 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태도라도 바꾼걸 보니 내 말을 들어 일단 할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당연히 긍정적인 변화였기에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안현의 말대로 떠나려면 지금 떠나는 게 가장 좋았다. 괜히 이리저리 뻗대고 늑장 부리다가 오후에 출발해서 밤에 헤매는 건 절대로 피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아침에 출발해서 오후 즈음에 쉴 곳을 마련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아래층에서는 뭔가 상당히 분주한 기척이 잡히는 게 아무래도 있는 건 최대한 가져갈 생각인가보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나는 머리가 개운해지는걸 느꼈다. 아마도 박동걸이나 이보림, 이신우 같은 애들만 있었으면 남겠다고 지랄했을 텐데 생각보다 일이 상당히 잘 풀린 편 이었다. 이래서 수준이 높은 사용자들이 모인 게 편하다는 거다. 잠시 박동걸 일행을 위해 묵념.
물리적으로 통과 의례 최고 난이도로 꼽히는 숲 내부와 외곽에서 살아 돌아왔고 심리적으로 함정이 있는 트랩 포인트도 격파했다. 이제 랜덤 확률로도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보스 몬스터나 다른 생존자들만 조심한다면 중앙 게이트로 가는 길은 오히려 쉬운 편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 출현하는 다른 괴물들이….
“저기….”
중앙으로 갈수록 출현하는 다른 괴물 생각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에 몸을 돌아보니 김한별이 서 있었다. 등에 작은 가방을 하나 맨 게 준비가 거의 끝난 것 같았다.
“네. 준비는 다 끝났나요?”
“저는 다 끝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그럼 조금 더 망을 봐야겠네요.”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얘기를 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그녀는 약간 내 눈치를 살피는 얼굴로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과연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증이 일었다. 김한별은 그녀 답지 않게 한동안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유정이 언니나 안현 오빠한테 뭐 들은 거 있으세요?”
“한별씨랑 유정이랑 싸운 거요?”
“그것도 있고…. 뭐 다른 거라도요.”
특별히 김한별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실은….”
이어지는 그녀의 얘기는 별것도 아니었다. 이유정이 나가자고 했을 때 그녀가 반대했다는 게 전부였다. 솔직히 마지막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말했을 때는 조금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그녀의 본심이 아닌걸 알고 있기에 나는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 와서 섭섭하다고 해봐야 나만 속 좁은 놈 되고 그냥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홀 플레인 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라서 별로 화나는 일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그때는 그냥 너무 화가 나 있는 상태였거든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불쾌하셨을지….”
언제나 고요한 그녀의 목소리가 풀이 죽은 건 처음 본다. 이유정이랑 관계는 아직 소원한 것 같지만 그건 내가 건드리기 좀 힘들었다. 나는 살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불쾌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하신 것 같네요.”
“…….”
“정말이에요.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내리신 거죠. 그때 그대로 나갔다면 한별씨 말대로 저를 찾기는커녕 유정이나 현이마저 100% 당했을 텐데요. 별로 사과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유정이가 너무 다혈질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한별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음에도 그러면 똑같이 해주세요.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고마워요.”
말을 마쳤을 때,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처음으로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살짝 웃어서 찰나간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확실하게 아름다웠다.
문득…. 홀 플레인의 ‘그녀’가 뇌리를 스쳤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