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52
00251 부수입 =========================================================================
드드드드…. 드드드드….
미세한 진동이 대지를 울린다. 여러 발걸음 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여있었지만, 잘 분석해보면 그 소리는 일정한 주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풀빛 대지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그러자 끝자락에 걸린 기척이 둥글게 펼쳐놓은 감지 중앙 부근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강하다. 네발을 가졌다. 몹시 흥분한 상태다.’
마력 감지가 전달해주는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속속히 들어온다. 그리고 기척이 절반을 넘어 오고 있을 즈음, 나는 비로소 바닥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사용자 고연주. 혹시 통곡의 평야에 출현하는 네발 달린 괴물을 알고 있습니까.”
“네? 그런 것까지는 일일이 기억 못한다고요. 그런데 이제는 통곡하는 소녀를 제외하고 거의 출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왜요?”
“동북쪽 전방에서 괴물의 출현을 감지했습니다. 정체는 아무래도 뤼노케로스 같고, 수는 여덟 마리 정도 됩니다.”
“뤼노케로스요? 그 괴물이 왜 통곡의 평야에…. 분명 평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지역에 서식하는 녀석들인데….”
고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침묵은 한순간이었다. 안현이 먼저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을 시작으로, 클랜원들 모두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정은 빠른 걸음으로 안솔의 옆으로 붙었고, 스쿠렙프와 카타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오빠. 뤼노케로스가 어떤 괴물이야?”
“응? 모니카에 있을 때 상대 안 해봤어?”
“네.”
“…글쎄. 쉽게 말하면 코뿔소라고 하면 되려나.”
최대한 정확한 비유를 들어 말해주었지만 이유정은 상상이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사선 방향을 가리켰다.
“안력을 높이고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있어봐.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나을 거다. 아, 그래도 다들 전투 준비는 해야지?”
내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클랜원들이 신속하게 진형을 꾸리기 시작했다.
원정 중 전투가 발생할 시 머셔너리의 기본 전술은 무조건 방진을 채택한다. 나는 선두에 서 칠흑의 창을 다잡고 있는 안현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선두에 멈춰 안현과 같이 서는 게 아니라, 그대로 지나쳐 중앙으로 이동했다. 안현은 심호흡을 하다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안솔과 백한결의 오른쪽을 막아 섰다. 그러자 뒤에서 고연주의 새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머. 키퍼는 저 아니었나요?”
“왼쪽 옆구리가 비었습니다. 고연주는 그 부분을 커버 쳐주시면 됩니다.”
“흐~응. 그럼 앞은요?”
“메인 탱커는 안현입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클랜원들, 특히 애들이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메인 탱커를 안현으로 확정한 순간 내가 선두에서 물러난 이유를 다들 조금이나마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뜸을 들이다가, 곧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뤼노케로스가 전방 250미터 내로 진입했습니다. 동북쪽 53도 방향으로 접근 중입니다.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근으로 올 경우 100% 우리를 향해 달려들 겁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250미터라면 안력을 돋우면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까부터 대지를 울리던 진동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걸 느꼈다. 수초가 흐르고 클랜원들 사이로 한 명 한 명 침을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다.
내가 짚어준 방향에는 자욱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흙먼지는 거리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커지더니, 곧 흙먼지 사이를 뚫고 웅장한 체구를 지닌 뤼노케로스들이 뛰쳐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꾸어어어어어어엉!”
“꾸어어어어어어엉!”
역시나 근방으로 오자 우리를 발견했는지, 뤼노케로스들은 거친 괴성을 내지르며 살짝 꺾어 달려오고 있었다.
몸의 길이는 약 3미터, 몸무게는 1.5톤 정도 될까. 척 봐도 단단해 보이는 각질로 덮인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피부위로 솟아있는, 주둥이 위로 솟아오른 누런 뿔이 위협적으로 흔들린다. 안솔의 키와 비슷한 어깨높이를 가진 놈들은, 네발로 사정없이 대지를 두드리며 우리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데?’
안력을 돋워 놈들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나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눈알이 비정상적으로 굉장히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물론 괴물이 흥분을 하면 눈동자 색깔이 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게 마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중 다시 한번 놈들의 괴성이 귓속을 찌르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오늘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지만 일단 당면한 일을 해결해야 생각할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몰라 일월신검을 허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칼은 뽑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보석만 꼼지락거리는 김한별을 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김한별. 뭐해?”
“네?”
“저 돌진력을 그대로 받을 생각이야?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고.”
“아. 네! ───. ───. ───.”
‘그럼 어디 한번 볼까….’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내 불호령에 비단 김한별뿐만이 아니라, 애들도 각자의 자세를 잡는 게 보였다. 나는 검초(劍鞘)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너희들 예전에 칠흑의 숲에서, 칠흑의 전갈을 처음 잡았을 때를 기억해봐.”
쿵쿵쿵쿵! 쿵쿵쿵쿵!
“참고로 말하자면 집단전이라면 몰라도, 개인으로 따지면 칠흑의 전갈이 뤼노케로스보다 강하다.”
“───. ───. ───. Radiant(찬란하게 빛나는). Hugging dawn(포옹하는 새벽의 여명).”
내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김한별의 주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녀의 왼손이 허공으로 치솟고, 그 위에 놓여있던 수정이 두둥실 떠올랐다.
확!
허공으로 떠오른, 엄지 손가락만한 보석은 주문 그대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이 너무도 밝아 새벽의 어스름함마저 물리칠 즈음, 김한별은 시위를 당기는듯한 움직임으로 오른팔을 당겼다. 그리고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마법을 발현시켰다.
“Driving hit(몰아쳐라)!”
촤촤촤촤!
그것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내는 하나의 파도였다. 그녀가 손을 쫙 피자마자 보석이 산산이 바스러지며 전방을 뒤덮는 빛의 파도들이 뤼노케로스를 덮쳐 들었다. 이윽고 파도처럼 밀려들어간 빛깔은 놈들의 전신을 뒤덮더니, 번쩍 폭발을 일으켰다.
“““꾸어어어어어어엉!”””
빛은 너무도 강렬해, 선두에 선 안현이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방금 전 한별의 마법은 하연처럼 치밀하게 마법을 배합하고 연쇄 폭발을 노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단 한번의 단발성 마법에 불과했지만, 곧이어 드러난 보석 마법사의 위력은 클랜원들은 잠시나마 술렁이게 만들었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뤼노케로스들 중 선두에 있던 세 마리는 하나도 예외 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단단하던 각질은 발기발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쓰러진 놈들 중 한 마리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대지를 기었지만, 약간이나마 들리던 몸은 다리를 절룩임으로써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남아있는 다섯 마리 또한 돌진을 멈춘 상태였다.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진 걸로 보아 폭발의 여파로 인해 강제적으로 퉁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곧 다리를 꼿꼿이 세우는걸 보니, 그나마 뒤쪽에 있어 선두에 있던 놈들보다는 피해를 덜 받은 것 같았다.
“꾸우우웅! 꾸우우웅!”
일어난 뤼노케로스들은 곧바로 다시금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 폭발이면 크게 놀라 정신적 후유증으로 비틀거려야 정상인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마치 어떻게든 우리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흡사 미친 전사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놈들의 돌진력을 죽였고 3마리의 상태를 아예 불능에 가깝게 빠트렸으니 김한별은 제 몫을 해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근접 계열들의 차례였다. 앞으로 원정에 있어서 전투 중 오더를 최소한으로 내릴 계획이었다. 해서, 이번 전투로 과연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곧이어 폭발 속에서 달려온 다섯 마리가, 드디어 방진의 근거리에 접근한 순간이었다.
“보호(Protect)!”
미리 주문을 외워뒀는지 안솔의 귀여운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앞으로 뻗자, 안현의 앞으로 둥그렇고 투명한 막이 생성되는걸 볼 수 있었다. 그곳으로 뤼노케로스 세 마리가 거세게 뿔을 부닥쳤지만,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있는 놈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술사격!”
‘오. 창술사격?’
차차창! 소리와 함께 칠흑의 창이 몇 갈래로 갈라지는가 싶더니, 기다란 창신이 각각 놈들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고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마도 기공창술사의 능력 중 하나로 보였는데 아직 성취도가 낮아 제 힘을 끌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구슬픈 비명이 울렸지만, 안현에게 몰린 건 세 마리였다. 좌우로 외곽에 있던 뤼노케로스 두 마리는 각기 양쪽으로 파고들더니 이내 중앙을 노리고 짓쳐 들어왔다.
“가만히.”
고연주는 곧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나는 일월신검으로 그녀의 배를 지그시 눌렀다. 고연주는 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오른편으로 달려드는 놈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나는 유정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몸을 살짝 뺐고 동시에 오른발을 쭉 내밀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뿔이 내 복부를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밀었던 발등으로 뭔가 묵직한 것이 걸렸다고 느낀 순간, 나는 곧바로 전해져 들어오는 힘을 되돌려 있는 힘껏 위로 걷어 올렸다.
퍽! 훙.
뭔가 허공으로 비산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위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게 보였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일월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유정이 치고는 드물게, 그녀는 굉장히 집중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정이 양 손으로 쥐고 있는 스쿠렙프 그리고 카타나에는, 순도 높은 마력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날카로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유정과 뤼노케로스의 간격이 리치가 닿을 정도로 짧게 줄어들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한 마리의 뤼노케로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급격히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더니 앞쪽을 향해 발을 가져다 대며 양 손에 든 단검을 힘껏 옆구리에 쑤셔 박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가 단검을 잡은 상태로 대지를 살짝 뛰어오르자, 아래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뻗어 나와 유정의 양 발을 움켜잡았다.
“이거 쟤랑 나랑 연습한 거예요. 그러니 뭐라고 하면 미워요.”
고연주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구시렁거렸고, 그림자를 향해 살짝 손가락질을 했다.
“꾸어어어어어어엉!”
들어올려진 유정의 허리가 반원으로 휘는가 싶더니 마치 물구나무를 서는 모양으로 뤼노케로스의 등을 따라 올라갔다가, 반대쪽으로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놈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었음에도, 유정은 오히려 단검을 꽉 쥐며 악착같이 긁어 내렸다.
뤼노케로스가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5초였다. 고연주의 역할이 크긴 했지만 흡사 하나의 곡예를 본 기분이었다. 이유정은 원숭이처럼 땅에 쭈그려 앉는 자세로 착지하고는, 쉬지 않고 곧바로 안현의 측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인 후 준비해두고 있던 일월신검을 빼어 오른쪽으로 뻗었다. 벗어났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검 날을 위쪽으로 세우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속박(Shackles)!”
처음 걸렸던 보호막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솔과 김한별의 적절한 지원사격이 이어지고, 어느새 한 마리를 쓰러뜨렸는지 안현은 창을 신명 나게 휘두르며 두 마리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뜨뜨뜨뜨뜨뜨뜨뜩!
곧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른팔을 타고 들어오던, 육질을 가르는 느낌이 사라지자 나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반으로 갈린 뤼노케로스 한 마리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누런 번개가 지그재그로 뻗어가며 뤼노케로스의 눈을 정통으로 때렸다. 놈이 목을 크게 뒤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안현은 지체 없이 창을 목으로 찔러 넣었다. 이윽고 찔러 넣은 창을 한번 크게 휘젓고 뽑아내자 뤼노케로스는 그대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오호호호! 아하하하!”
그리고 그 옆으로. 속박에 걸린 마지막 한 마리를, 즐겁게 난도질하는 유정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네, 이로써 부수입 분야가 끝났습니다. 다음 분야의 소제목은 망상의 고원입니다. 왜 소제목이 부수입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건 돌아가면서 챙길 예정이거든요. 🙂 원래는 부수입의 징조라고 적고 싶었는데, 뭔가 말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눈치 빠르신 분들은 벌써 알고 계실지도….) 아. 시험은 내일부터 시작입니다. 한 주 동안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PS. 독자님들. 자꾸 놀리시면 곤란합니다. 계속 이렇게 놀리신다면, 저 또한 생각이 있습니다. 네. 삐뚤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일명 삐뚤유진이라고도 하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