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53
00252 망상의 고원 =========================================================================
“정지.”
행군의 선두에 있던 김수현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리자, 옆에서 걷던 안현은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김수현은 잠시 동안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 승냥이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수는…. 좀 많군요. 서른여덟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빨에 독이 묻어있으니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목소리였지만 안현은 목구멍으로 절로 침이 넘어감을 느꼈다. 독 승냥이라면 모니카에서 한두 번 상대해본 적이 있는 괴물이었다. 승냥이답게 교활하고 영민한 움직임은 물론이요, 일반 말승냥이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괴물이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실수로 둘러싸여 여러 번 물린 결과 거의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때의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자, 안현은 몸 내부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앞쪽으로 무성히 우거져있던 수풀이 조금씩 들썩들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현은 살짝 허리를 굽히고 몸 안의 회로를 따라 마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온다.”
김수현은 한마디 툭 내뱉고 곧장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수풀을 헤치고 나온, 강건한 신체를 가진 승냥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첫 번째로 나온 놈을 시작으로 뒤를 따르던 놈들이 우후죽순처럼 수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아홉 마리를 넘어갔을 무렵 안현은 세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열 마리 남짓에 불과했지만 이윽고 사방에서 비슷한 수의 늑대들이 나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완벽한 포위 진형이었다.
놈들은 처음에는 눈치만보며 섣불리 달려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뭇한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번들거리는 걸로 보아 호시탐탐 틈만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 ───. ───. 차가움을 머금은 꽃잎은, 새벽 폭풍 아래 부서진 섬광이 되어.”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수현이 정지를 말했을 때부터 주문을 준비했는지 김한별의 고요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러자 말간 빛을 내뿜는 보석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위로 천천히 떠오르더니, 클랜원들의 주위서 미약한 돌풍이 감돌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퍼져라!”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사늘한 시선으로 독 승냥이들을 훑었고, 날카롭게 외쳤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이어진 탐색전을 깨뜨리고,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캐캥! 캐캥!”
“캐캥! 캐캥!”
군청색을 띠고 있던 보석은 곧 알갱이로 화하며 주변을 맴도는 돌풍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리고 시동 어를 외친 것을 기점으로, 돌풍은 원반처럼 납작해지더니 원형으로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안현은 독 승냥이들을 노리고 들어가는 마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구에 마력을 돋우자 돌풍 바깥쪽으로 수없이 점멸하는, 번쩍이는 칼날 모양을 이룬 마력의 집합체를 볼 수 있었다. 흡사 톱니바퀴를 보는듯했다.
속으로 환호하려는 찰나, 이어진 독 승냥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안현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놈들은 돌풍 안에 담긴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꼈는지 재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풍이 닿을 즈음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승냥이들 몇몇은 위쪽으로 크게 솟구쳐 오르며 회피 동작을 보였다.
썩둑! 썩둑! 썩둑! 썩둑!
“깨갱! 깨갱!”
“깨갱! 깨갱!”
칼날을 품은 돌풍이 애꿎은 수풀과 나무를 베고 지나가고, 그 사이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승냥이들의 비명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김한별은 애초에 독 승냥이 전부를 노리는 범위 마법을 펼쳤지만, 승냥이들의 발 빠른 대응으로 생각한 만큼의 효과는 보지 못했다.
어찌됐든 상황은 처음보다는 나아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 거진 마흔에 가까웠던 독 승냥이들은 삼분지 일은 줄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놈들은 스물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캐애애앵!”
마법에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동료가 당해서 그런지 몰라도, 독 승냥이들은 곧바로 찢어질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몰려들었다. 안현은 자신을 향해 2미터가 넘게 훌쩍 뛰어오르는 승냥이 세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창을 들어 조준하고, 준비하고 있던 잠재 능력을 발동했다.
“창술사격!”
차창! 차차창!
순식간에 칠흑의 창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그것은 허공으로 비산한 승냥이의 복부에 정확히 꽂혀 들었다. 이내 배가 푹 들어간 상태로 대지로 힘없이 떨어지는 놈들을 보며 안현은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전방에는, 또 다른 승냥이 세 마리가 이빨에 누런 침을 뚝뚝 떨구며 위협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안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특수 능력 창술의 달인을 발동하자 칠흑의 창에 짜르르 마력이 흘러 들었다. 딱딱해 마지않던 창신이 엿가락처럼 말랑해지고, 한쪽을 당기자 시위를 잔뜩 당긴 활처럼 구부러졌다. 그리고 놈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순간, 안현은 당기고 있던 창 쪽을 강하게 퉁겼다.
뻑!
“깨갱! 깨갱!”
튕겨 들어간 창은, 동시에 달려들던 세 마리를 한꺼번에 후려갈겨버렸다. 승냥이들은 각기 피 분수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단 두 번의 공방으로 여섯 마리를 해치운 안현이었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으며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예전에도 초반에 조금 활약했다고 무작정 돌격했다가, 곧바로 둘러싸여 온몸을 깨물렸다. 다행히 입고 있던 장비들 덕택으로 깊게 물린 상처는 없었지만, 하다못해 이음새 부분이나 다른 노출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렸다면 결과는 암담했을 것이다.
잠깐 앞이 비자, 안현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왼쪽에는 이유정이 혼자서 대여섯 마리를 맞아 분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는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어 있었는데, 안현보다 상대적으로 장갑이 약한걸 감안해 안솔이 걸어준 보호막이었다.
유정은 쉴 새 없이 단검을 놀리며 한 마리씩 착실히 줄여나가고 있었지만, 승냥이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고연주는 오른쪽으로 오는 승냥이들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었고 김수현은 키퍼와 후방을 막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우, 후방이 틀어 막히자 결국 승냥이들이 선택한 곳은 가장 약한 좌 방향이었다. 안솔이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속박으로 지원해주고 있었지만, 처음 걸렸던 보호막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결국 안솔이 속박 주문을 멈추고 보호막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굼뜬 행동을 보이던 승냥이들이 다시금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창술사격으로 도움을 주려고 자세를 잡으려는 찰나, 안현은 막 유정을 향해 지원 마법을 준비하던 한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안현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뒤에요!”
“응?”
“체인 라이트닝!”
“뭐, 뭐야?”
짜작! 짜자작!
김한별은 준비하던 마법의 방향을 돌리고 안현에게로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안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뒤편에서 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훤히 드러난 목을 덮쳐 들었다. 이윽고 그의 목을 씹으려는 순간 한줄기 노란 번개가 주둥이 안으로 곧바로 쳐 들어갔다.
“끄르르르륵!”
독 승냥이는 그 자리에서 몸을 까뒤집으며 바르르 떨었고, 안현은 뒤늦게 창을 갈겼다. 그러나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진 놈의 입에서는 이미 시커먼 연기 몇 줄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안현이 십년감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쉴 즈음, 오른쪽과 후미는 상당히 안정적인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김수현과 고연주는 각자가 맡은 지점을 거의 다 정리해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꺄아악!”
가장 많은 승냥이들이 몰려있는, 왼쪽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유정은 점점 늘어만 가던 승냥이들을 감당치 못해 슬슬 물러나고 있었지만, 이내 뒤에 안솔과 백한결이 기척이 느껴지자 뒷걸음질을 멈췄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중앙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억지로 버티면서 다시금 거리를 확보하려 하다가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근근이 버티던 보호막이 깨지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승냥이 열 마리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 주문을 완성한 안솔이 재빨리 보호막을 걸었지만, 결국 한 마리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데 성공해 이유정의 허벅지에 어금니를 박아버린 것이다.
이유정이 무너지는 순간 왼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승냥이들의 울음소리와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외치는 비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려는 찰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키퍼와 후미에 열중하던 김수현은, 이유정의 비명이 들리는 순간 곧바로 몸을 돌려 왼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유정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은 승냥이를 가볍게 베어 떼어내고는 곧바로 주변을 향해 일월신검의 칼끝을 돌렸다.
섬뜩한 빛을 내뿜는 일원신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독 승냥이 한 마리가 여지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자신을 향해 사 방향으로 달려드는 승냥이 떼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하나씩 찔러 넣었다.
분명 뛰어오른 것은 놈들이 먼저였다. 하지만 각자의 공격들이 김수현에게 채 닿기도 전에, 한 마리씩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독 승냥이 한 마리를 더 물리친 안현은, 멍한 눈길로 김수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수현의 움직임은 고요했지만, 주변은 절대로 고요하지 않았다. 마치 폭풍과 맞닥뜨린 것처럼 승냥이들은 추풍낙엽같이 쓸려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발 아래 깔려 신음하는, 남은 한 마리를 향해 칼을 내리 꼽는 것을 마지막으로 독 승냥이들과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
“야, 고개 안 돌려?”
“아오. 걱정돼서 와봤더니만. 안 본다 안 봐. 네 허벅지 살 봐서 뭐가 좋다고.”
안현은 바지를 벗은 유정이 있는 곳을 향해 슬쩍 고개를 들이밀다가, 그녀에게 한 소리 먹고는 몸을 돌렸다. 이내 투덜거리며 바닥에 놓인 승냥이를 치우는걸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셨어요?”
“네?”
“이번 전투요. 마음에 안 드세요?”
“음. 뭐, 숫자가 많았으니까요. 괜찮습니다.”
나는 고연주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 전투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다시금 고연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쳐다봐주네. 말해봐요. 혼자서만 고민하지 말고.”
“혹시 방금 전 전투에서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유정이 부상은 의외였죠. 어느 정도 피해만 입으면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놈들인데 이상하게 악착같이 달려들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유정이에게 몰린 거야 놈들의 습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도망가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죠.”
나는 말을 마치고 잠시 동안 상념에 잠겼다. 탐험은 어느새 8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8일동안 우리들은 통곡의 평야를 벗어난 후 칼 바람의 습곡을 거쳐왔고, 현재는 망상의 고원을 앞둔 우거진 삼림의 중간에 있었다.
‘전투가…. 방금 전까지 합하면 열한 번째였나?’
우거진 삼림에서 괴물을 만나는 것은 딱히 이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열한 번의 전투 대부분이 비교적 안정화가 잘된 지역인 통곡의 평야와 칼 바람의 습곡에서 치렀다는 점은 확실히 의문을 가질만했다.
물론 모든 변수를 포함해야 하는 홀 플레인 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괴물의 이동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뤼노케로스부터 시작된 괴물들의 이상 행동은, 여러 가지로 열어놨던 생각의 방향 중 한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전투가 끝난 주변은 조용했다. 안솔은 유정이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백한결은 얼어붙은 얼굴로 열심히 전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안현으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혼자서 외로이 땅만 긁다가, 이내 김한별을 발견하고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아 김한별. 아까는 고마웠다. 너 덕분에 살았어.”
“아니에요.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근데 그거 말이야. 아, 체인 라이트닝. 원래 유정이 지원해줄 마법이었지?”
“…네.”
“씨발. 그럼 결국 내 잘못도 있다는 거네.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고연주를 제외한 클랜원들의 신경은 각각이 분산되어있었다. 안현이 자학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나는 한껏 소리를 죽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용자 고연주.”
“네.”
“제 생각인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
아직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연주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또한 약간이나마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음은, 으로써 단서를 잡지 못한 데서 오는 애매함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 몰이에 당한 것 같습니다. 아니,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이지 말입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던 대로, 일반 도시부터는 원정이나 주변 사용자들의 수준이 많이 올라갔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유적에 들어가면 예전 비비앙이나 호렌스처럼 갖고 노는 일은 웬만하면 적어질 것 같지 말입니다. 뭐, 그만큼 보상은 짱짱해지겠지만 말입니다.
PS. 제 말투가 무척 여성스럽다고 해서, 말투 바꿨지 말입니다. 앞으로는 최대한 제 거친 모습과 야성미를 보여드리겠지 말입니다. 자꾸 놀리시면,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김수현 + 안현 or 김수현 + 신상용 or 김수현 + 백한결 or 김수현 + 도영록 or 김수현 + 박동걸 베드신 써버리지 말입니다. 흥이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