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6
00026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
통과의례에 출현하는 괴물들 중 원숭이와 상당히 닮은 망키라는 놈이 있다. 데드맨과 다르게 일단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는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온 몸에 부드러운 털이 복슬복슬 나 있어 방어력은 전무하지만, 행동이 매우 교활하고 최소 네 명에서 다섯 명은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 사용자가 혼자 상대하기는 껄끄러운 편에 속하는 괴물이었다.
“우끼! 우끼끼!”
그리고 현재, 우리는 사람 크기만한 원숭이 다섯 마리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육중한 몸과 기다란 꼬리를 가진 망키는 가진바 힘은 제법 강력해도 몸이 둔한 괴물이다. 물론 급작스럽게 높이 점프해 내려찍는 경우는 있는데 그럴 때는 낙하지점을 예측해 피하면 별 다른 위험은 없었다.
“우끼끼! 우끼끼!”
“조심해!”
안현과 김한별은 현재 망키 세 마리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한 마리를 견제하고 있었고 이유정이 나머지 한 마리를 맡고 있으니 수적으로는 불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수적으로만 말이다.
그때였다. 한창 서로 치고 받던 도중 안현과 싸우던 망키들 중 한 마리가 뒤로 슬쩍 빠지더니 몸을 웅크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방향을 보아하니 아마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정상적이라면 지금 당장 위태위태한 이유정을 노리는 게 정상이지만 놈들의 성격상 여성을 노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워낙 성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번식 활동에 강한 집착을 가진 놈들이라 암컷 개체들만 보면 발정하는 놈들 이었다. 특히 요정이나(개인적으로 망키들이 요정들을 잡는걸 요원하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인간 여성들을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환장하는 놈들이라 남자들을 다 처리하고 여자들만 잡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형! 유정아! 조심해!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 같아!”
안현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 없이 세 마리를 상대 하다가 한 마리가 줄어들자 조금 사정이 나아진 모양이다. 아직 초보면서, 목숨이 오고 가는 전투 중에 한눈을 팔다니. 안현의 말을 들은 순간 이유정의 자세가 더욱 방어적으로 변했다. 한 마리로도 버거운데 두 마리를 상대한다고 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든 모양 이었다. 이윽고 몸을 웅크린 망키가 괴성을 지르며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노린 순간이었다.
핑!
나는 지체 않고 시위를 당겼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며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망키의 머리를 꿰뚫었다. 허공에 떠올라 낙하하는 힘을 이용하는 건 좋아도 본인이 움직이지 못하는 건 생각 못했나 보다. 아니면 맞출 리 없다고 생각 했거나. 내가 지금 애들 연습 시키느라 설렁설렁 하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어휴. 내가 말해서 뭘 하냐.’
“오빠! 옆에 조심해요!”
알고 있단다. 허공에 떠오른 놈을 노리는 사이 내 옆으로 돌진한 망키는 나를 짓누르려는 듯 손바닥을 찍었다. 나는 보지도 않은 채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한 후 오른손에 쥐고 있던 화살로 망키의 머리를 찍었다. 깔끔한 카운터 공격. 손에 쥔 화살의 끝에서 부드러운 육질을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져 들어온다.
“끼에에에….”
쿵!
구슬픈 소리를 내며 몸을 허물어뜨리는 망키와, 동시에 마침 허공에 떠올랐던 망키의 시체도 똑같이 땅에 떨어졌다. 단 3초 만에 두 마리를 처치한 셈이다. 얼른 화살을 재고 다시 전황을 살피니 다들 비슷비슷하게 싸우는 것 같았다.
안현은 처음처럼 장검과 방패를 활용하며 싸우고 있었고, 김한별은 장검보다 약간 얇지만 길이는 긴 장검을 어설프게나마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끝 부분이 뾰족하게 깎인 중 단검 두 개를 들고 날뛰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안현이 전방에서 검과 방패로 둘을 견제하다가 틈이 생기면 김한별이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유효타가 나오면 안현과 김한별 둘이 순식간에 합공을 하는 방식. 전투는 어설프긴 해도 나름대로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반면에 이유정은 리치에서 밀려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 것 같았다. 아주 가끔 망키의 팔에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연신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애꿎은 단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하기야 무기를 잡은 지 이제 3, 4일 밖에 되지 않은 애들인데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수준 높은 사용자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통과의례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이유정이 상대하는 망키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아주 죽이진 않고 저번처럼 틈만 만들어줄 생각 이었다.
핑!
“끼에에에!”
화살이 날아가고, 망키의 오른쪽 가슴에 박힌다. 데드맨처럼 고통을 못 느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망키는 몸을 비틀거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이유정이 아니었다. 망키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보자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민첩하게 몸을 숙여 아래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기본 민첩 능력치 50포인트의 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었다.
“죽어라! 씨발 강간 원숭이 새끼!”
걸쭉한 욕설을 뱉으며 이유정은 평생의 원수라도 만난 듯 힘차게 단검을 교차시켰다. 그와 동시에 옆쪽에서도 안현의 기합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결정타를 먹인 듯싶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사초, 오 초. 오 초 까지 센 후 일행이 상대하던 망키들을 바라보자 다들 처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유정이 상대하던 망키는 가슴에 X자가 크게 베인 상태였고 안현과 김한별이 상대하던 망키는 각각 큰 상처 하나와 몸에 잔상을 많이 입은 편 이었다. 초반부터 작은 상처를 착실하게 입히더니 이내 체력이 떨어진 망키들을 상태로 일격을 먹인 것 같았다. 아, 이게 바로 키우는 보람이라는 건가.
세 명은 내가 진즉 해치운 망키 두 마리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게 어지간히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하긴 매일 한 마리씩만 상대하다가 갑자기 다섯 마리와 상대했으니 평소보다 힘들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 쌍. 원숭이 피 뒤집어 썼네. 기분 졸라 더러워.”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피를 뿌려낸 이유정은 땅에 침을 탁 뱉었다. 온 몸에 피를 칠하고 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는 마치 전장의 여신처럼 강인하고, 또 아름다운 모습 이었다. 안현과 김한별의 처지도 딱히 낫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옷은 헤지고 온 몸에는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보였다. 그나마 상태가 낫다고 하면 나와 안솔이랄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도시를 떠난 지도 어느새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즉 우리들은 첫날 포함 4일 동안 살아있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5일차였다. 아마 오늘만 이 속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이르면 6일차에, 적어도 7일차에는 워프 게이트로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일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의 생활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스펙터클 했다면 스펙터클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걷고, 싸우고, 쉬고, 걷고, 싸우고, 쉬는걸 반복했다. 도시를 떠난 후 처음 맞닥뜨린 괴물인 만드라고라와의 전투에서 우리는 자칫하면 안솔을 잃을뻔했다. 갑자기 땅바닥에서 툭 튀어나와 입을 벌린 상태로 집어 삼키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라 자빠진 것이다.
대책 없이 뛰어든 안현도 식물의 가시에 찔려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미리 감지하고 있던 내가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김한별과 이유정은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것 같다. 겨우 도달한 세이브 포인트에 비치된 무기를 집더니 앞으로 자기들도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안현은 여자애들이 싸우는데 난색을 표했지만 둘의 의지는 확고했다.
물론 안현과 나에게만 전투를 맡기는 게 불안했던지 아니면 정말로 돕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난 둘의 눈동자에서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엿볼 수 있었다. 어차피 슬슬 둘도 연습시킬 필요는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이후, 우리는 세이브 포인트를 떠나 숲을 지나가면서 한 명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망키들이 출몰하는 장소 초입에서 발견했는데, 바로 여성 사용자였다. 얼굴은 제법 예쁘장했지만 아쉽게도 이미 우리가 발견한 당시 시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몸에 걸친 옷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찢어져 있고 온 몸은 벌건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음부에서는 아직도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아무래도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망키들한테 당하고 있었던 모양 이었다. 입에 흐르는 핏줄 한줄기를 보니 당하는 도중 견디다 못해 자결한 것 같았다.
이유정은 그 광경을 보며 발광했고 당장에 원숭이 새끼들을 조지자며 광분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몰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성기를 벌겋게 드러내고 있는 망키 다섯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대로 전투에 돌입했다. 솔직히 애초에 이유정이 지른 고성방가에 망키들 또한 우리한테 접근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아마도 실컷 즐기다가 암컷이 죽어버렸는데 새로운 암컷 냄새를 맡았으니 흥분한 상태인 놈들이 그냥 지나갈 리 만무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들의 승리였다. 한 걸음씩 차분히 나아가자고 생각하며, 나는 상념에서 일어났다.
“솔아. 언니 수건 하나랑 물 한별만.”
“뭐라고요?”
이유정의 말 실수에 김한별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아아, 쏘리. 힘들어서 말이 잘못 나왔어. 한별이 아니라 한 병만.”
“까르르…. 네에…. 언니 고생 하셨어요.”
“고생은 개뿔. 도대체 저 오빠는 뭔데 이 원숭이 새끼들을 쉽게 처리하는 거야? 그 석궁 나줘! 나도 석궁 쓸 거야!”
괜한 생떼를 부리는 이유정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억울하면 너도 강해지던가.
‘나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바닥을 박박 기면서 검을 휘둘렀단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 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들도 무기 좀 휘둘러 봤다고 느끼는 게 있는지, 내가 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김한별은 조신하게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안현은 헉헉 거리면서도 나에게 고정한 시선을 치울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형, 형은 어디 특수 부대라도 나온 거에요? 무슨 석궁을 그렇게 잘 쏴요?”
“…요즘 군대가면 다 배워.”
“아 오빠 뻥 좀 치지마. 사격이면 몰라도 누가 석궁을 배워?”
“서울도 안 가본 녀석이 이긴다고 하더니. 군대나 가보고 말해. 그냥 총만 들고 빵빵 쏘는 연습만 시키는 곳인 줄 알아? 총검술이랑 태권도를 비롯해 단검 활용 술, 표창, 활, 석궁도 기본 무술 소양에 들어간다고.”
내 말에 안현과 이유정 그리고 안솔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직 김한별만이 피식 웃는 게 내 말이 뻥이라는걸 눈치챈 것 같았다. 딱히 걱정스러운 건 없었다. 이미 확고하게 팀이 자리를 잡은 이상 이정도 드러내 보이는 건 허용 범위 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씨…. 몰라. 지금은 좀 쉴래. 괜히 머리만 아프고.”
“쉴 거면 앉거나 일어나서 쉬어. 그러다 습격 받으면 어쩔래.”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솔아. 미안한데 언니 초콜릿 하나만. 배고파.”
“솔아 오빠도 줘.”
“나도 하나 부탁해.”
“네에~. 지금 갖고 가요~.”
이유정, 안현, 김한별의 연이은 부탁에 안솔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안현의 강력한 요청으로 동생은 전투의 직접적인 참가는 제한하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모두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남을 돕는걸 좋아하는 성향인 듯 안솔도 큰 불만은 없어 보였기에, 이 정도 심부름은 납득하고 넘어갈 만 했다.
방실방실 웃으며 물병을 건네는 안솔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그리고 그게 생존이라는 욕구와 연관된다면 둘을 합한 시너지 효과는 그만큼 극대화된다. 나는 새삼 그 말이 맞는다고 느꼈다. 아무리 수준이 높은 사용자들이라고 해도 불과 며칠 전에 평범한 일상을 즐기던 여성들이 지금 괴물들을 향해 익숙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처음 괴물을 무찔렀을 때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였다는 감각에 한동안 떨던 나를 생각하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물론 걱정거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상대가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들이기 때문에 지금은 부담 없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상대가 같은 사람이라면? 그때도 지금처럼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 부분도 기회가 된다면 연습시켜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기회는 없었다.
“얘들아. 이제 슬슬 일어나자.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야 노란색 지붕이라도 발견하지. 형도 괜찮죠?”
“응.”
레스트 룸 말인가. 중앙 게이트로 갈수록 발견하기 어려울 텐데. 그러나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기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안현의 말에 이유정은 약간은 분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몸에 붙은 이물질을 털고 막 몸을 일으키는걸 보며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를 털려는 순간 이었다. 연습을 위해 마력 감지는 꺼둔 상태였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몇몇의 기척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 이놈들 뭐야.”
그 순간, 나를 비롯한 일행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네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2. 문단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