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60
00259 환각의 협곡,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
“돌덩이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래에 뭔가 깔렸다는 건 확실해요. 수현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꼴이네요. 까르르.”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일단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네요.”
고연주의 장난기 다분한 말투에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쏘아 보낸 파동인데 갈라진 돌덩이가 아래서 잘 쉬고 있던 괴물의 몸을 깔아버렸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 돌 벼락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애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 나는 시선을 김한별과 백한결에게로 고정시켰다.
“김한별, 백한결. 이제 슬슬 준비하자.”
“네. 알겠어요.”
“네, 네!”
“긴장하지 말고. 나머지는 한별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발현을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돼.”
차분히 대답하는 김한별과는 달리 백한결은 자못 긴장이 되는지 목 울대를 살짝 움직였다. 백한결은 가지고 있는 사용자 정보도 괜찮고 재능도 있는 편이다. 무엇보다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용자였다. 첫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군소리 않고 따라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딱 한가지 문제점을 꼽으라면….
‘이상하게 실전을 연습처럼 못한다는 말이지.’
“한결아. 지금 바로 시작하자. 다른 분들도 저희 주위로 모여주세요.”
“후우. 후우.”
김한별은 한 움큼 쥐었던 보석 중 몇 개를 골라내더니 백한결에게 되비침의 발현을 요청했다. 이윽고 나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주위로 모여들고 진형을 잡자, 백한결은 한두 번 심호흡을 함과 동시에 오른손을 앞쪽으로 들어올렸다.
번쩍!
들어올린 백한결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희뿌연 막을 보며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김한별의 고유 능력은 보석 증폭. 언뜻 보면 별로 대단치 않은 능력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 한정되는 게 아닌 타인의 마법도 증폭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급상승한다. 그리고 단순 증폭을 넘어서 실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다른 능력을 섞을 수도 있다고 하니, 김한별도 어떻게 보면 복덩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복덩이보다는 보석 먹는 하마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대상 지정 되비침(Glance Back). 사용 보석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김한별의 주문이 이어지자 주먹 쥔 그녀의 손가락 틈새 사이로 환한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살며시 피는 순간, 보석은 두둥실 떠오르더니 백한결의 오른손으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애주라이트 화이트가 그의 손에 부드럽게 안착한 순간, 김한별의 마지막 주문을 위해 입술을 열었다.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
우웅.
시작된 보석 증폭. 그것은 하나의 고요한 흐름과 같았다. 호기심이 일어 마력의 흐름을 읽어보자, 되비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보석은 내부의 마력을 한껏 폭발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우웅! 우우웅!
폭발된 마력은 백한결의 마력 파장에 무리 없이 섞여 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빛을 환하게 내뿜는 것과 함께 오른손에 한정되어있던 되비침이 서서히 넓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 이것 좀 신기한데?”
“흥~.”
“신통방통~.”
“…….”
‘신통방통? 신기방기가 아니라?’
안현, 이유정, 안솔은 한마디씩 소감을 내뱉었다. 지금껏 김한별이 하는 일에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녀석들이었지만 이번 광경은 꽤나 신선한 모양이었다. 다만 안솔의 마지막 말은 조금 웃겼던지 김한별은 미약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되비침은 조금씩, 천천히 범위를 넓혀갔다. 주위에 있는 안솔을 시작으로 이유정 고연주에게로 그 범위를 넓혀가더니 곧 가장 선두에 있는 나에게까지 둥그런 막이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되비침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클랜원들은 각자 기묘한 탄성을 내질렀다.
“어, 어? 뭐야 이거? 우와!”
“콜록! 콜록!”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까지 미미하게 내 전신을 짓누르던 필드의 중압감이 단번에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반응이 가장 격한 사용자는 안솔이었다. 필드 효과를 가장 강하게 받고 있어서 그런지, 몇 번 기침을 하고는 이내 휘둥그래진 눈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와. 아까까지만 해도 되게 지쳐있었는데 갑자기 활력이 샘솟는 기분인데.”
“그렇지? 나도 머리랑 몸이 가뿐해진 것 같아.”
지금껏 중압감에 시달리다가 한 순간에 벗어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둘의 입 또한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현과 이유정의 칭찬을 들은 백한결은 한결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김한별은 백한결의 손 주위로 떠오른 보석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보고했다.
“오빠. 완료했어요.”
“수고했다. 상태는 어때?”
“확실히 연습할 때보다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요. 유지 시간은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고요.”
“그래 알겠다. 그럼 일단 협곡을 내려가야 할 텐데….”
여울가녘 클랜원들은 그냥 바로 벽을 타고 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나나 고연주는 내려가는 게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현재 우리들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환각의 협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3중첩 필드 효과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성질의 것이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자, 누군가 옆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고연주가 오른쪽 방향의 허공으로 연신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현. 설마 이대로 내려 가시게요?”
“그건 힘들겠죠. 그랬다가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기껏 펼쳐놓은 되비침의 영역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런데 그 손가락은 뭐죠?”
“아무래도 1차 구조대는 이쪽 방향으로 간 것 같은데요? 흔적이 또 갈려있어요.”
“흠. 그렇기는 한데….”
나는 여태껏 여울가녘 클랜원들의 흔적을 중심으로 쫓아왔다. 그들이 환각의 협곡 내 유적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흔적만 따라가면 따로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지 않더라도 유적이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고연주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대신 흔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협곡 아래 지형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럼 이쪽 방향으로 가도록 하죠. 아마 걷다 보면 내려가는 길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현명하신 선택이에요.”
고연주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그에 맞춰 클랜원들이 다시 진형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되비침의 막 안에서 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김한별과 백한결을 생각하고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쩍 갈라져있는 협곡을 오른쪽에 끼고 다시금 행군을 시작했다. 햇빛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협곡 안을 메우고 있던 안개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유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긴장을 천천히 일깨웠다.
그렇게 나름의 준비를 하며 걷던 도중이었다. 문득 보석 증폭으로 잠깐 잊혀진, 내 돌 벼락을 맞은 생물체에 생각이 미치자 갑작스레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협곡 안에서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괴물이 있었나?’
*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요.”
“네. 아마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올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정말 까마득하네요. 이곳을 내려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위를 올려다보자 고연주의 말대로 까마득히 높이 서있는 협곡의 벽이 보인다. 흔적을 쫓아 출발한 이후 다행히 아래로 돌아 내려갈 수 있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 지형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다만 완만하다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직각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해서, 결국 원거리 계열 몇 명은 나와 고연주의 옆으로 붙어 내려가는 것으로 결정을 봤다. 까딱 잘못하면 아래로 구를 수 있는 경사를 갖고 있었으니까.
“씨이….”
“…칫.”
협곡 아래로 내려온 이후 안솔과 백한결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옆으로 붙은 인원은 안솔과 백한결이었는데(고연주의 옆으로는 김한별이 붙었다.), 내려오는 내내 내 몸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다퉜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다툼을 벌인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잡은 부위는 엄연히 내 신체의 일부였다. 그런 만큼 내 허리를 잡은 그네들의 손에서 암암리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딱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임마. 이제 유지를 좀 잘하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말도 못 걸 정도로 집중하더니, 여유가 생겼잖아?”
“아, 그, 그런가요?”
“응. 너 탐험 중에도 계속 연습했다며? 오빠한테 들었어. 열심히 하네~.”
“헤, 헤헤.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안현과 이유정의 칭찬을 받은 백한결이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둘은 그런 백한결이 귀여운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막 내부를 물들 무렵, 어디선가 싸늘한 한기가 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한기의 진원지에는 당연히 안솔이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만담을 들으며 열심히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전진하자, 곧 20미터 앞으로 돌덩이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눈에 들었다. 주변 지형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떨어뜨린 돌덩이들이 확실했다.
“찾았습니다.”
나는 한마디 툭 내뱉은 후 바삐 걸음을 놀리려다가, 다시 원래의 속도로 맞췄다. 내 말에 실컷 떠들던 클랜원들의 입에 삽시간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아까 위에 있을 때 나와 고연주의 대화를 들었으면, 돌 아래 뭔가가 있다는 사실은 눈치로 알고 있을 것이다.
차르르. 차르르.
우리들의 왼쪽으로는 폭 넓은 강물 사이로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물에 걸쳐있는 대지에는, 돌 아래로 하얀색 앞발 두 개가 내밀어져 있었다. 앞으로는 다리 두 개, 뒤로는 힘없이 살랑 이는 하얀 꼬리털 하나. 나는 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멍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얀 다리, 하얀 꼬리…. 설마?’
“형, 저게 뭐에요?”
“헤에, 꼬리가 살랑거려어…. 아직 살아 있나 봐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따라 막이 이동하고, 곧 돌이 되비침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다급히 앞쪽으로 걸어가 돌덩이를 잡았다. 그러자 조금씩이기는 해도 바르르 떨리는 진동이 손을 타고 전해져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돌을 위로 올려 집어 던지고, 그 아래에 있는 괴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첨벙!
“뀨….”
“어머!”
“헉.”
“어?”
돌이 강물에 빠짐과 동시에 아래에 깔려있던 괴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아니, 그것은 괴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크기는 자그마한 망아지 정도나 될까. 온 몸을 덮고 있는 하얀 털과 머리 위로 비죽 솟아오른 은은한 빛을 내뿜는 뿔. 그 정체는, 다름아닌 유니콘이었다. 그것도 다 자란 성인이 아닌 아가 유니콘.
“어머 어머! 말도 안 돼. 이거 유니콘 아니에요?”
“맞습니다. 안솔! 얼른 이쪽으로 와라!”
유니콘은 돌이 걷어지자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빗겨 맞아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몸과 다리가 심각히 보일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녀석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앞다리를 기어 내게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부, 불쌍해….”
“가방에 있는 치료 물약 서너 개 꺼내주고, 바로 치료 주문 들어가. 한두 번으로는 안될 터이니 내가 그만하라 할 때까지 계속 외우고.”
“뀨우….”
“그래. 도망가지 마. 옳지 착하다. 해치지 않아요. 지금 바로 치료해줄게.”
‘큰일 날뻔했네.’
나는 십년감수한 기분으로 안솔이 건네는 물약을 받아 들었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유니콘을 안아 들자, 녀석은 힘없이 몸부림치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 몸이 아픈 상태서 처음 보는 인간들이 무서운지, 구슬픈 울음 소리를 내며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이윽고 평평한 대지에 녀석을 눕힌 나는, 재빨리 치료 물약의 마개를 돌렸다.
*
너무 늦은 걸까 걱정이 들었지만, 빠른 조치가 유효했는지 천만다행으로 유니콘을 완치시킬 수 있었다. 그에 상급 치료 물약 네 개가 소비됐지만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뀨우, 뀨우!”
“호호. 얘 좀 봐. 애교 부리고 있어.”
“아잉, 간지러워. 하지마아….”
“아하하! 안솔 한 테 얼굴 비비는 것 좀 봐. 진짜 귀엽다, 귀여워.”
유니콘의 치료를 완치시킨 후, 나는 여기서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어차피 유적은 여기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들어가기 전에 한번 체력을 보충할 필요도 있으니, 애당초 이곳에서 대 휴식을 가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치료를 끝내고 팔팔해진 유니콘은 여성 사용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녀석도 우리가 자신을 치료해줬다는 걸 깨달았는지, 처음의 두려워하는 모습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것은 여성 사용자들에게만 한정된 말이었다. 유니콘은 습성상 남성보다는 여성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 중에서도 순위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처녀 여성, 비 처녀 여성 그리고 남성 순으로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남성 이후로는 거의 친해질 기회가 없다고 봐도 좋다.
안현은 처음 유니콘을 만지려고 하다가 퇴짜를 맞자 뿔이 났는지,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상태였다.
“형.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응? 뭔데?”
“저놈 데려가실 거예요? 유니콘이라고 하셨잖아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보기만해도 엄청 희귀한 녀석일거 같은데요.”
“희귀하기는 하지. 특히 뿔이나 피는 쓸 데도 많다고 알고 있거든. 하지만 데려갈 수는 없단다.”
“왜요?”
“유니콘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신수나 다름없는 동물이거든? 스스로 따라오는 거면 몰라도, 신수를 강제할 수는 없어. 설령 강제한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보복이 되돌아온다고 하더라. 푸른 산맥 기억나지? 어떻게 보면 반시보다 더한 녀석이라고 보면 돼.”
나도 모르고 저지른 일이기는 했지만, 홀 플레인 에는 유니콘을 죽이면 반시보다 보다 범위가 넓고, 더욱 강한 저주를 받는 설정이 있다. 반시의 저주는 한달 내로 ‘무조건’ 죽는다는 설정인데, 그보다 더 강한 저주가 덮쳤으면 꽤나 골치가 아팠으리라.
“헷, 아깝네요.”
“스스로의 의지로 우리를 선택하거나, 자연사한 시체를 거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무튼 이대로 놓아주는 게 최선일 게다. 그래도 신수는 빚을 지우면 확실히 은혜는 갚는 특징도 있으니, 이대로 보내주면 언젠가는 보답이 되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 이만 미련을 버리렴.”
‘솔직히 빚이랄 것도 없지만.’
안현은 의문이 해소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아쉬운 눈길을 보냈다. 현재 유니콘의 주위로는 안솔, 이유정, 고연주가 있었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김한별과 백한결이 막을 유지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백한결 내미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걸로 보아, 확실히 유니콘이 남성보다는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
어?
백한결의 진정한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 찾아올 즈음이었다.
“어어, 유니야! 어디가아~?”
“뀨뀨~.”
안솔의 부름에 유니콘은 고개를 돌려 대답하고는 이내 내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현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그곳을 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유니콘을 보더니 급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오! 온다, 온다! 형! 우리한테 오고 있어요!”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요? 흐흐. 드디어 만져볼 수 있겠구나.”
“아, 아니야.”
이윽고 나와 안현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유니콘은, 내 발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보았지만, 나는 함부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성의 손이 함부로 닿으면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이대로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곧 아가 유니콘이 방긋 웃으며 기분 좋은 소리로 울었다.
“뀨우~.”
그리고 내 바위에 걸터앉아있는 내 다리에 고개를 들이밀고는, 슬쩍슬쩍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비비적, 비비적.
“어머! 어떡해 어떡해! 오빠 다리에 얼굴 비비는 것 좀 봐. 너무 귀여워~.”
“어머? 의외네. 유니콘은 남성은 어지간해서는 따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 응?”
고연주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백한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와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앞장서서 치료해줘서 이러는 건가?’
설마 나에게 친근감을 드러낼지는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안현은 샘이 났는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 손을 내밀었다.
“흐흐. 이놈! 나도 좀 안아보자.”
“뀨뀨?!”
“오. 역시나 부드러운…. 악!”
“뀨! 뀨뀨!”
안현이 녀석을 들어올려 거칠게 품으로 안으려고 하자, 아가 유니콘은 재빨리 꼬리를 휘둘렀다. 곧이어 안현의 뺨에서 철썩, 소리가 들리고 약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가 유니콘의 갑작스런 공격에 안현은 녀석을 놓치고 말았고, 이내 벌건 자국이 난 볼을 쥐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유니콘은 후다닥 도망가더니, 얼른 내 다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 이자식이!”
“뀨뀨!”
“꺄하하! 대박 웃겨! 때리고 오빠 다리 사이로 숨었어!”
“정말 이상한 일이네…. 왜 백한결이랑 수현은 따르면서 쟤는 따르지 않는 걸까….”
안현은 화를 내며 뒤로 돌아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유니콘은 바위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도망쳤다. 한동안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유니콘은 의외로 잽싼 몸놀림을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바위에서 내려온 후 막 내 앞으로 뛰어가던 유니콘을 안아 올렸다. 녀석은 깜짝 놀란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내 품에 덥석 안겼다.
“헉, 헉! 뭐야! 왜 형은 되고 나는 안 되는데!”
“뀨뀨!”
안현의 호통에 유니콘은 고개를 한번 번쩍 쳐들고는, 다시금 내 품에 얼굴을 비볐다. 여성 클랜원들은 어떻게든 한번 더 유니콘을 안아보고 싶은지, 모두 슬금슬금 다가와 내 품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 품에 안긴 녀석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오직 내 품에 안겨 기분 좋은 울음과 함께 네다리를 휘적거리는 중이었다.
김한별은 우리들이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휴식 때문에 조금 넓혔던 범위를 살짝 줄였다. 그리고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유니콘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떻게 유니콘이 이곳에 있을 수 있었던 걸까요?”
“유니콘의 피에는 강한 마법 저항이 흐르거든. 자신에게 해로운 마법은 거의 건들지도 못할 정도지.”
김한별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후, 나는 녀석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런데 너, 왜 여기에 있었니?”
“뀨뀨?”
“혼자 온 거야? 네 아버지나, 어머니 유니콘은 없어?”
“뀨. 뀨뀨, 뀨뀨뀨. 뀨, 뀨뀨, 뀨뀨뀨뀨뀨.”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녀석은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 녀석을 살살 보듬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쉴 만큼 쉬었고, 보석은 무한하지 않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유니콘은 강제로 데려갈 수 없는 동물이었다. 신기한 신수를 보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먹지 못할 그림의 떡. 다행히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내가 다치게 했다는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니, 그렇다면 여기서 이만 놓아주고 이제 서로 갈 길을 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주목하세요. 10분 후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오빠, 얘 데려가면 안 돼?”
“안 돼. 유니콘은 다시 놓아줄 거야. 얘 멋대로 데려갔다가는 큰일난다.”
“오라버니이~.”
이유정과 안솔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다시금 살며시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가야. 잘 들어. 혹시라도 우리를 따라올 생각이 있으면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주변에 잠시 놀러 나왔거나, 아니면 다른 유니콘들이 있다면 이만 돌아가렴. 아마 지금쯤 네가 없어져서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게다.”
“뀨?”
아가 유니콘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이더니,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대답을 확인한 후 나는 차분히 녀석을 대지로 내려주었다. 그러자 아가 유니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오빠. 진짜 이대로 보낼 거야? 정말로 안 데리고 갈 거야?”
“에헴. 이유정, 진정하라고. 그 이유는 이 몸이 설명해주지. 들어봐. 유니콘은 신수야. 보낼 수밖에 없어.”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는구나.’
안현은 내게서 들은 말을 가지고 아는 체를 하고 싶었는지, 아쉬워하는 클랜원들에게 침을 튀기며 설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사용자는 거의 없었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꼬리를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유니콘에게로 꽂혀 있었다.
“유니야 잘 가~! 우리 또 보자~.”
섭섭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안솔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유니. 명명화시키는 감각 한번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드려는 찰나였다.
자박자박 걸어가던 아가 유니콘은 고개를 한번 슬쩍 돌리더니 이내 앞쪽 오른발을 들어올리며 “뀨.” 하고 울었다. 여성 클랜원들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자지러지고 말았다.
이윽고 유니콘이 협곡 저편으로 사라지자, 클랜원들은 한두 명씩 아쉬운 말을 토해냈다.
“아, 정말 홀 플레인 은 모르겠네요. 저도 길들은 유니콘을 본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는데. 설마 여기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쉽다.”
“…….”
“수현? 수현!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네? 아, 아닙니다.”
고연주가 배시시 웃으며 옆구리를 찌르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방금 전 유니콘의 행동을 본 이후로 나 또한 녀석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유니콘은 분명 헤어지기 전 앞쪽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1회 차에서 유니콘을 길들인 사용자가 적은 기록을 본 적은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방금 아가 유니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다.
‘뭐였더라. 또다시 보자…였었나? 아닌데….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때는 유니콘이라는 동물이 나와 인연이 없다고 여겼던 터라, 그다지 관심 깊게 읽어보지 않았다. 한동안 미간을 좁히며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애매하기만 할 뿐,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나는 결국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천천히 기다려보면 알겠지.’
아무튼 뜻하지 않은 유니콘의 출현으로, 제법 즐거운 분위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 동안 다들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을 터이니, 이제는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 입니다.
휴. 죄송합니다. 원래 이번 회 후반부에 유적을 발견하고 들어서는 것으로 잡아놨었는데, 유니콘 떡밥이 너무 길어졌네요. _(__)_ 아, 혹시 모르니 유니콘과 반시의 저주 설정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1. 유니콘(반시)이 사망을 제외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 : 저주를 내리는 ‘주체’는 유니콘(반시)이다. 이 경우는 강력한 저주가 아닌 보복 행동 또는 보복 저주 정도로 볼 수 있다.
2. 유니콘(반시)이 강제적으로 사망했을 경우 : 이 경우는 설정의 발동으로 자신을 사망케 한 대상에게 강제적으로 강력한 저주가 내려진다. 설령 그 대상을 모르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여기서는 ‘무조건’ 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3. 위의 경우에 대해서, 해당 저주에 대해서 미리 방어하거나, 설령 받더라도 해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 리리플 』
1. 한방모드 : 어? 저번 회도 1등 하지 않으셨나요? 덜덜 합니다. 하하하. 1등 축하 드립니다.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2. 사람인생 + KKKranuse : =ㅁ=…. 기관총이 필요하겠군요.
3. 랜슬럿 듀 락 : 그렇습니다. 비 호감입니다. 모든 것은 저의 탓입니다. ㅜ.ㅠ
4. 야우로 : 예. 형 맞습니다. 누나 아닙니다.
5. hohokoya1 : 오늘 분량 빵빵히 넣었습니다. 하하. 솔직히 유니콘 떡밥이 이렇게 길게 잡힐 줄은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네요. -_-a 축하 감사합니다!
6. Morph : 네. 초반 보스 몬스터가 준 GP와 수현이 모은 게 워낙 많아서 그렇지, 원래 GP는 모으기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세라프는 원정 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한번 나올 예정입니다.
7. 에르하시아 : 아아. 기억나요. 그때 아마 몇몇 분들이 하차하셨을 겁니다. ㅋㅋㅋㅋ. 그때 그분들이 뭐라고 하셨냐면…. 아, 주인공 이외의 하렘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ㅜ.ㅠ
8. 레필 : 오호라. 그렇군요. 하지만 안솔은 유적으로 들어가고 강제적으로…. 아, 아닙니다. 제가 모르고 스포일러를 할 뻔 했군요. 껄껄!
9. podytop : 일단은 사그라질 때까지 참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저 또한 생각이 있습니다. 저 혼자 멘붕할수는 없잖습니까. 후훗. -_-+
10. 오피투럽19 : 음, 그것은 그 작품 작가님께 조금 죄송한 일이네요. 원래 작품에는 내용에 관한 코멘트가 달려야 하는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ㅇ?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