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7
00027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총 네 명 이었다. 성비는 남성 세 명에 여성 한 명. 모두 머리는 산발된 상태였고 옷도 헤진 게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의 모습도 오십보백보였기에 딱히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네 명의 특색을 살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남성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오른팔에는 기다란 활을 하나 들고 있었다. 아마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인 모양이다. 입을 딱 다물고 우묵한 눈동자로 우리들을 보는 게 과묵한 성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때, 왠지 모르게 꽤나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용자라면 홀 플레인에서 활동했다는 소리. 솔직히 조금 흔하게 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일단 넘기기로 결정하고 나는 시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머리카락을 거의 허리까지 기른 사람이었다. 얼굴도 갸름하고 몸도 호리호리한 편이라 뒷모습을 보면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부진 턱 선과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보호받는 걸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는데, 단아하게 생긴 외모가 눈에 들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는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에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를 씩 드러내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척 봐도 까불거리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가장 선두에 선 남성은 우리를 흘끗 보았다. 그리곤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랑 비슷한 생존자인 것 같은데.”
“생존자는 저번에도 만났으니 놀라울 건 없다.”
활을 든 남성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단검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던 남성이 우리를 보며 픽 웃음짓고는, 예상대로 까불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보아하니 스무 살 초반? 어린애들이네…. 불쌍한 놈들.”
그 말에 안현이 발끈 했는지 방패를 상단으로 올리며 한걸음 나섰다. 나는 재빨리 그의 어깨를 잡은 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다행히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안현은 이를 바드득 깨물고는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단검을 던지던 까불이는 기도 안차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저놈 봤어? 저기 양아치 같이 생긴 녀석. 방금 전에 내 말에 발끈 했다니까. 나 참, 뭔 말을 못해요. 무섭네.”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넌 빠지고 일단 정민이한테 맡겨봐.”
“…체.”
활을 든 남자가 타박하듯 말하자 그는 입을 삐죽거리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애들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상태였다. 하긴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들끼리만 떠드는데 속이 상할 만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긴장감이 치솟는 순간, 긴 머리 남성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우정민이라고 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거지 같은 곳에 우연히 떨어진 사람이지.”
‘우정민. 붉은 송곳니 클랜 로드?’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악마로 불렸던 쌍 단검을 트레이드 마크로 사용하는 놈. 설마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놈이 우정민 이라고…?
나는 얼른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우정민
* 성별(SEX) : 남성(26)
* 신장 • 체중 : 177.9cm • 65.7kg
* 성향 : 중립 • 혼돈(True • Chaos)
『능력』
* [근력 51] [내구 43] [민첩 59] [체력 48] [마력 55] [행운 36]
우정민의 사용자 정보는, 통과의례에서 평균으로 따져 안현을 능가하는 사용자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볍게 부수고 말았다. 그리고 눈 앞의 남자가 후에 연합군의 주축을 담당하는 붉은 송곳니 클랜의 로드 우정민 이라는 사실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안현. 이하 동문.”
안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우정민 일행에서는 한층 소란이 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연스럽게 온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 올렸다. 정말, 정말 저놈이 우정민이 맞는다면 나머지 애들은 몰라도 적어도 활을 든 놈이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분명 홀 플레인 후반부에 10강의 한 자리를 담당하는….
순간 죽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분명 나 혼자 여기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죽였을 테지만 애들이 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어느새 우리 일행과 우정민 일행은 자연스럽게 무기를 빼어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까불 남은 불쾌한 목소리로 안현을 보며 이죽였다.
“하여간 이래서 어린 놈들은 잘해주면 안돼. 안현이라고 했나? 죽고 싶지 않으면 말투부터 공손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오빠. 지금 싸울 시간 없어.”
“이런 거 한두 번이야? 죽이는 건 금방이야. 넌 그냥 조용히 기다려.”
처음으로 중앙에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지만, 까불 남은 바로 받아 쳤다. 그의 대답에 그녀는 무서울 정도의 눈길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성의 짜릿한 시선을 받은 까불 남은 입을 쩝쩝 다시곤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째려보지마. 잡아 먹어버리기 전에. 아. 농담. 농담. 얘는 뭔 농담을 못해…. 아무튼 좋아. 거기 애송이들아. 이 어르신은 천승현이라고 한단다. 너희들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이 다섯 마리 원숭이들 말이야. 너네 들이 잡은 거니?”
“그랬다면 어쩔 건데.”
천승현이라. 넌 홀 플레인에서 만나면 뒤졌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주변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제발 이유정만이 나서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는데 역시나 였다. 애초에 자존심이 강한 이유정인데다가 박동걸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이는 천승현이 보이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유정의 말에 그는 눈을 끔뻑끔뻑 하더니 박장대소하며 웃어 젖혔다.
“푸하하하~. 하이고…. 참자, 참자, 참자. 큭큭, 이 망할 가시나 야. 딱 여기까지 봐준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기분이 그리 넉넉하지가 못해요. 또 정~말, 무~지, 많~이 바쁘고요. 응? 그러니까 우리가 묻는 말에만 성실하게 대답하고 얼른 빠이빠이 하자고. 참. 말은 곱게해라잉. 아니 뭐, 굳이 안 해도 돼. 이 이상 경고는 안 할거니까.”
천승현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던 이유정은 순간 그 특유의 비웃는 얼굴이 되었다.
“미친놈. 에라 이 병신 같은 놈. 경고 안 하면 어쩔 건데.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깝치는거 봐. 찌질 한 새끼.”
역시나 이유정의 입담은 시원했다. 천승현은 어떻게 보면 딱 박동걸과 비슷한 과의 사람이었다. 이유정이 표독스런 얼굴로 독설을 내뱉자 그는 예상외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쉬며 단검을 집는 게 보였다. 나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애새끼들이나 계집들이나 꼭 때려야 말을 들어요. 아무튼 잘 가라.”
씨불딱거리던 천승현은 이내 오른손을 들더니 이유정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가지고 놀던 단검 하나가 쏜살같은 속도로 미간을 노리고 오는걸 볼 수 있었다. 막 이유정을 잡아 당기려는 찰나 방패를 앞세운 안현이 재빠르게 움직이는걸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 남자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지 안현은 방패를 단단히 쥔 상태로 유정의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나는….
캉!
피잉! 푸욱.
“으아아아악!”
단검은 강한 쇳소리를 내며 방패에 부딪쳐 떨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천승현은 화살이 박힌 오른손을 붙잡으며 나자빠지고 말았다. 상황은 간단했다. 안현이 단검을 막는 사이 나는 궤도를 수정해 그 놈에게 화살을 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활을 든 남자가 시위를 걸고 나를 노리려는 기척을 파악하고 나 또한 먼저 화살을 쏘아내려고 했으나 팅, 하고 빈 시위만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마음에 이번에는 본신의 힘을 끌어내 순식간에 화살 3개를 장전하고 그 놈의 미간을 향해 석궁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 이름(NAME) : 선유운
* 성별(SEX) : 남성(25)
* 신장 • 체중 : 180.9cm • 78.4kg
* 성향 : 중립 • 중용(True • Neutral)
『능력』
* [근력 45] [내구 48] [민첩 62] [체력54] [마력 50] [행운 50]
끼릭! 철컥!
선유운. 역시 그 놈이었다. 궁수라는 직업으로 홀 플레인 최강의 자리인 강의 한 자리를 차지한 사용자. 다른 놈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새로 장전하는 동안 시간의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능력치 포인트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가 훨씬 높을 텐데 선유운은 나와 거의 동시에 머리를 겨누고 말았다. 굳이 따지면 내가 근소하게 빨랐지만. 선유운도 그걸 깨달았는지 처음의 먹먹한 눈과는 달리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행들 사이에는 사늘한 기류가 감돌았다. 서로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지만 안현과 이유정, 김한별이 각자의 무기를 꾹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이 지경에 와서도 여차하면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걸 보니 내심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천승현은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정신을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으아아, 으아아악! 죽여! 야! 저 씨발 새끼 당장 죽여! 죽이라고!”
“…먼저 단검을 날린 건 너다. 승현. 그러니 제발 입 좀 닥쳐다오. 이 쪽 팔린 놈아.”
난리를 피던 천승현은 서슬 퍼런 우정민의 말에 징징 울면서 오른손을 감싸 안았다. 흘끗 시선을 돌려 이유정을 보니 몸을 미약하게 떨고 있는 게 아마 진짜 단검을 날릴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묵묵히 상황을 살피던 우정민은 천승현은 잠시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이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먼저 사과하겠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서로 그만 하지 않겠나? 지금 이러는 것도 서로간에 별 이득은 없어 보이는데.”
“그러고는 싶은데 옆에 놈이 활을 안 내리네.”
“선유운. 너도 그만해. 시위 풀고 활 내려.”
내 말을 들은 우정민은 손을 들어 선유운의 활을 강제로 내리게 했다. 다행히 선유운도 나를 잠시 보더니 활을 순순히 내렸다. 그들이 내리는걸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왼팔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나도 선유운도 장전을 푼 상태는 아니었다. 우정민은 우리 일행을 보더니 양손을 위로 올리고 한걸음 앞으로 걸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군. 원래 이런 놈들이 아닌데 근래 좀 힘든 일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칠어진 상태다. 일단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촉박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
일행들은 전부 나를 쳐다봤다. 심지어 안현마저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바다.”
“이 원숭이들은 어제부터 우리가 추적하던 놈들이다. 모종의 사정으로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 동안 우리 일행에 있던 한 명이 이놈들에게 납치 당하고 말았다. 대신 처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혹시 근방에서 여자 한 명 본적 있나?”
여성 사용자라…. 혹시?
나는 초입에서 망키들한테 강간 당해 자결한 여성 한 명이 머리에 떠올랐다.
“오빠. 혹시 그 노란색 옷 조각 남은 그 여자 말하는 거 아닐까? 등까지 오는 긴 머리랑. 응?”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도대체 얘는 생각이라는걸 하는 걸까. 어떻게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하지. 생각 없이 바로 말해버리는 이유정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버렸다. 이유정의 말을 들은 저쪽 일행들은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지더니 바로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여자는 처음에 시간이 없다고 말한 여성이었다.
“네! 맞아요! 노란색 옷이랑, 긴 생머리에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 그게….”
이유정은 당황한 목소리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망키 출몰 장소 초입에서 본 그 여자가 확실한 것 같은데 괴물한테 강간당하다 죽었다고 말하기는 뭔가 미안한 분위기였다. 우리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남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 대충 뒤에 이어질 내용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애원하는 목소리로 우리를 보채기 시작했다.
“혹시 가다가 지나치기라도 했나요? 아니면 언뜻 보기라도 했나요?”
“…….”
“제발 요. 부탁 드려요. 어디서 봤는지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그 애, 제 친 여동생이에요. 정말 착하고…. 순수한 앤데…. 흑….”
끝내 눈물을 보이는 여성을 보며 일행들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잘만 싸우던 녀석들이 꼭 이런 곤란한 건 나에게만 떠넘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착잡한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