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8
00028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 =========================================================================
“이곳에 오면서 여자를 본 적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본 여성이 그쪽 사람들이 말한 대로 납치된 사람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
최대한 충격을 덜 받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말 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눈을 여전히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말에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금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긴 생머리면 몰라도 노란색 원피스라면 거의 확실할 거에요.”
“노란색 원피스라 해도…. 조각조각 찢어진 상태라서 일부를 확인했을 뿐 입니다.”
“뭐…. 라고요?”
내 말에 여성은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우정민, 선유운, 천승현 세 명은 이미 손을 꾹 쥐는 게 아마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닐 거라는 희망을 담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왜 옷이 찢어져 있었던 거죠?”
“저희가 발견했을 당시 그 여성은 나무에 몸을 기댄 상태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가가서 확인해본 결과….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원혜수…!”
원혜수란 불린 여자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멍한 얼굴이 되더니 휘청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옆에 있던 천승현이 얼른 그녀를 받았지만 이미 다리는 완벽히 풀렸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아픔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원혜수라 불린 여성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혜연이는 어떻게 죽어 있던가.”
그러나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우정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착잡한 음성이 물씬 묻어 나오는 게 마음이 적잖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입가에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혀를 깨물어 자살한 것 같습니다.”
“아니. 잠시만. 그럴 리 없다. 그 애가 자살할 리가 없어.”
“발견했을 때 거의 나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음부에서 저 원숭이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던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 앉았다. 그만큼 우정민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눈에 살기가 감돌고 주먹을 꼬나 쥐는 게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보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던 선유운도 눈에 핏발을 세울 정도니 새삼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분노를 생생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내 말을 들었는지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원혜수의 비명이 들렸다.
“하…. 하하…. 하…. 하아아아아아아아아!”
“혜수야! 정신차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기세가 몹시 사나워 비교적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이던 천승현도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원혜수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양 손으로 바닥을 쥐어 뜯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혜연이가! 혜연이가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혜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원혜수! 정신 차려! 우리도 진태를 잃었잖아. 기억 안나? 그때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라고 말했으면서 지금 네가 이러면 어떡해!”
“시끄러! 혜연이는! 혜연이는!”
미친년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원혜수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분노로 비틀린 입가를 내비치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선유운과 천승현이 얼른 양 팔을 잡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악을 지른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죽었을 리 없어! 거짓말이지? 그렇지? 응? 거짓말이고 말해…! 말하란 말이야아아아아악!”
“혜수야…. 일단 가서 확인해보자. 응? 진정하고.”
천승현이 계속 달래곤 있었지만, 원혜수는 이미 거의 반 실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체는 이 뒤로 쭉 뻗은 길을 30분 정도 따라가시다 보면 나올 겁니다. 그 주변에 나무가 많지는 않거든요. 동생분 일은 유감입니다.”
“이 나쁜 새끼! 네가 혜연이를 죽였어! 죽었다고? 거짓말 하지마! 아니야. 그때 혜연이가 당하는걸 보면서 비겁하게 도망쳤지? 살릴 수 있었는데 도망친 거지? 이 개 같은 비겁한 새끼야아아아!”
“뭐라고? 이 미친년이…. 오빠?”
안쓰럽기는 했지만 내 욕을 하는 건 참지 못하겠는지 막 나서려던 이유정.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유정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내 엄한 얼굴을 봤는지 얌전히 물러났다. 그때, 조용히 하늘만 보던 우정민은 이내 담담한 얼굴로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짝!
나를 비겁자라고 저주를 퍼붓던 원혜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발개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을 쳐다본 그녀의 눈은 우정민의 손에 고정 되어 있었다. 우정민은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원혜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만해라. 원혜수. 더 보기가 역겹구나.”
“뭐, 뭐?”
“현실을…. 후, 아니다. 지금 너한테 무슨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는 않군. 엄한데 화풀이 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여라.”
“하…. 그래. 다 필요 없어. 자기들 동생 아니라 이거지. 그래~. 그렇겠지. 너희들한테는 고작 4일 동안 만난 인연일지 몰라도,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달라. 20년을 넘게 함께 살아왔다고. 그런데 뭐? 현실을 받아들여?”
독기 어린 음성으로 말하는 원혜수를 선유운은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녀의 눈길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걸 확인한 원혜수는 이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 3자가 봐도 그녀는 지금 미쳤다고 싶을 정도로, 주위로 실망, 좌절, 불안, 혼돈 등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원혜수, 너 미쳤어? 단검 날린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네가 이러면 안되지! 일단 진정하고 정신 줄부터 잡자. 너 도대체 왜이래?”
“그래. 나 미쳤어. 차라리 미치고라도 싶어. 그러니까 이거 놔. 노라고 그만!”
갈수록 히스테릭이 심해진다. 우정민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기서 진태를 잃었다. 그러니 그토록 사이가 좋고 애지중지하던 동생을 잃은 심정 또한 알고 있다. 아마 너와 동생이 4일 동안이라도 어떻게 지내는지 한번이라도 봤다면 누구도 네 심정을 공감하고 또 동정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 사람이 원혜연이라는 보장도 없다.”
“거짓말 하지마. 그래! 지금 쟤들이 거짓말 하는걸 수도 있잖아. 애초에 옷도 일부만 본거라 매? 나 지금 가볼래. 갈 거야. 아마, 아니 분명 혜연이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초반에는 그렇게 확신하던 원혜수는 어느덧 180도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애원 했다가, 좌절 했다가, 분노 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진다. 말 그대로 미쳐가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조건 희망적인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해. 너도 그때 혜연이가 원숭이 괴물들한테 잡혀가는걸 봤잖아.”
“안 가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니까. 이제 이거 그만 놔. 가야 해. 지금 갈 거라고.”
“…정민아. 일단 우리도 가보자. 가서 확인해보고…시체라도 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던 천승현은 이내 원혜수의 눈동자가 날카로워 지는걸 느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천승현과 선유운이 잡았던 팔을 풀어주자 그녀는 나를 한껏 째려보고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어색한 눈치만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나 아직 우정민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괜한 일에 말려들게 했군. 미안하다. 나도 4일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정도로 혜수와 혜연이는 서로를 아꼈어.”
안현은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른팔로는 안솔을 꾹 안고 있는 게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 이었다. 씁쓸한 얼굴로 둘의 모습을 보던 우정민은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복수를 대신 해줘서 고맙다. 손을 덜었어. 그런데…. 설마 네가 한 말들이 거짓말은 아니겠지?”
“뭐라고?”
순식간에 발끈하고 나서는 이유정을 본 후 우정민은 김한별, 안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럴 애들로 보이지는 않는군. 실례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군.”
“거듭 그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아쉽지만 저희도 바빠서. 그럼 저희도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깐만. 거기 석궁. 잠깐만 이리 와봐.”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그를 흘끗 보고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었다. 이윽고 그의 앞에 그는 일행을 살핀 후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죽이고 말을 걸었다.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한가지 정보를 주마. 너희들 지금 중앙의 워프 게이트로 가는 중이지? 대답하지 말고, 고개만 살짝 끄덕여.”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윽고 우정민은 은근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