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89
00288 체력 조루 탈출! =========================================================================
3층의 창고에서 장비 정리를 끝낸 후. 쫄랑쫄랑 뒤따라오는 안솔과 아기 유니콘의 생떼를 물리치고, 나는 김한별과 함께 간신히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나야 이번엔 내 쪽에서 볼일이 있어 가는 거지만, 김한별은 담당 도우미가 호출했다고 하니 공교롭게도 일정이 겹친 것이다.
천천히 걸어 신전에 도착한 후 우리들은 각자 신관의 안내에 따라 포탈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신관이 문을 닫고 나간 지금. 나는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포탈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중이었다.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천사를 떠올리고, 반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분히 추스른다.
물론 천사들은 도우미 역할을 할 때 굉장히 헌신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어찌됐든 이번엔 내가 손을 벌리는 입장이었다. 나는 능력치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만큼, 괜한 감정을 내세워 초를 치는 태도는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깊은 심호흡으로 내면을 다듬다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키며 단박에 포탈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다 빛이 일렁이는 공간으로 몸을 들이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나를 감싸 안는다. 끌어당기는듯한 기운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새 들어왔는지. 깜빡이는 시야에 익숙한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낯설지 않은 직사각형 제단이 보였다. 그리고 제단에는 천사 한 명이 앉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리자, 역시나 투명한 날개를 일렁이는 아름다운 천사 한 명이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황금빛을 반짝이는 분홍빛 머리카락…. 응?
‘뭐?’
의문을 채 내뱉기도 전에, 제단 위에 앉아있던 천사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오, 드디어 왔네? 안녕~.”
“?”
“안 그래도 조만간 호출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반가워! 난 이번에 새롭게 너를 담당하게 된 도우미, 산달폰이라고….”
“야.”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자, 나를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산달폰이 눈을 휘둥그래 뜬다. 하지만 이내 살살 눈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꼴을 보자, 왠지 모르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그러나 차분히 현 상황을 분석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도우미 교체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지끈지끈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몇 번 꾹꾹 누른 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 천사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사용자의 동의도 없이 도우미 교체를 하냐? 얼른 다시 세라프로 바꿔.”
“아이참. 왜 이렇게 급해? 너무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봐. 우리 처음 만나는데 이야기나 해보자. 응?”
“꺼져.”
“그러지 말고~. 난 네 도우미 해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너 세라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난 세라프 그 융통성 없는 것과 다를 거야. 응?”
“꺼지라고 좀. 아, 세라프?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5초 안에 나와. 안 그러면 다시는 소환의 방 안 올 거니까. 알아서 해.”
“Yes.”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산달폰이 앉아있는 제단 옆쪽에서 찬연한 빛 하나가 번쩍이며 나타났다. 이윽고 빛 무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천사는 예상대로 세라프였다. 그녀는 예의 고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산달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의기양양이(?)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계급 치천사 산달폰. 아쉽게도 사용자의 원상복구 요청이 확인되었습니다. 미리 약조했던 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잠깐만! 이런 게 어딨어! 아직 제대로 된 얘기도 나눠보지 못했단 말이야!”
“그거야 당신의 사정입니다. 그리도 자신하지 않았습니까? 산달폰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싫어! 이대로는 못 가! 야! 야! 잠깐만! 이건 너무하잖아!”
산달폰은 어떻게든 반항하려고 했지만, 세라프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순식간에 빛에 휩싸이고 말았다.
“뭐가 너무합니까? 처음 약조했던 대로의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
산달폰은 뭐라 더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역 소환이 완료된 듯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윽고 산달폰은 순식간에,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세라프는 무표정하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발걸음으로 제단위로 올라서고는 사뿐히 엉덩이를 붙였다.
“미안합니다, 사용자 김수현.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렸습니다.”
세라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왜 그런지는 대강 짐작이 갔기에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보면 내 잘못도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됐어. 보아하니 다른 천사들이 내 태도를 문제 삼았을 것 같은데…. 아무튼 다음부터는 멋대로 교체하지나 말라고. 대 천사 가브리엘이나 미카엘 정도라면 모를까, 누가 그런 덜렁이랑….”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가브리엘님과 미카엘님이면 도우미를 바꾸실 의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여기서 응 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는 건가?”
“가브리엘님께서 현재 대기하고 계십니다.”
“오지 말라 그래. 걔네 들은 담당하는 사용자도 없어?”
“예. 지금 바로 전하겠습니다.”
세라프는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착각인지 환청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미약한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세라프는 모든 작업을 마쳤는지 성스러움이 감도는 옥빛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사용자 김수현이 먼저 찾아와주셔서 놀랐습니다. 조만간 호출할 예정이긴 했지만 도우미 관련 일로 조금 지체된 상황이었습니다.”
“아. 네 조언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제 조언이 필요한 일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세라프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보이더니 곧 “아.” 하는 표정을 내비쳤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세모나게 열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또 한바탕 잔소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해서, 나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마음 먹었다.
“뭔지 알 것….”
“잠시만. 세라프. 일단 입 좀 다물어봐.”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분명히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가다 보면 분명 체력에 문제가….”
“아니, 알겠다고.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문제가 생겼으니까 지금 온 거잖아.”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세라프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연신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는 게 당장이라도 체력을 올리라 속사포를 내쏠듯한 기세였다.
나는 품 안에서 연초 한대를 꺼내었다. 그리고 연초를 입에 물기 전,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이미 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굳이 너를 찾은 이유는 화정에 대해서 조언을 들을 대상이 너밖에 없기 때문이야.”
“…….”
“네가 정말 내 도우미라면 내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봐. 나를 위한답시고 네 입장만 얘기하지 말고. 넌 예전부터 항…. 아무튼, 한 번. 한 번 정도는 내 입장에 서서 생각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하마터면 “항상 그랬어.”라는 말을 내뱉을뻔했지만,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잠시 여유를 찾기 위해 연초를 물고 불을 붙이자, 따갑던 세라프의 눈길이 조금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치익. 치이익.
“후.”
그리고 가느다랗게 연기를 내뿜는 순간 전방에서 세라프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Yes.”
“좋아. 중간에 말 끊기 있기 없기.”
“없기입니다. 좋습니다. 일단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세이 경청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체력을 올리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Okay.”
천사들은 약속을 무조건 지킨다. 저렇게 말한 이상 일단 내 할 말은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뒷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나도 일부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시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후,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속을 느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세라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현재 능력치에 관한 내 고민. 그리고 그에 관한 내 개인적인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
체력은 적당히 올려두고, 다른 능력치들을 101로 올리고 싶다. 하지만 화정이 걸린다. 그렇다고 반대로 체력에 모두 투자하자니 101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다. 아니면 여기서 조금 더 버텨보고도 싶다. 체력을 80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한 번 더 영약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는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결국에는 화정이 문제였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후, 나는 어떠냐는 눈길로 세라프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확실히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을 듣고 싶은데.”
“이해했다고만 했지 납득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해봐.”
“알겠습니다. 그럼 사용자 김수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현재 당신 몸 상태가 어떤지, 그리고 그 상태로 101로 능력치를 올려버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아니,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 말을 들어보면, 사용자 김수현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나쁩니다. 당신은 제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라도 하신 겁니까.”
“…….”
“애초에 화정을 드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린 건데 도대체….”
다다다다다다다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쓴맛을 곱씹으며, 연초를 한대 추가로 꺼내 들었다. 어느덧 내 주위에 떨어져있는 꽁초가 열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맞은편에서 약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용자 김수현.”
“응.”
“저는 약속대로 사용자 김수현의 말을 전부 들었습니다. 이제 제가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지금까지 말한 건 뭔…. 아니, 아니다. 그래 해봐. 마음대로 해보세요. 쯧.”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을 보아주십시오.”
딱!
세라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으로 네모난 그래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프 안에 사용자 김수현의 신체를 구현하겠습니다.”
“이게 내 신체 상태라고?”
“Yes. 아마 온 몸이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황이 보이실 겁니다.”
전방 허공에는 네모난 그래프와 그 안으로 인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1회차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다. 다만 세라프의 말처럼 모든 곳이 붉게 물들어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일 뿐이었다.
“앞서 다급한 마음에 조금 두서없이 말씀드린 것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면, 사용자 김수현은 검사입니다. 마법사, 사제 같은 클래스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전투를 치르는 방법 자체가 굉장히 판이합니다. 즉 검사는 직접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클래스인만큼 체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헌데 지금 상태로 다른 능력치들을 101로 올리겠다. 좋습니다. 체력을 90까지 올리고 앞으로 절대 화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체력을 80까지 올리고 다시 한 번 영약으로 체력을 상승시킨다. 좋습니다. 앞으로 원정은 물론이고 모든 전투를 중지하십시오. 그리고 최소 1년, 넉넉잡아 2년 동안은 무조건 체력 회복에 전념하며, 영약을 만들기 전까지 화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
일단 듣는다. 세라프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추가로 덧붙였다.
“과연 또 그런 영약을 만들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사용자 김수현의 입장에서 생각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도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선, 화정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특전으로 괜히 화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바닥을 톡톡 두드리다가,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심각한 건가? 정말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용자가 능력치를 높여 더 높은 신위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겠습니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않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사용자 김수현. 당신의 신체는 이미 진작에 무너졌어야 정상입니다. 지금 상태로 버티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혹시 처음 화정을 받아들일 때가 기억나십니까?”
기억난다. 화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몸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긴 했지만, 그 여파로 영구적인 체력 하향을 당했다. 마이너스가 붙은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영구적 체력 하향. 그때를 떠올리자 문득 한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설마….”
“그렇습니다. 장담컨대 앞으로 한 번만 더 화정을 사용할 경우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영구적 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정녕 그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뭐야. 그럼 결국 올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이잖아.”
“저도 상태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악화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화정을 일부러 남용하지 않고서야….”
세라프가 푸념하듯 말하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아무래도 마볼로와의 일전은 남용으로 누적된 데미지를 일거에 폭발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저는 사용자 김수현을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뵙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해주신 욕심도 사용자로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현재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래도 차차 정리되고 있었다. 내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아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세라프의 말을 들음으로써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제단에서 펄렁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앞으로 신성한 기운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살짝 시선을 들자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애틋한 눈동자로 나를 보는 세라프가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내 밀어 내 왼손을 감싸 올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애원 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무례하게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껏 제가 사용자 김수현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말 기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체력을 올려주십시오. 지금 사용자 김수현의 몸은 정말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마치 터지기 일보직전의 모터와 같습니다. 지금 체력을 올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세라프는 미약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쥐고 있는 손을 더욱 강하게 감싸고 끌어당기는 것을 보니 그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왼손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뺄 수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
“후유.”
조금 더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사용자 정보창을 불렀다.
*
[근력 96(+2)] [내구 92] [민첩 98] [체력 90]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자유 능력치로 총 6포인트입니다.)‘마음 같아선 모든 잔여 능력치를 체력으로 올리시도록 하고 싶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지금도 아주 안전한 상황은 아닙니다. 비록 체력을 90으로 맞추긴 했지만, 단 하나라도 타 능력치를 101이상으로 만드는 순간 몸에 걸리는 부담은 그만큼 상향할 것입니다.’
‘물론 영약으로 인한 상승은 앞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업적 보상도 있고, 장비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도 불투명한 미래는 맞습니다. 그래도 우선 당장은 현재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그것을 모두 긁어 모을 수 있다면, 어쩌면 5포인트를 추가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잔여 포인트가 총 11포인트가 생깁니다. 그것을 모두 체력에 투자한다면, 사용자 김수현은 화정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굳이 다른 능력치를 올리지 않아도, 사용자 김수현은….’
세라프와의 대화가 끝난 후, 포탈을 통해 홀 플레인으로 돌아왔다. 밖에서는 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서는 동안, 나는 사용자 정보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에는 체력을 올렸다. 세라프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말을 따라 체력을 올리는 것에 동의했다.
물론 완전한 동의는 아니었다. 모두 체력을 올린 것이 아니라 6포인트는 남겨두었다. 앞으로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이 6포인트는 만약을 대비한 여유 포인트였다. 여기서도 조금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적절히 능력치를 올리겠다는 말로 간신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라프의 말대로 하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다. 화정을 온전히 사용할 수만 있다면 101 능력치 하나를 갖게 됨과 동시에 굉장히 강력한 무기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하긴, 내 육체 능력치가 그리 꿀리는 것도 아니고….’
“후유.”
아무튼 이왕 올린 거, 더 이상 미련을 갖는 건 미련한 일이었다. 그리고 세라프 말마따나 능력치 감소가 일어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면 체력을 올린 건 꼭 필요한 선택이라 볼 수 있었다.
효과는 확실히 느껴졌다. 오전부터 신전에 오기까지 내내 무거웠던 몸이 지금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그런 만큼, 오늘 잠에 들면 내일 상태가 어떨지 자못 기대도 되었다.
이윽고 통로를 모두 지나친 후, 나는 신관의 배웅을 받으며 신전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 밖을 구경하고 있는 늘씬한 뒤태가 보였다. 내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여성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여성의 정체는 바로 김한별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경축! 김수현이 드디어 체력 고자를 탈출했습니다! 와! 짝짝! 아하하. 제가 예전에 도시를 돌아오면서 후기, 리리플로 몇 번 남긴 적이 있는데, 세라프는 원래 이때 등장할 예정이었습니다. 수현의 능력치에 조언 겸 등장할 예정이었죠. 물론 6포인트가 남기는 했는데, 원래 6포인트 남길 생각이었습니다. 어디에 쓸지는 통과의례 때부터 미리 정해둔 상태여서요. 조금 극적으로 구상한 내용이오니 그때를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S. 뜰에 수현이 체력 조루 탈출 기념으로 그려주신 고장난선풍기 님의 작품이 있습니다. “난 이제 체력 조루 아님!” 이라고 적혀있네요. 감사합니다! ^^
PS. 자베트 님이 그려주신 MEMORIZE 만화를 공지에 올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추후 몇 회 더 추가될 예정입니다.)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저번 회, 이번 회에 설명했지만 혹시나 해서 추가로 설명 드릴게요. 김수현은 몸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며 전투하는 검사입니다. 체력 90에 민첩 101이상이면 문제가 없으나, 그 상태서 화정을 사용해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화정은 마력을 통해 발현됩니다. 그리고 마력은 모든 능력치를 배가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체력을 90으로 올렸다고 해도) 화정만 해도 몸에 걸리는 부담을 좌시할 수 없는데, 그 상태서 민첩을 비롯한 다른 능력치들을 101 이상을 찍어버리면 부담이 더욱 배가되는 거죠. 그리고 영약을 먹지 않는 꼼수는 부릴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체력이 73으로 올라버리면 아예 영약을 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니까요. 차라리 바로 먹고 잔여 포인트로 남겨두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습니다. 🙂
2. 플룻 : 원래 이번 회 마지막에 드러내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잘랐습니다. 다음 회 소제목에 다시 등장할 예정입니다. ^^
3. 피네이로 : 언젠가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있겠죠. 다만 그것이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만해도 충분한데, 괜한 위험 부담은 감수할 필요가 없지요. 아무튼 체력에 관해서는 정답을 맞추셨습니다! 대단하세요. 😀
4. 풀초초 : 군대라, 그립네요. 아, 그렇다고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요. 하하하. 군생활 열심히 하세요!
5. Lizad : 곧 해결될 것들도 있고, 조금 시간이 걸릴 것들도 있네요. 세라프는 글쎄요. 하하.
6. 상상속과일 : 아니요. 이미 먹었다면 게임 끝입니다. 다만 영약을 먹지 않았다면 먹어봤자 효과를 보지 못했겠지요? 🙂
7. 황걸 : 대신 요즘 분량이 정말 빵빵 하지 않나요? 헤헤. 정말 빵빵 하게 올리는데….
8. 홍쎄바 : 하하. 101은 100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것은 지금껏 은연중에 드러냈습니다. 다만, 그런 만큼. 검사로써 그것을 감당할만한 체력도 있어야 합니다.(수현이는 체력 90이면 민첩 101 하나는 감당할 수는 있는데, 화정이 문제가 된 겁니다.)
9. [DeepBLue] : 그래서 수현이 안타까워했죠. 이상한 특수 능력이 개방됐으니까요. But, 제가 유정이를 그리 놔두겠습니까. 일전에 유정이가 어떤 클래스를 갖고 있었죠…? 하하. 힌트로, 황혼의 무녀는 세 개의 힘을 모으면 시크릿 클래스 승격입니다. 🙂
10. 감자띱 : 지금 수현이 능력치가 워낙 높아서 그렇지, 100만 되도 충분히 초인의 경지입니다. 거인의 우두머리는 반신 맞습니다. 거인 로드는 다른 의미에서 반신이라, 능력치로 정의하기 조금 애매하네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