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9
00029 왜 그러시는 거에요?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희도 정 중앙에 있는 워프 게이트로 가는건가?’
‘갈 수 없을 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가지 마라. 우리는 불과 이틀전 워프 게이트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었어. 하지만 실패했다. 불과 300미터를 남기고 말이야.’
‘왜냐고?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후퇴하기로 결정했거든. 그때 결정을 조금만 더 빨리 했다면…. 진태가….’
‘생존 조건은 알고 있지? 그냥 7일을 버티는 게 더 좋을 거다. 특히 그 놈은 절대로 상대할 수 없어. 그때 진태 그 놈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꼼짝없이 그 괴물한테 죽었을 거다. 꽤 거리가 떨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은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을 노려봤다.’
‘그 괴물은….’
*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은 포인트 지점마다 지정된 기간을 체류하지 않을 것. 랜덤 출몰이라는 조건도 있지만 이건 예측할 수 없는 사항이다. 솔직히 나는 워프 게이트 근처에서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것 보다는 우정민 일행이 3일만에 워프 게이트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하긴 나중에 홀 플레인에 명성을 울리는 우정민과 선유운이 있으니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문득 울부짖던 원혜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보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때 그랬다. 형과 그녀를 잃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미쳤었다. 아마 그때 손에 묻힌 피만 순수하게 모아도 웅덩이 몇 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안현.”
잘 걷던 도중 이유정이 안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현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평소 답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고마워.”
“뭐가.”
“…아까 구해준 거 고맙다고.”
안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하.”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여간 너는 그 성깔이 문제다. 성질 좀 죽이고 살아. 내가 처음부터 그 놈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너 얄짤 없이 이마에 단검 꽂혔다.”
“그 놈이 말을 열 받게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소에 수현이 형한테 하는 것 반만큼만 다른 사람들한테 해봐라. 아니면 한별이 성격의 절반만 닮던가. 얼굴만 반반하면 뭐해. 성격이 개차반인데.”
“바…. 반반? 정말…? 아…. 흐, 흥! 수현이 오빠는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이 하니까 그런 거고. 아무튼 난 싫은 건 싫어.”
안현의 반반하다는 말에 얼굴을 붉힌 유정은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소녀다운(?) 행동을 보이는 유정을 보며 안현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 이었다. 또 말다툼을 벌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 잘 넘어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두 명의 대화를 듣던 안솔이 안현의 옷깃을 꾹 쥐자 안현은 자동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안솔의 헤실 거리는 얼굴을 보며, 이유정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오직 둔한 안현만이 자기를 둘러싼 모종의 암투를 모른 채 열심히 주변을 살피며 나아가고 있었다. 하여간 왜 꼭 인기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둔해 빠진 걸까. 쯧쯧.
한동안 열심히 걷던 우리는 해가 넘어갈 즈음 세이브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는 동안 단 한번의 몬스터도 만날 수 없었다. 일행들은 운이 따른다며 좋아했지만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숲을 떠난 이후 도시에 잠깐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항상 괴물의 습격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안솔이 망키의 시체들을 보며 비명도 지르지 않았겠는가. 물론 내가 일부러 괴물들을 만나게끔 유도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일행은 그 동안 고생한 만큼의 보답을 받고 있었다.
워프 게이트를 둘러싼 주변 지대에는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괴물들이 모여 있다. 통과 의례 최상위권에 포진한 망키 다섯 마리를 처치한걸 봐도 그랬다. 그네들은 그 동안 수많은 괴물들이 일행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예민한 후각은 우리에게 묻은 비릿한 피 내음을 맡을 테니까.
분명,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우정민과 이야기를 나눈 후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만약에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고 워프 게이트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면, 먹이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보스 몬스터를 근처에 두고 활동할 간 큰 괴물들은 없을 것이다.
즉 내일도 가면서 괴물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정민네 일행처럼 워프 게이트를 앞두고 보스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아이러니한 상황 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피하고자 일부러 도시를 떠난 건데 다시 보스 몬스터를 마주칠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물론 두 상황의 차이점은 있었다. 도시에 있었다면 100% 만났을 테지만 지금 간다면 확률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나는 한가지 의문점에 들었다. 분명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은 존재한다. 그리고 통과 의례의 생존자들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여럿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분명 동시에 보스 몬스터의 출현 조건을 맞추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거기다 워프 게이트로 접근하는데 보스 몬스터가 높은 확률로 출현한다는 가정까지 더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문득 나는 통과 의례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느꼈다. 홀 플레인에서는 10년 동안 굴러 먹으면서 웬만한 건 연구를 마친 상태지만 통과 의례는 아니었다. 고작 사용자들이 가끔 얘기하는걸 우스갯소리가 흘려 들은걸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 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걷던 우리는 이윽고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란색 지붕이네요. 그런데 오두막처럼 생겼어요.”
“다행히 오늘도 발견했네. 그럼 약간 이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쉬는 걸로 하자고. 형, 괜찮죠?”
“하루 이상 머물지 말 것. 경고문은 여기도 있네. 아무튼 저번 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같은데. 그렇지 오빠?”
“나 먼저 들어갈래요. 빨리 몸을 씻고 싶어요. 옷도 갈아 입고 싶고요. 헤헤.”
“…….”
“형?”
“오빠?”
“응? 어, 그래. 그러자.”
황급히 고개를 주억이자 모두들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다시 조잘조잘 떠드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철 없는 녀석들. 이래서 단체 행동이 불편하다. 아마 나 혼자 단독으로 움직였다면 이미 홀 플레인에 입장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도 딱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가 상당히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서는 생존과 직결 되는 문제가 생기면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어떻게든 수를 내려고 애를 썻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수틀리면 뭐든지 베어버린다는 인식이 깊게 박힌 상태였다.
“오빠. 뭐해? 우리 먼저 들어간다!”
“…지금 갈게.”
나를 보며 해맑게 손을 흔드는 유정이를 보며 나는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싶었다.
*
밤이 깊었다. 나는 오두막집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더 이상 불침번은 나와 안현 둘만 서지 않는다. 나와 안현, 김한별, 이유정 네 명이 번갈아 가면서 서고 있었다. 정확한 교대는 알 수 없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다음 사람과 교대하고 있었다.
초 번은 이유정이고 그 다음이 바로 나였다. 세 번째가 한별, 말 번이 안현 이었다. 한 사람당 2시간 정도 서는데, 분명 1시간도 지나지 않아(내 느낌상.) 이유정이 교대하자고 생떼를 부렸다. 말하면서도 흘깃흘깃 내 얼굴을 피하는 게 분명 자신도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자 초코바 하나가 잡혔다. 대충 져주기로 하고 나가려고 하자 그래도 미안했는지 유정이 내 품에 찔러 넣어 주었다. 몰래 공쳐둔 모양 이었다. 식량이나 음료는 부족한 점이 없어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슬슬 한별이와 교대를 할 시간이니 대충 초코바 하나 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 봉지 하나를 뜯으려는 찰나 내 오른쪽 뺨으로 커피 음료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김한별이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런걸 숨겨두고 혼자만 드시네요.”
“…유정이가 준거에요.”
“그 언니 단것, 특히 초콜릿은 양보 안 하시던데요.”
“불침번 시간을 지키지 않았거든요. 생떼부린 게 미안했는지 주더라고요.”
내 말에 김한별은 쓴웃음을 짓고는 내 옆에 걸터앉았다. 초코바를 반으로 뚝 잘라 건네니 넙죽 받아 든다.
“잘 먹을게요.”
“나도 잘 마실게요.”
김한별도 처음보다는 훨씬 편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 이유정 같이 발랄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거리는 있었지만 조금은 줄어든 느낌 이었다. 다만 일행 중에서 아직도 우리만 서로 존댓말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굳어지다 보니 이제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게 왠지 암묵적인 약속인 것 같았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제가 온 것도 모를 정도시던데.”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라고 속으로 말했지만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입을 열었다.
“하하, 잠시 멍을 때렸나 보네요. 그런데 제가 표정이 안 좋다고요?”
“네. 오늘 오후에 그 남자랑 무언가 말을 한 후 조금 굳어버린 것 같아요. 아닌가요….”
그런가. 항상 조용한 표정을 유지했다고 생각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쓰다듬자 김한별은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때 무슨 말을 한 거에요?”
“…별거 아니에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에요. 현이 오빠도, 유정이 언니도, 솔이도 다들 은근히 불안해 하고 있어요. 그 뒤로 거의 말이 없으셨잖아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요. 다 잘 풀릴 겁니다. 그건 확신해요. 설령 뭔 일이 있다고 해도 잘 해결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초코바와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버렸다. 왠지 얘랑 얘기할수록 그녀의 기억이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침번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막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잠시만요.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경우 남자 주인공을 그냥 시원하게 보내주던데. 얘는 왜 안 그러는 거지? 김한별의 태클이 또 시작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원래 내 다음 차례가 안현 이었는데 굳이 김한별이 한다고 할 때 이상한 촉이 오기는 했었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피곤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하면 안될까요? 얼른 들어가 자고 싶어서.”
“저는 지금 듣고 싶어요.”
“저 어디로 안 도망갑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일부러 농을 던져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김한별은 어느새 처음의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김한별의 얼굴 위로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물을 수 없을 것 같은 감이 들어요.”
“아아, 그때 한 말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뭐냐 면요…”
“오빠.”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순히 오빠 소리를 들어서? 아니었다. 오빠 소리 들었다고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다.
“수현이 오빠.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김한별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고요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도망가지 말라는, 지금 이 자리에 있어 달라는 기세를 풍기며 그녀는 정면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녀가 진심이라는걸 깨달았다. 그에 따라 내 표정도 내려 앉았고 차분한 눈동자로 김한별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