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93
00292 비비앙의 각성 %26 그것을 바라고 오지 마세요 =========================================================================
부랑자는 의아한 얼굴로 시몬을 응시했다. 실제로 두 번째 만남 때 들었던 이야기는 ‘대모를 살해하면 생각해보겠다.’ 라는 것뿐이었다.
부랑자는 서서히 긴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청년은 겉모습만 보면 유약한 학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내면은 무법지대 서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고 불리는 ‘학살자’ 시몬. 그것이 바로 청년의 본 모습이었다.
“대륙 보호자? 그런 건 모른다.”
“이런, 그렇게 들리는 모양이네요. 대륙을 수호하는 자. 또는 이끄는 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도하는 자라….”
“인도하는 자?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시몬은 그 정도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분수대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부랑자는 청년이 들추는 분수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시몬은 서 대륙의 큰손인 만큼 적도 많았는데, 그에게는 고약한 취미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상대한 적들 중에서 나름 재밌었다고 여기는 이는 시체를 분수대안에 모아두는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시몬은 이번엔 다른 머리를 쥐어 올리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시체를 분수대에 던지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났는지, 그가 들어올린 머리는 해골이었다. 이따금 듬성듬성 보이는 빛 바랜 금빛 머리카락과 골격을 보면 원래 여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 해골이 바로 서 대륙을 수호하고 이끄는 자였습니다. 이름도 참 예뻤어요. 로렌스.”
“그 로렌스라는 해골이 대모를 살해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떠돌이도 사용자인만큼 담당 도우미로 있는 천사가 있겠지요?”
“그거야 당연하지. 지금이야 못 본 지 꽤 됐지만 말이야.”
부랑자는 즉답했다. 담당 천사가 있는 소환의 방으로 가려면 무조건 도시 안에 있는 신전의 포탈을 통해야 한다. 사용자의 탈을 쓴 부랑자라면 모를까, 지금 낫을 들고 있는 부랑자는 공식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몸이었다. 도시 근처로만가도 바로 척살당할게 눈에 보이는데, 신전으로 들어가 천사를 만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떠돌이와 정 반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끄는 자는 일반 사용자보다 천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작게는 개인, 크게는 단체를 비밀리에 돕는 이를 가리킵니다.”
“흠. 나도 나름 연차가 되는데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걸.”
“그러실 겁니다. 이끄는 자의 실체는 극히 비밀로 다뤄지는 정보거든요.”
“흥미가 돋는다.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아니, 최대한 자세히.”
부랑자는 처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지는 어느새 핏물이 흘러 질척이고 있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듯했다. 시몬은 왜 안 되겠느냐는 얼굴로 자상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약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한 명은 이야기를 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용히 듣기만했다. 이윽고 시몬이 모든 이야기를 마쳤는지 가벼운 콧숨을 내쉬자, 중간에 한 번도 끊지 않고 듣고 있던 부랑자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꽤나 애매하게 말하잖아.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지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니까요. 이것도 정말 우연찮은 기회에 알게 됐습니다. 솔직히 추측도 88%가량 섞여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 쓸데없이 정확한 퍼센트는 뭐지. 아무튼 그럼 12%는 사실이라는 소리…. 너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지? 네 말대로라면 정말로 극비로 다뤄야 할 정보인 것 같은데?”
“저도 한때 이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 기회가 닿아 단서를 잡을 수 있었지요. 아, 혹시라도 이것을 퍼뜨리시면 곤란합니다. 다음에 출현할 수 있는 이끄는 자가 제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꽁꽁 숨어버릴 수가 있거든요. 그럼 조금 귀찮아져요.”
히죽.
시몬이 해골을 잡아 올리는 것을 보며 부랑자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딱히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로렌스란 수호자 또한 시몬이 죽였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몬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부랑자를 보고는 미묘히 말아 올렸던 입 꼬리를 내렸다.
“어찌 보면 떠돌이 말대로 정말 애매한 사용자입니다. 일차적으로 ‘사용자 정보’가 지배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홀 플레인을 이끌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끄는 자라고 해서 절대로 목적 없이 활동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용자로써 천사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그네들과 엮인 게 있다는 소리지요.”
“목적이라….”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천사들이 괜히 이곳으로 사람들을 데려왔겠습니까? 저는 뭔가 목적이 있어서 데려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이끄는 자를 조금 더 직접적인 대리인으로 내세운 거고요.”
“천사들의 알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한다 라. 좋았어, 대충 감은 잡았다. 그럼 시몬은 대모를 북 대륙을 인도하는 자로 생각한 것이로군.”
짝짝.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시몬은 가벼운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부랑자는 건조해 보이는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렇다 해도 대모를 꼭 죽일 필요는 있었을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가능성은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래서 보험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죽일 필요는 있었습니다.”
“북 대륙을 망치기 위해서인가?”
“비슷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정확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해두죠. 왜냐하면…. 저는 북 대륙 사용자들이 무섭거든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지금껏 담담함을 유지하던 부랑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시몬은 말을 해놓고도 쑥스러운지 살짝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이곳 서 대륙으로 들어오는 여러 대륙 사용자들이 제법 있거든요. 솔직히 동 대륙이야 별거 없는 멍청이 노예들이고, 남 대륙은 그럭저럭 쓸만해요. 그런데 북 대륙 사용자들을 보면 말이죠, 이야 정말 죽여주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북 대륙에서 패배해 쫓겨났다고 생각하니 그 대륙 사용자들의 수준을 익히 짐작할 수 있더군요. 혹시 정말로 괴물들이 모여있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즉 깽판은 치되 복수가 두렵다는 건가.”
“처음엔 재미라고 말씀 드렸지만 어쨌든 저희도 노리는 바가 있으니 제안에 응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이용하는 거고요. 아차, 죄송합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전혀. 오히려 그렇게 나와주면 고맙지. 마음껏 이용하라고. 우리도 똑같이 이용해줄 테니.”
둘은 동시에 웃었다. 한참 동안 소리 죽여 웃던 부랑자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는 유익했다. 왜 대모를 죽이라고 했는지도 확실히 이해했어.”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아닐 수도 있고, 설령 맞는다고 해도 북 대륙이 서 대륙처럼 되리란 법은 없어요. 홀 플레인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용자들이니까요.”
“한계가 있다고…. 하기야 새로운 인도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래도 가능성은 제법 높아 보여.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이 너무 아귀가 맞아떨어지거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강철 산맥 원정 실패, 은둔해있던 대모의 귀환, 대모의 죽음, 그리고 현재. 은둔해있던 기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그 동안 북 대륙이 최고의 성세를 누렸음을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요.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시몬은 바지를 툭툭 털며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양팔을 쫙 벌려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프네요. 이만 일어나실까요? 장소를 옮기자고요.”
“응?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는 건가?”
“하하. 많습니다. 많고말고요. 저만의 성으로 가시죠. 맛있는 차를 대접해드리지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시길.”
“흠. 그럼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부랑자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비스듬히 땅을 디뎠다. 이윽고 두 남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랑자는 시몬의 등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약 열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앞장서서 걷고 있던 시몬에게서 갑작스레 말소리가 흘러 들었다.
“그런데…. 저도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떠돌이.”
“뭐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라서요. 예전에 대모를 죽였을 때 어느 길을 이용하셨어요?”
“쉽지 않은 길이었지.”
부랑자는 씩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럼 다시 한 번 잘 부탁 드려요. 최대한 빠르게 연락 드릴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니, 천천히 준비하시고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되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임한나는 정중히 가슴을 숙이며, 아니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윽고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난 천천히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고연주가 득달같이 달려와 내 무릎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그대로 허벅지를 쳐올릴까 하다가, 임한나를 데려온 공로도 있고 하니 참아주기로 했다.
“수현. 궁금한 게 있어요. 왜 한나한테 얘기 안 하셨어요?”
“네?”
“한나 걔, 궁수잖아요. 머셔너리에는 궁수용 레어 클래스도 있고, 궁수용 장비도 거의 세트로 있잖아요.”
“…….”
나는 대답에 앞서 고연주의 허리를 살며시 잡고 위로 힘을 주었다. 이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아래쪽으로 힘을 주며 내게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허벅지를 꾹꾹 짓누르는 고연주의 엉덩이를 느끼며, 나는 가볍게 숨을 쉬었다.
“만일 임한나가 들어온다면 장비는 클랜원 자격이 있다면 대여 형식으로 빌려줄 수는 있어요. 나중에 그녀가 클랜을 나가는 일이 생겼을 경우엔 회수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레어 클래스는 달라요. 황혼의 무녀는 한 번 계승하면 회수가 불가능하죠.”
“흐응~. 그래요?”
“물론 그림자 여왕의 보증이 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안현이나 이유정은 통과의례 때부터 나를 따라온 애들이고, 정하연과 신상용도 캐러밴 시절부터 함께해왔어요. 하지만 임한나는 달라요. 안 주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에요.”
“호호. 수현.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게 아니에요. 아마 수현이 다짜고짜 그 얘기를 꺼냈다면, 제가 몰래 한나를 따라가서 말했을 거예요. 잘하셨어요. 쪽. 쪽.”
고연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내 뺨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란 것은 알지만, 그래도 가끔 고연주나 정하연이나 나를 아이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침대에서.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봤는지,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표정이 왜 그래요? 이래봬도 저 인기 좋아요? 뭇 남성들이 바라마지않는 그림자 여왕의 입맞춤을 받았으면 좀 더 기뻐해 보라고요.”
“별로 기쁘지는 않군요.”
“거짓말. 그럼 아까부터 제 엉덩이를 콕콕 찌르고 있는 딱딱한 건 뭐예요?”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고연주는 다시 깔깔 웃으며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조용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자, 너무 귀엽다는 둥 조만간 새벽에 몰래 방으로 찾아가겠다는 둥 신나서 떠드는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나는 사용자 정보창을 켜 체력 능력치를 확인한 후 서서히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와봐. 아주 그냥…. 그날 두고 보자고.’
*
테라스에 서서 보는 클랜 하우스의 정원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해는 중천에 떠 정원 전체를 아우르는 따뜻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을 음미하며, 나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본격적으로 클랜 하우스 정리 및 재정비가 시작된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회의에서 다그쳤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한 주일 전만 해도 슬슬 눈치만 보던 클랜원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앞다투어 필요한 물품들을 요청해온 것이다. 오죽하면 이번 주 지출만 7천 골드가 넘었을 정도였다.
임한나와 밤의 꽃들의 일은 원만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국 러브 하우스의 마담을 그만뒀고, 밤의 꽃들을 데리고 나와 인근 여관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것저것 인수인계를 마치고, 밤의 꽃들에게는 고용인으로써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소양이나 복장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든 것을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하니, 임한나가 정말로 전건물주의 유언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용인으로 선발한 밤의 꽃들은 총 12명이었다. 고용인을 직접 고르겠다고 한 이유는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1차적으로 성향으로 걸러내었으며, 2차적으로는 진명과 능력치를 중심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밤의 꽃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고연주가 계획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그에 대해선 천천히 경과를 보고받을 생각이었다.
‘내일이면 임한나랑 고용인들이 들어온다고 했고….’
“야아. 너 몇 살이야…!”
“가,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세요….”
“너 열여덟 살이라고 했잖아아…. 그, 그리고 나 스무 살이거든? 내가 더 누나니까 내 말이 맞아!”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응?’
그때였다. 테라스에 서 일광욕을 하던 도중 아래서 앙칼진 목소리들이 왕왕 울렸다. 궁금한 마음에 힐끔 고개를 내밀며 안력과 청각을 돋우자,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테라스 아래의 정원에는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 신수가 보였다. 사람은 안솔과 백한결이었고, 신수는 당연이 아기 유니콘이었다.
아기 유니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대(大)자로 누운 채 고롱고롱 잠들어있었다. 이따금 주둥이를 쩍쩍 벌리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그에 반해, 옆에서는 안솔과 백한결이 서로 대치중인 상태였다.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안솔은 양손을 옆구리에 짚은 채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고, 백한결은 어수룩하게 서있긴 했지만 그래도 불만스런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얘 이름은 뀨뀨가 아니라 유니라고오! 유니이!”
“아, 아직 정해진 이름은 없잖아요. 저는 그냥 제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부를 거예요.”
“…조,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왜 내가 유니라고 부르는 거보고 비웃었어?”
“비웃지 않았어요! 솔직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수현이 형님도 뀨뀨가 더 낫다고 해줬어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안솔은 멍하니 옆구리를 짚고 있던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목 울대를 꿀꺽 삼키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럴 리 없어어…. 아니야아! 유니가 더 나아!”
“저, 전 뀨뀨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유니야!”
“뀨뀨에요!”
‘……………….’
“으앙!”
결국 백한결과의 말싸움에서 패배한 안솔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연초를 한대 꺼내 입에 물었다.
왠지 모르게, 요즘 들어 까닭 없는 한숨이 늘어난 것 같았다.
*
팔랑!
“호오!”
팔랑! 팔랑!
“호오…!”
팔랑! 팔랑! 팔랑! 팔랑!
“호오………!”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비비앙의 개인 숙소.
비비앙은 침대에 엎드린 상태로, 눈동자에 뜨거운 불길로 활활 불태우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굉장히 열중해있는 얼굴로 두꺼운 책을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넘긴다. 이따금 중요한 부분은 밑줄을 치며, 한쪽을 접어놓을 정도까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스톤을 킨 채 책을 탐독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말 연구심이 깊은 연금술사구나.’ 라고 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 순간 비비앙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옆에 빼곡히 적어놓은 기록에 추가로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엉덩이 찰싹찰싹…. 줄로 꽁꽁 묶기…. 털 밀기…. 수치 노예…. 강아지…. 채찍…. 삼각 목마….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후유~.”
뭔가 위험한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을 하나씩 내뱉는 비비앙. 그녀는 깃펜을 내려놓은 후 기록을 소중히 책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덮고 아련한 눈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하던 비비앙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럽다.”
뭐가 부럽다는 걸까?
이윽고 비비앙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를 뒤집어 벽에 기대놓았다. 그러자, 어떤 남성의 얼굴이 그려진 베개의 뒷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그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어앉고는, 한두 번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수, 수현 주인님….”
아직은 뭔가 어색한지 비비앙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내 굳게 마음을 먹은 듯, 눈동자에 힘을 주며 기어이 다음 말을 이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부, 부디 이 음란한 비비앙에게…. 수현 주인님이…. 마음껏 벌을…. 내려주세요…. 끼야아아아아아앙!”
간신히 말을 끝마친 순간, 비비앙은 양손을 불끈 쥐더니, 높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서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했어! 했다고! 꺄아아앙! 몰라몰라!”
꺅꺅거리는 비명과 함께 베개에 머리를 정신 나간 듯 비비고, 다리로 이불을 미친 듯 쓸어 내린다. 이윽고 비비앙이 이불 안으로 재빠르게 파고들어가자, 곧이어 퍽퍽 소리와 함께 이불이 불룩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에서 이불을 세게 걷어차며 난리를 쳐대는 모양이었다.
발광은 약 3분간 이어졌다. 3분이 지나자 스스로도 힘이 빠지는지 쉴 새 없이 들썩이던 이불이 잠잠히 잦아들었다. 얼마 있다가 이불 속에서 머리만 불쑥 내민 비비앙은,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껏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우히히히.”
뭔가 위험한 냄새를 잔뜩 풍기는 미묘한 웃음소리.
그렇게 수현이 모르는 곳에서, 비비앙의 위험한 각성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후유. 이로서 휴식 챕터는 이것으로 대강 마무리 지었네요. 새 에피소드를 위한 떡밥도 대강 뿌려놨고, 이제는 거두면서 터뜨려야죠. 🙂 수현이도 많~이 쉬었으니 만족하겠죠?(응?) 하하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합니다! 네! 고장난선풍기 님이 그려주신 팬 아트로,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에요. 참 예쁘죠? 🙂
2. 크라우디스 : 쿠폰 감사합니다! _(__)_
3. alsdkniqe : 황혼의 무녀는 바로 주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고요, 밤의 꽃은 수현이 치밀하게 골라냈습니다!
4. 천냥보은 : 이번 회도 재밌게 보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
5. 낙원환상곡 : 이번 에피소드를 장식할 전쟁에서 진가를 드러낼 예정입니다. 하하. 🙂
6. 오피투럽19 : 하하, 죄송해요. 그런데 어제 오늘 올린 서 대륙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에요. 정말로, 굉장히요. 후후.
7. 가식적썩소 :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8. KeaR、Royal : 아, 그러셨군요. 서 대륙이 미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라 외국 대륙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영어로 썼어요. 하하. 🙂
9. mc레코2 : 그럼요! 당연히 아니요~. 🙂
10. ads123 : 각 클래스의 특성화 능력치는 다른 능력치의 보조를 받습니다.(보조를 받는 경우, 정도 또한 클래스에 따라 다릅니다.) 현재 수현의 체력이 90이면 민첩 101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 화정을 품고 있는 상태라, 화정을 같이 쓰게 되면 체력 90으로 완전히 는 감당할 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앞으로 화정을 꼭 사용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신체의 균형을 위해 포인트를 남겨둔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두 체력에 몰아넣자니, 앞으로 벌어질 일에 101로 올리지 않으면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는 거죠. 앞으로 나타날 상대가 화정과 비슷한 힘을 지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여기서 중요한 건, 화정과 101 능력치를 똑같이 보시면 안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